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부산 어느 식당에서 H목사님을 만나서 점심식사를 하며 신앙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 목사님은 자신이 경험한 지옥과 천국에 대하여 말해줬다. 다른 사람들에겐 좀처럼 부작용이 없다는 스테로이드 주사를 병원에서 맞고는 체질적으로 맞질 않아 갑자기 실신하였다고 했다. 그때 지옥의 고통과 천국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차례로 경험했다고 하였다. 베드로는 산에서 변형된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고 그 곳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였지만 그 목사님은 천국이 너무 좋아서 그 곳에 있기를 원했더니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알려주더란다. 그래서 깨어나보니 시간은 20여분 지났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둘러서서 근심스런 표정으로 지켜보더라는 것이었다. H목사님의 간증을 듣다보니 오래 전에 고인이 된 한 청년이 문득 기억됐다. 그는 총각으로 중국집 주방장이었다. 식사하러 간 우리가족에게 관심을 보이며 친근히 접근해오길래 교회를 개척하러 온 사람들이라고 알려줬다. 그 청년은 교회를 방문하겠다고 하더니 말한대로 자주 찾아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에겐 심각한 심장병이 있었다. 지금은 심장과에서 혈관이 막힌 곳을 쉽게 뚫기도 하지만 그 당시엔 힘든 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
가끔 사람들이 찾아와 언제든 바다에 나가면 여지없이 이름을 아는 것이든 모르는 것이든 낚시에 고기들이 걸려 나온다. 그럴 때면 “TV에서는 큰 물고기도 많던데 왜 이렇게 작은 것 밖에 없느냐?”는 투정(?)의 소리를 듣곤 한다. 아무리 섬이라도 연안의 갯벌에서 큰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 너무 큰 욕심일 것이다. 미국에 처음 도착해 그 당시 미국에서 10여 년 넘게 목회하시는 어느 목사님의 따님을 만나 대화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 생활하는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왜 미국이 좋은가 물은 질문에 첫 번째 대답이 “나라가 커서 좋아요”라는 말이었다. 삼천리 반도라고 하는 대한민국은 미국의 52개 주 가운데 하나와 비슷한 영토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 대한민국에서 자라 이곳에서 생활하던 것을 뒤로 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느끼는 것은 “큰 나라구나” 하는 것이다.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도로를 달리며 “이 땅을 나의 손에 주시옵소서”라고 감사와 찬양으로 기도했다. 그런데 넓은 미국 땅에 살지만 마음마저 넓게 하기는 쉽지 않다.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으로 자기에게 유익하면 “미국에 사니 미국 사람처럼 살아야 된다”고 말하고, 한
포인세티아라는 화초가 있습니다. 이 화초의 꽃은 화려한 붉은색을 띄고 있으며 아름다워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화초입니다. 겨울에 피는 특성 때문에 외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장식용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포인세티아가 좋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춥고 캄캄한 환경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빛이 완전히 차단된 추운 곳에서 특유의 붉은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포인세티아의 파란 잎사귀가 어둠과 추위를 견뎌내고 꽃을 피워내는 모습은 불굴의 의지를 보는 것 같아 감동적입니다. 만약 포인세티아가 있는 곳에 빛이 새어 들어가면 붉은 꽃에 얼룩이 생깁니다. 심지어 이 화초는 비상구의 아주 희미한 약한 불빛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데 방해가 됩니다. 포인세티아가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철저한 고립과 어둠과 추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도 포인세티아와 같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사람을 더욱 강하게 만듭니다. 행복은 우리가 고난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고난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됩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춥고 고독한 시련의 터널을 지나야 합니다. 이 역경의 터널을 거쳐 인간은 비로소 아름답
얼마 전 카카오톡에 연결된 새로운 친구라는 분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다 한참 후에 연락이 왔다. “누구세요?” 나중 이야기하기를 “카카오톡에 나오는 ‘새옹지마’라는 말을 보고 목사님 인줄 몰랐다”는 말에 웃음을 지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은 잘 안 쓰는 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새옹지마” 변방에 사는 노인의 이야기로, 기르던 말이 도망쳐 집을 나가자 안타까운 마음으로 위로의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슨 복이 될지 어찌 알겠소?”라고 대답했다. 몇 달이 지난 후 집을 나간 말이 좋은 준마를 하나 데리고 다시 들어왔다. 사람들은 축하를 하며 기뻐했지만 노인은 “그것이 무슨 화가 될는지 어찌 알겠소?” 자중했다. 집에 좋은 말이 생기자 말 타기를 좋아하던 노인의 아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 다리가 부러졌고 사람들은 안됐다며 이를 위로했다. 그러나 노인은 “이것이 혹시 복이 될는지 누가 알겠소?” 대답했고, 그 말은 얼마 후 나라에 전쟁이 생겨 장정들이 모두 싸움터로 나가 열에 아홉은 죽었지만 노인의 아들은 장애의 이유로 살아남았을 때 이해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내게는 10여 년을 머나먼 곳에서 타향살이를 하던 시간에 현실에 닥친 막막한 어려움이 조금
신조어(新造語) 중에 노노족이란 말이 있다. 영어 ‘No(노)’와 늙을 ‘노(老)’를 합성해서 만든 말로 ‘늙지 않는 노인’ 또는 ‘늙었지만 젊게 사는 노인’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야말로 노노족일 것이다. 갈렙은 85세 노인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할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요청한 것이 있다. 바로 여호와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헤브론 지역을 정복하겠다고 구하였다. 헤브론은 어떤 곳인가? 산간 지대였고, 성읍은 크고 견고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히 두려워했던 거대하고 힘센 거인족 아낙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갈렙은 이 곳을 달라고 하면서 여호수아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여전히 강건하니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수14:11, 12) 했다. 여기서 그 때는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40세 시절이었고, 지금은 85세 노인으로 헤브론을 정복하겠다는 것이다. 