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에 없는 세 가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문, 거울, 시계입니다. 카지노에는 창문이 없습니다. 바람이 들어오면, 제정신도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거울이 없습니다. 제 얼굴을 보는 순간,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물음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카지노에는 시계가 없습니다. 시간을 알면,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도 그렇게 합니다. 창문을 닫아 하늘을 가리고, 거울을 치워 자신을 잃게 하고, 시계를 멈춰 영원을 잊게 합니다. 이 가려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깨우는 강한 말씀을 하십니다.
“죽음이 있고 부활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며 우리를 그 카지노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 5:28)
하나님은 죽음과 무덤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불확실하고 모호한 세상 속에서 분명한 것 하나는 죽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을 죽여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너무 빠르게 돌아갑니다. 끊임없이 해야 할 일, 소비할 콘텐츠, 따라가야 할 흐름이 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은 ‘멈춤’인데, 이 시대는 멈춤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의 방향을 묻게 됩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는 “지금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만 하라고 합니다.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 삶의 의미, 책임, 방향을 고민해야 하기에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죽음은 묻습니다.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죽음 이후는 있는가?’ 이 질문들은 매우 무겁습니다. 그래서 그냥 생각하지 말고 회피하라고 합니다. 영화, 게임, SNS, 숏폼 콘텐츠는 끊임없이 자극을 제공합니다. 죽음을 생각할 시간 자체를 빼앗는 것입니다. “깊이”보다 “즉각적 재미”가 우선되며 죽음을 죽여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은 넘쳐나고 있습니다. 뉴스, 영화, 드라마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죽음”이 아니라 “소비되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에 익숙해지지만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게 됩니다. 또한 현대인은 인공지능 등 과학의 발달로 점점 “인간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집니다. 이 사고는 결국 “죽음도 언젠가는 해결될 문제”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인데, 그 죽음마저도 자신의 컨트롤 하에 두려고 하는 교만이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죽음을 죽여가고 있습니다.
아담 캑케이 감독의 영화 ‘돈룩업’은 큰 교훈을 줍니다. 천문학 대학원생 케이트와 교수 민디는 지구와 충돌하는 혜성을 발견하고 온 힘을 다해 세상에 경고를 전하려 합니다. 그러나 재선에 눈이 먼 대통령은 이 재난을 정치적 도구로만 바라보고, 언론은 아이돌 스캔들에 더 열을 올립니다. 혜성의 궤도를 바꿀 우주선이 발사되는가 싶었지만, 혜성 속 희귀광물의 가치를 눈치챈 악한 사업가의 로비로 우주선은 허무하게 귀환하고 맙니다. 혜성이 육안으로 보이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저 하늘을 ‘쳐다보라’는 무리와 ‘쳐다보지 말라’는 무리로 나뉘어 서로를 향해 분노를 쏟아냅니다. 혜성은 결국 지구와 충돌합니다. 영화는 묻습니다. ‘왜 그토록 명백한 진실 앞에서 눈을 감았는가?’ 이 영화는 혜성 충돌이라는 극단적 상상을 통해, 진실을 삼키고 인간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악한 마귀의 유혹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돈룩업(Dont look up)이란, “위를 보지마! 혜성이 오는걸 보지 마! 진실을 보지 마!”라는 의미입니다. 그 반대는 룩업(look up) ‘하늘을 올려보라! 거기에 진실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도 악한 마귀는 우리를 그렇게 속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죽음이 있고 심판과 결산이 있고, 천국과 지옥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는 하늘을 보지 말고, 오직 땅만 바라보는 넝마 인생을 살라고 합니다.
미국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어느 소년이 길에서 5달러짜리 지폐를 주웠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소년은 행여 또 이런 있을까해서 땅만 쳐다보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길에서 물건을 주웠습니다. 단추가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와 수천 개의 동전, 그 외에 수많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많이 주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것들을 줍느라고 푸른 하늘이나 그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의 날개짓과 반짝이는 이파리들을 볼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 일생이 결국 넝마주의 인생으로 끝나고 만 것입니다.
한 때 한국 사회에서 “없다” 시리즈의 책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일본은 없다, 신화는 없다,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정치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출구는 없다 … ‘없다’라는 말이 어필하는 이유는, 많은 이들이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있는 줄 알았는데 없었습니다. 스펙 좋은 신입 사원들을 막상 근무시켜보니 실력이 없었습니다. 수천 명의 팔로워, 화려한 인맥, 끊임없이 울리는 단톡방 알림 소리. 그런데 막상 깊은 고난의 때에 곁에 있어 줄 진실한 친구가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천하를 다 가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없었습니다. 다 해 보았는데, 있는 줄 알았더니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헛되고 헛되다” 이것이 세상 가치관을 쫓은 사람이 맞는 결산입니다. 있는 줄 알았더니 없습니다. 사람의 평가가 멋있는 줄 알았더니 나중에 천국 가보니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확실한 기억, 멜레테 타나투(Melete thanatou), ‘죽음의 연습’ ‘죽음에로의 선구(先驅)’ ‘죽음에로의 미리 가봄’을 통해 우리는 삶의 본질을 보며 현재를 더욱 아름답게 살 수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부활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 세상에 흐르는 시쳇말 중에 가장 틀린 말은 “죽으면 그만이다”는 말입니다. 죽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내 삶에 대한 결산의 날이 반드시 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성경은 의인과 악인 모두가 부활할 것을 말합니다. 의인의 부활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귐과 안식으로 들어가는 생명의 부활입니다. 악인의 부활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부활하여 삶의 결산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 삶은 변할 것입니다.
