피터스는 약 한 달간 제주에 체류하면서 제주의 모습을 기록했는데, 그것이 바로 “A Visit to Quelpart(제주 탐방기)”다. 그의 기록에는 당시 제주의 사회, 문화, 경제적 특징이 비교적 상세히 담겨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제주는 항구, 도로, 여관, 상점 등 기본적인 기반 시설이 거의 전무했다. 교통과 유통망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이는 제주가 근대적 교류망에서 소외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민들의 경제 활동은 주로 농업과 가축 방목, 특히 말과 소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상품경제는 미약하고 자급자족적 생활양식이 두드러졌다.
종교적 양상 또한 특이했다. 불교 사원과 승려는 드물었고, 샤머니즘과 제사 중심의 종교 행위가 지배적이었다. 언어와 풍습 역시 육지와 달라, 피터스는 제주를 단순한 지역적 변방이 아니라 독자적인 문화권으로 인식하게 됐다고 기록한다.
오늘날 제주도는 국내 최고의 여행지 가운데 하나다. 안타깝게도 제주의 물가가 비싸 “제주도에 가느니 동남아로 가는 것이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지만, 그럼에도 제주는 여전히 낭만의 공간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피터스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의 제주는 결코 그런 땅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제주는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기록에 따르면 제주로 유배된 인물은 약 200명이 넘는다. 이들은 대부분 정치범이었으며,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인사들이었다. 제주 유배는 형식상 엄격했지만, 지방관의 재량에 따라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했고, 정치 상황이 바뀌면 복권의 여지도 있었다. 오히려 유력 유배객의 경우, 제주의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유배객들이 남긴 기록 속 제주는 냉담하다. 추사 김정희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곳의 풍토와 인물은 아직 혼돈 상태가 깨쳐지지 않았으니, 그 우둔하고 무지함이 일본 북해도의 야만인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혹평했다. 또한 다른 유배자는 “글을 아는 자가 매우 적고, 인심이 거칠며, 염치와 정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평가를 종합해 보면,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 제주는 ‘교화가 덜 된 변방’으로 인식됐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인식 속에서 지방관리들 또한 제주 근무를 꺼렸다. 제주는 단순히 가난하고 낙후된 곳이 아니었다. 한양에서 가장 먼 섬으로 향한다는 것은 곧 중앙 정치와의 연결이 끊어진다는 뜻이었고, 이는 승진(품계와 직위 상승)과 출세의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제주 근무는 자연스럽게 회피의 대상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내내 제주에는 관리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주는 국가가 반드시 확보해야 할 자원을 생산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말, 감귤, 흑우, 전복, 사슴, 표고버섯 등 제주에서 생산되는 진상품(지방관이 관할 구역의 토산물을 임금에게 바치던 진상 제도의 물품)은 왕실과 국가 재정, 나아가 군사력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도 말은 특히 중요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 전기 제주 관련 기록의 상당수가 말에 관한 내용이다. 또한 “경국대전”에 따르면 말 한 필의 값은 노비 세 명의 값에 해당했다. 제주에서의 말 사육은 몽골 점령기부터 시작됐는데, 온화한 기후와 맹수가 없는 섬이라는 조건 덕분에 말 사육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조선 왕조는 제주를 국가 차원의 말 생산 기지로 관리했다. 중산간 지역의 숲을 초원으로 바꾸었고, 세종대왕 때에는 제주를 10개 구역으로 나누어 관영 목장을 설치했다. 이렇게 길러진 말은 제주 목사가 직접 관리·감독해 임금이 탈 말, 즉 “어승마”로 분류된 뒤 한양으로 운반됐다.
문제는 그 부담이 제주도민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됐다는 점이다. 말은 먹성이 좋고 예민했으며, 병들거나 죽으면 담당 주민이 사비로 보충해야 했다.
“말 한 마리 잘못되면 집과 밭을 판다”는 말이 제주에서 떠돌았던 이유다. 조정의 요구량은 늘 생산량을 초과했고, 종마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일부러 말의 한쪽 눈을 멀게 해 진상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연산군 시절에는 말고기가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과하게 상납을 요구하여 부담은 극에 달했다.
감귤도 마찬가지였다. 감귤은 제주에서만 나는 귀한 특산품이었고, 왕실의 집중적인 진상 품목이었다. 귤이 진상되면 “황감제”라 해 성균관에서 특별 과거시험이 열릴 정도였다.(성균관과 사학 유생에게 제주에서 진상된 감귤을 나눠주고 치른 특별 과거로, 사기를 높이고 학문을 권장하기 위한 제도였다) 그러나 냉장 기술이 없던 시대에 감귤을 한양까지 운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은 썩어 버렸고, 정해진 수량을 맞추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양을 바쳐야 했다.
수탈이 누적되면서 결국 제주도민들은 버티다 못해 좋은 귤나무 품종을 스스로 죽이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 직전, 제주도의 귤 과수원은 사실상 궤멸 상태가 됐다. 이후 제주에 다시 귤 농사를 도입한 인물이 우장춘 박사다.
오늘의 제주는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되지만, 조선시대의 제주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부담을 감당해야 했던 땅이었다. 중심에서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주변부에서 묵묵히 역할을 감당한 곳이 바로 제주였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중심보다 주변을 통해 역사를 이어 가신다. 성경 속 갈릴리처럼, 이름 없는 곳과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은 조용히 이루어진다. 조선시대 제주 역시 그러했다. 아무도 선망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감당된 희생은 분명 역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도 어쩌면 그런 곳일지 모른다. 주목받지 못하고, 보상은 적으며, 떠나고 싶은 자리일지라도, 그 자리에서 감당하고 있는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제주의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계속>
백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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