갈렙은 늙었지만 젊고 위대하게 산 노노족의 한 모델이다. 어떤 조간신문에선 영국 임패리얼 칼리지 연구팀에서 연구한 내용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5) 거룩한 삶은 말씀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그리고 기도만으로도 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삶은 말씀과 기도가 서로 병행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하는 절대적인 필요성이 뒷받침될 때 비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반드시 살아야 하는구나! 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큰일 나는구나!”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산다는 것이 저의 의지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에 기도하게 됐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할 내용이 너무나 많았기에 기도의 시간 또한 저절로 길어지게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즉,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혈을 다하며 사투를 벌인 기도가 있었기에 십자가의 모든 고난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기존에 함께 계시던 성령님만으로는 안 됐던 것입니다. 기도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지
카너는 양자를 칭의와 동의어이자 중생과도 동의어라고 말했다. 이 점은 양자를 중생과 함께 본 멀린스의 견해보다 더 구체적인 접근이다. 양자가 칭의와 동의어라는 말은 칭의와 같이 양자를 법률적인 용어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칭의는 죄인의 형벌에 대한 법률적인 제거라면, 양자는 하나님의 아들 관계에 서 있는 새로운 위치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양자가 법률적인 용어로써 아들 관계의 측면에 속한다면, 중생은 경험적이고 생물학적인 용어에 속한 것이었다. 그래서 카너는 바울이 법률적인 용어에 속하는 칭의와 양자를 법률존중주의적인 거래(a legalistic transaction)로 증언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법률존중주의적인 거래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지속적인 생활을 하는 것과 분리시키는 조치라는 뜻이다. 이는 카너가 중생과 양자의 관계를 단순히 법률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체험적 측면에서 설명하기를 원한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무디는 양자에 대해서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직신학자들은 중생과 칭의와 양자 그리고 성화의 관계를 이렇게 다양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Ⅳ. 중생관 전개 구조와 방식 중생관 전개 구조와 방식은 다른 구원의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유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유일하다’ 혹은 ‘독생하다’라는 형용사를 사용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되심 특히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되심을 부각시킨다. 요한은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에서 이 특별한 단어를 두 번이나 사용한다(3:16, 18). 요한은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를 통하여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면서 독생자를 통한 하나님의 활동의 두 가지 성격 곧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을 설명한다. 요한복음 3:16~21의 표현이 삼인칭 강화의 형태로 된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에 있어서 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에 관한 요한의 신학적 입장을 나타낸다. 먼저 요한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독생하다’는 형용사는 로고스 찬미가에서 화육하신 로고스를 표현하기 위하여 이미 사용됐다(1:14, 18). ‘독생자’는 하나님과 유일한 관계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특별한 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세상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시인을 포함한 여러 ‘무당’ 류의 예술가들에게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는 식의 종신 호칭은 허락되지 않는다. 시인은 그가 시인인 순간만 시인이다.” 이성복 저(著)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문학동네, 3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시인 황동규는 2007년 7월 ‘월간조선’ 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를 아는 사람들이 ‘꽃의 고요’가 최고라고 하더군요. 저는 아니라고 했어요. 다음에 나올 시집이 최고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쓴 시는 관심이 없어요, 앞으로 쓸 시가 문제지.”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피터 드러커도 자신의 최고의 저서는 지금 쓰고 있는 책이요, 앞으로 쓸 책이라고 했습니다. 과거 그가 퓰리처상을 받았더라도, 그의 가치는 그가 가장 마지막에 쓴 기사가 말합니다. 안주와 나태를 경계하는 말입니다. 끊임없는 변화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는 ‘진정한 여행’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러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
낮은 골짜기에는 이슬이 많이 내리지만 높은 산꼭대기에는 바람이 심해서 이슬이 내리지 못합니다. 은혜도 겸손한 심령에 내려집니다. 그러므로 자리는 높아지기를 힘쓸지라도 자세는 낮아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아름답게 보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아프리카로 의료선교를 갔던 리빙스턴의 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토인들은 참을성이 많아서 큰 수술을 할 때 아파하지 않고 태연하게 옆 사람과 애기한다. 그들은 어른은 절대 울면 안 된다고 여긴다. 아픔은 잘 먹고 잘 입는 사람이 더 못 참는 것 같다. 그처럼 참을성이 많고 눈물을 안 흘리는데 나(선교사)는 신기한 일을 목격했다. 내가 예수님의 피의 복음을 전하자 그들은 엉엉 울며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 눈물이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했겠습니까? 겸손한 회개의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최상의 무기입니다. 그래서 복을 받는데도 겸손이 필요하지만 복을 유지 하는데도 겸손이 필요합니다. 복을 받아도 계속 겸손하면 복이 계속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