첫째 유혹에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어느 낚시꾼이 월척을 잡아 어탁을 떠서 액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이렇게 적어 삶의 교훈을 삼았다고 합니다.
“그때 내가 미끼만 물지 않았어도 나는 바다에 있으리라.”
유하의 짧은 시 ‘오징어’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바다로 배가 나아갑니다. 일제히 배 위에 설치된 모든 집어등(集魚燈)을 켭니다. 오징어에게 이 화려한 불빛은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물고 싶은, 치명적 유혹을 안고 있습니다. 오징어들은 이 불빛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끼를 덥썩 뭅니다. 시인은 곳곳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치명적인 ‘집어등’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2막 7장)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 금은 아니다 … 금칠한 무덤엔 구더기만 우글거리니”
사단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속이듯이, 미끼는 다 눈부신 빛이 납니다. 이렇게 빛나는 미끼에 안 걸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끝을 보는 관점, 죽음 후의 부활을 믿고 삶의 결산의 날이 온다는 것을 믿고 오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것은 기회가 아니라 미끼라는 것이 보입니다. 물고기가 미끼만 보지 않고 낚시줄을 본다면, 낚시대를 잡고 있는 아저씨를 본다면, 그 옆에 끓고 있는 냄비를 본다면 미끼를 물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꽃 인생이 아닌 열매 인생을 삽니다. 인생은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자신의 꽃 자랑을 하는 ‘꽃 인생’과 열매를 맺는 ‘열매 인생’이 그것입니다. 꽃 자랑하는 인생을 ‘화류계(花柳界) 인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꽃 자랑을 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열매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15:16)
평생토록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 그리고 주님의 마음인 전도 선교 구제에 힘쓰는 것.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입니다. 배나무에 배꽃이 무성하면 농부는 어서 꽃을 따 버립니다. 열매로 가야 하는 양분을 꽃이 다 취하기에 그렇게 합니다. 배를 심은 것은 꽃 때문이 아니라 열매 때문입니다. 하늘에 뜬 구름도 두 구름이 있습니다. 헛되이 천둥만 울리는 구름이 있고, 비를 뿌려 땅을 적시는 구름이 있습니다. 비 내리는 구름은 소리가 없지만 생명을 살립니다. 새 중에 제일 수다스러운 새는 앵무새입니다. 그러나 앵무새는 하늘을 날지 못합니다. 하늘을 나는 새는 말이 없습니다. 긴 말일수록 허당(虛堂)이 많습니다. 여러 멋진 말을 하지만 이파리만 무성한 사람이 있고, 한 마디만 말하지만 생명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활하고 삶의 결산의 날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꽃 치장하며 헛기침하며 사느라 정신없습니다. 참 초라한 사람이 있다면, 스펙은 많으나 하나님을 사랑한 스토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바울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한 흔적, 스토리가 있는 열매 인생이 가장 승리한 인생입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6:17b)
일제 강점기 때, 불미스러운 일을 한 지식인의 변명을 대표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조선 민족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했다.”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
일본의 지배가 오래갈 것 같으니 피 흘리며 싸우기보다, 동화되어 살다가 훗날을 도모하고자 했다는 변명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지배는 영원하지도 오래 가지도 못했습니다. 비단 일제 강점기 뿐 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지금 가장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그 무엇도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돈과 권력을 좇던 사람이 훗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할 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이 천년 만년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세상 모든 힘은 안개와 같습니다. 인생이 안개 같다는 것을 깨닫고 삶을 결산하시는 주님의 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알고, 영원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17세기에 가장 유행했던 회화 중 하나는 ‘바니타스화(畵)’입니다. 짧은 생의 덧없음을 주제로 하는 그림입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바니타스 바니타툼 옴니아 바니타스”(Vanitas vaniratum omnia vanitas) 의 첫 단어를 따온 것입니다. 바니타스 화의 중요 소재는 다가오는 죽음을 상징하는 모래시계와 해골, 젊음이 유한함을 상징하는 꽃병 속의 시든 꽃잎, 연기처럼 사라지는 영광의 무상함을 뜻하는 담뱃대 등입니다. 정교하게 묘사된 화려한 왕관과 홀, 그 뒤의 주교관 등은 최고의 권력을. 번쩍이는 은촛대와 회중시계는 부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촛대의 촛불은 이미 꺼졌고 시계의 바늘은 자정에 가까웠습니다. 아름답게 흐드러진 꽃다발이 시들어가고 있는 것도 인간의 젊음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꽃다발 중에는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 광풍과 거품 붕괴를 가져온 줄무늬 튤립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꽃병이 유리로 되어 있는 것, 곧 꺼질 듯한 비눗방울이 공중에 떠돌고 있는 것도 모두 인간 삶의 연약함과 덧없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그 가운데에 죽음을 상징하는 음산한 해골바가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밑에 책이 깔려 있는 것은 학문적 성취와 교양조차 죽음 앞에 헛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죽음과 부활 앞에 선 존재들
우리는 죽음과 부활 앞에 선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지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끝날 날이 있고, 부활의 날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음과 부활의 날이 있다는 것을 늘 인식하면서 살 때, 우리의 삶은 더욱 진지해지고 헛된 것을 추구하지 않고 생명의 삶을 살게 됩니다. 웰 빙(well being)은 웰 다잉(well dying) 속에서 나옵니다. 카르페 디엠 ‘현실을 즐겨라’는,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속에서 나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죽음 후의 선한 부활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생명의 열매를 맺으며, 하루하루를 꽃 봉우리처럼 소중히 여기며, 카르페 디엠! 환희롭게 살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