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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그 아래(1) (창세기 19장 1~38절)

유수영 목사와 함께하는 창세기 여행 40
유수영 목사
제주함께하는교회

롯이 소돔에 이주한 뒤로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과 떨어져 나와 소돔에 정착한 이래 아브라함이 왕들의 전쟁, 횃불 언약, 이스마엘 탄생과 성장, 할례 등을 거치는 동안 롯은 소돔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은 채 조금씩 자기 위상을 높여갔죠. 안타까운 점은 소돔에서 지위가 올라간 만큼 내면이 성장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결과만 보면 롯에게는 안정적인 소돔보다 고달픈 광야 생활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창 19:1)

 

두 천사가 소돔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두 천사가 가장 해가 뜨거운 대낮에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식사 한 후 소돔으로 갔기에 도착할 즈음에는 저물녘이 됐는데, 밝은 낮과 어두운 밤이라는 전혀 다른 배경은 아브라함과 롯이 처한 상황을 대조해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파트너라는 인정과 함께 상속자에 대한 복이 약속됐고 롯에게는 멸망이라는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요.


나그네를 만난 아브라함과 롯의 태도를 비교해 보아도 흥미롭습니다. 앞서 본 대로 아브라함은 극진함을 넘어 호들갑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습니다. 달려가 엎드리고, 가장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고, 식사하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손수 시중을 들었죠. 롯 역시 나그네를 대접하는 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어 보였지만 아브라함에 비하면 어딘지 모자라 보입니다. 물론 그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습니다. 이미 해가 진 뒤였으니 아브라함처럼 진수성찬 차리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성경에는 기록이 안 됐어도 실제로는 제법 잘 대접했을 가능성도 있죠. 그런데 두 천사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길에서 밤을 보내겠다고 말한 부분은 여러 가지를 추측하게 합니다. 롯을 시험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롯의 태도가 마음에 차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도 롯은 천사들을 집에 모셔 대접하는 데까지는 성공합니다.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 19:5)

 

소돔 주민들이 몰려와 집을 에워싸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요구는 두 이방인을 내놓으라는 것이었고, ‘상관하다’라는 단어에서 성적 범죄 의도가 엿보이는데, 모인 이들이 남자였고 천사도 남자 사람으로 보였으므로 당시 소돔에 동성애가 만연해 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성애라는 한 가지 범죄로만 이 사건을 판단하기에는 어딘지 부족해 보입니다. 하나의 사건 안에 아주 많은 요소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죠. 우선 이 사람들의 공격성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무례한 요구를 할까요? 롯이 자신을 찾아온 나그네를 정성껏 대접했을 뿐인데, 왜 죄 없는 나그네를 해칠 뿐만 아니라 롯까지 괴롭히려는 걸까요? 성적 탐욕이 목적이었다면 이런 폭력적인 방법보다는 은밀한 접근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젊은이와 노인을 가리지 않고 모여들었다면 성적 탐욕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단지 지나가는 나그네 두 명이 나타났을 뿐인데 이토록 맹렬히 달려들어 큰 사건을 만들었다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창 19:7)

 

사건의 진상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롯의 인생을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 소돔 성에 갔을 때부터 롯은 줄곧 이방인이었습니다. 성은 성벽을 경계로 바깥세상과 나뉘어 있는 공간이죠. 이것만으로도 닫힌 사회가 될 가능성이 큰데, 공동체 내부에 폐쇄적인 성향이 있다면 더더욱 고립된 사회가 되기 쉽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매우 풍요롭고 부유했기에 인근 지역 주민의 부러움을 크게 샀고, 요즘처럼 국가가 치안을 담당하지 않는 세상에서 주변 지역보다 훨씬 잘 산다는 사실은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치기 쉽게 만들었을 겁니다. 에덴동산 같고 애굽 같던 그 좋은 땅 이 실제로는 자기중심적이고 외부를 향해 공격적인 사회였다는 의미죠.


그런 곳에서 롯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광야를 떠나 소돔으로 이주한 덕분에 거칠고 고달픈 삶에서 벗어나기는 했어도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쉴 수 없었고 이웃으로부터 흠 잡히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써야 했겠죠. 그런데도 소돔 주민에게 롯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에 불과했습니다. 롯이 소돔 사회의 중심을 향해 한 발씩 다가설수록 그들의 경계심도 커졌고 둘 사이 갈등이 조금씩 싹텄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인 롯이 또 다른 이방인을 감싸고 돌자 군중의 감정이 폭발하고 만 겁니다. 소돔 주민의 사소하고 무례한 요구로 시작됐지만 롯에 대한 나쁜 인식이 더해지며 커다란 다툼으로 번진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소돔의 타락과 함께 롯과 소돔 주민 사이의 대립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자신을 위협하는 이들에게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기는커녕 어떻게든 달래 보려 노력하는 롯의 태도에서 더욱 잘 드러납니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창 19:8~9)

 

궁지에 몰린 롯이 뜻밖의 카드를 꺼냅니다. 천사를 대신해 결혼하지 않은 두 딸을 내주겠다는 제안이었죠. 이 장면을 보더라도 소돔의 타락이 동성애에 그치지 않고 성 문화 전체가 타락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나그네를 보호하겠다면서 딸을 내보내려는 롯의 생각이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딸을 희생해서라도 자신의 지위를 지켜내는 한편, 나그네에 대한 결례도 범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네요. 이 장면만 보면 롯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천사도 가족도 그의 안중에 없었고, 오로지 위기를 넘겨 자신에 대한 평판을 지켜내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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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의 유산을 넘어 다시 희망의 깃발을 듭시다!
존경하는 침례교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전국의 3500여 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저는 교단의 내일을 가늠할 중요한 길목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에게 미래를 열어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30년 전 우리 선배들이 눈물로 심었던 그 거룩한 씨앗을 기억해야 합니다. 30년 전, 우리에게는 ‘거룩한 야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3000교회 100만 성도 운동’이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외쳤던 구호는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침례교회가 한국 교회의 희망이 되겠다”는 당찬 선언이었으며, 복음의 능력으로 시대를 돌파하겠다는 영적 결기였습니다. 그 뜨거운 구령의 열정이 있었기에 우리 교단은 한국 교회사에 부흥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 열정의 거룩한 불씨는 꺼지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는 104차 총회에서 ‘부흥협력단’이라는 아름다운 동역의 저력을 통해, 개교회주의를 넘어 ‘함께하는 부흥 목회’의 가치를 배웠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하며 우리는 ‘상생’이라는 침례교만의 독특한 저력을 확인했습니다.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