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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묘비

신뢰 17.6%, 불신 48.4%. 벌써 3년이나 지난 2010년에 보고된 한국교회의 평가다. 종교간 호감도 역시 최하위다. 그럼에도 교회와 목회자, 성도 모두는 자성의 주체를 타자로 돌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런 현상으로 나타난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오늘날 목회자와 성도의 도덕성과 윤리는 실종되어 갈수록 더욱 세속화되어 가고, 목회자와 성도들은 저마다 부도덕 또는 비도덕적이고 윤리적이지 못한 삶에 대한 양심의 가책마저 상실해 가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상당히 반문화적이다”라고 유진 피터슨이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는 그의 저서에서 밝힌 대로 복음을 맡은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성도들은 반세속화로 그 견고함을 지속해야 함에도 세상을 교회 안으로 들여와 21세기의 다른 복음(?)을 탄생시키고 있다.


세상을 복음화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상화해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다. 종교개혁주일을 보내면서 교단과 교회 그리고 목회자들은 앞 다투어 개혁을 외쳤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복음으로의 회복을 위한 결단과 삶으로는 선뜻 나서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한국교회에는 범죄는 있어도 징계나 회개는 없는 듯하다. 남이야 어떻게 말하든 내가 옳으면 그것이 복음이고 선이라고 외치며 목회적 욕망과 탐심으로 충실한 명문가(?)를 만들고 있다. 이렇게 지금 한국교회는 스스로나 사회의 관점으로나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다.


모 교단에서 세습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기가 무섭게 모 교단 모 교회는 말도 안 되는 비윤리적 논리로 세습을 달성하는 부도덕한 쾌거(?)를 올렸다. 그것도 한기총 회장 출신 교회와 목사가 저지른 그들 입으로 합창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런가 하면 서울 용산에서 차세대 주자로 무럭무럭 성장하던 S교회 J목사가 성적범죄로 무너져 사임하며 자숙하겠다던 약속을 세상사람 보다도 못한 가치관으로 휴지를 만들며, 그에 의한 피해자와 한국교회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개척교회 간판을 홍대 근처에 걸었다. 회개라는 것이 예수 이름으로 이뤄지는 것이니 인정해야 하고, 며칠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도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기에 그가 회개하였다 할 때 그것을 문제 있다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의 행위에 대한 도덕성과 윤리성은 심히 저급한 수준이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개척 간판을 걸자마자 수 백 명의 그의 광적 팬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 다수는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지도자의 도덕성이나 윤리성이 어떠하든 그 사람이 좋으면 무조건 옹호하며 그의 현재 행위를 정당화 한다.

 

 만약 그가 개척한 자리가 텅 비었었다면 J목사는 진정한 회개의 시간으로 진입했을지도 모른다. 텅 비어 있는 그곳이야말로 주님을 1:1로 만날 수 있는 축복의 공간,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공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금 한국교회는 너나할 것 없이 부도덕, 비윤리화 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그리고 성경도 상관이 없다. 기도대신 세상방법과 절대적 말씀대신 세상의 가치적 교훈만 있으면 되는, 과정이 어떠하든 결과만 그럴듯하면 된다.


이런 현실이 오늘의 부도덕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니겔 캐머린(Nigel Cameren)박사가 말한 “모든 윤리 의식의 기원은 기독교 윤리”라는 말은 이미 오래 전 박제되어 추억관에 전시되어 있을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가끔 언론에서나 듣는 논문이나 노래표절처럼 목사의 설교표절은 일말의 목회적 양심의 가책도 없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목양의 일선에서 목자는 양을 위해 풍성한 영성을 유지하며 거룩한 품성으로 양떼의 진정한 주되신 이 앞에 무릎으로 은혜를 구하며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해산하는 고통을 겪어내며 강단에서 말씀을 해산해야 한다.


목회자의 진액을 다 짜내는 거룩한 고통 속에 양들은 건강하게 성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배 회복도 시급한 한국교회의 대과제이다. 하우어워스의 진단처럼 예배가 공연(entertainment)로 변질되어 성도는 예배 참여자가 아닌 문화소비자 또는 관객이 되어 가고 있다.


성경적 출처도 불분명한 열린 예배니 뭐니 하며 세상의 가치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 예수와 성경을 몰아내고 그의 도시 바벨을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의 한국교회와 목회자, 성도는 세상이 보여주고 있는 도덕성과 윤리성보다도 더 못한 저급함을 드러내며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고 있다.


결코 쉽지 않을 수 있고, 언제 회복될지 막연하지만 오늘 주님은 과거에 선지자들을 통해 돌아오라고 외치고 외쳤던 것처럼 지금의 한국교회에게도 돌아오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계신다. 귀 있는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성도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다시 우리의 참된 본질로의 회복을 위해 거룩한 시동을 걸어야 한다.


처음을 향한 위대한 발걸음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숨은 다시 한국교회에 불어넣어질 것이며 임파워먼트(empowerment)된 대 사회적 한국교회가 될 것이다. 임파워먼트란 미국의 신학자 샌더즈(Cheryl J. Sanders)가 자신의 윤리를 임파워먼트 윤리(empowerment ethics)로 소개한 것인데, ‘역량강화’, ‘힘의 부여’, ‘힘 길러주기’ 등으로 번역되는 말로 개인, 공동체의 영적이며 정신적, 사회적, 정치적인 힘을 증강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되지도 않는 종교 개혁을 앵무새처럼 매년 반복해 외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도덕성과 윤리를 강화시키며 우리의 핵심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우리 본래의 참 모습을 강화하고 복음의 역량강화로 교회에 힘을 불어 넣고, 목회자와 성도에게 진정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삶으로 향하도록 해야 한다. 삼투압의 원리처럼 세상의 이치는 강한 쪽으로 이끌리게 되어 있다.

 

교회가 복음을 통한 도덕성과 윤리에 강한 모습을 가지고 세상을 걸어가면 세상은 다시 십자가 복음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 때, 실천신학자 요수티스(M. Josuttis)가 쓴 책의 제목처럼 ‘목사는 다르다’(Der Pfarrer ist anders)라고 세상을 말한 것이며 성도들의 삶은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


소망한다. ‘신에 취한 사람 스피노자’라고 쓰여 진 묘비 같은. 비록 스피노자는 범신론자로 무신론자와 다를 바 없었고, 그 묘비에 새겨진 ‘신’이 우리가 말하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목사로 성도로 살았던 나의 훗날 묘비에는 “예수그리스도에게 흠뻑 취한 사람”이라는 글귀가 새겨지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예수그리스도에게 흠뻑 취하였다’고 세상으로부터 말하여지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계인철 목사 / 광천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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