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옳은 말이긴 하다만 그래도 아직은 이런 구절까지 와 닿을 나이는 아닌데, 왠지 요즘은 사무엘상 7장 12절이 참 와 닿는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Thus far has the LORD helped us.)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여기까지 하나님 날 도우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난 없었을 거라는 고백. 생각해보면 너무나 정직한 고백이다. 아마도 이는 일주일 전, 어느 권사님 칠순예배 말씀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궐동굴다리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내가 사는 오산시에는 남북을 가로지르며 동서로 지역을 두 쪽 내는 경부선 철길이 있다. 그래서 오산의 동(東)과 서(西)는 고가도로나 굴다리 형태로만 소통되는데, 궐동굴다리도 그 중 하나다. 사실 폭은 얼마 안 된다. 해봐야 3차선 도로에 작은 인도 하나 있으니 뭐 20미터나 채 될까? 경부선의 총 길이 445km에 비하면 1/22,500밖에 안되는, 극히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하지만 그 굴다리는 절대로 무시되면 안 된다. 정말이지 만의 하나라도 그것이 부실해지거나 무너지면, 대한민국 국가기간망에는 상상하기조차도 끔찍한
헤럴드 브리슨(Harold T. Bryson) 박사는 “성경에 충실한 설교는 기본적으로 충실한 본문 주해에서 시작돼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세대와 모든 장소에서 모든 사람에게 연결돼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자는 본문과 현시대의 청중의 순전한 만남을 주선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본문과 청중 간에 어떻게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적용(application)이다. 그렇다면 적용은 무엇인가? 설교에서 적용은 라틴어의 두 개의 단어가 합성된 것이다. ap는 ‘to’이고 plico는 ‘to knit’(뜨개질하다)라는 뜻이다. 적용은 성경본문과 청중을 연결하는 것이다.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교 설교대학원 학장인 데이빗 알렌(David Allen)은 “훌륭한 설교는 실제적으로 적용된 강해설교”라고 강조한다.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 박사는 적용이야말로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힘으로 설교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강조한다. 설교는 단순히 본문 주해에서 끝나면 안 되고 청중에게 적용이 되어야 설교 본연의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적용을 잘할 수 있는가? 마치 설교자가 본문을 이해하듯 청중을 알아야 한다. 장두
부족하지만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도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났지 않느냐?”는 어느 분의 질문을 받으며, 주님의 마음이라고 믿고 진도에 내려와 목회를 위해 기도하던 시간을 회상해 본다. 몇 년 전 생각하기조차 힘든 시간을 몸소 겪은 진도 땅, 그것도 수많은 눈물과 통곡으로 얼룩진 팽목항에서 몇 분 거리에 교회가 있는 마을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하신 말씀이 가슴을 울렸다. 그리고 마을의 노년의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지 못한 마음이 느껴졌다. 민속공연을 광고하는 홍보지에 “굿 보러 오세요.” 공공연하게 적어 놓고,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교회에서 굿한다”고 말하는 지역이다. 한국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영적 무지 속에 살아온 지역 주민들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슬퍼진다. 복음을 들고 문화가 전혀 다른 선교지로 달려가는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말은 하지만 전혀 다른 문화와 다른 환경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교요, 선교사가 아니겠는가? 더욱이 고령화 되어가는 한국의 농어촌은 연령적으로는 더 어리고 젊은 타 문화권의 선교지보다 변화도 없고 희망도 없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는 환
이외수란 작가가 거미에 대해서 여러 면으로 칭송하는 글을 썼다. 우리나라 거미들은 독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물지 않으니 온순한 벌레라고 했고, 부화한 새끼를 위해서 자기 살을 뜯어 먹이며 기르는 에어리 염낭 거미를 예를 들면서 모성애가 숭고하다고까지 극찬했다. 특히 그는 거미줄로 지은 거미집에 대해서 ‘그것은 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고 투명한 실로 허공에다 섬세하게 드리워 놓은 한 편의 시이며 노래’라고 표현을 했다. 누구든지 거미가 허공에다 거미줄을 친 것을 보면 놀라고 신기하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거미줄은 견고성이나 영구성 면에선 언제나 형편이 없다. 1995년 6월에 100평 남짓한 예배당을 준공했다. 23년 전 일이지만 그 때 재정난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으며 몇 개월에 걸쳐서 지은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입당을 하고 며칠 지나서 예배당 바깥 한 곳을 보니 왕거미가 거미줄을 쳐놓았다. 얄밉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다. 우리들은 몇 달 동안 온갖 고생을 하며 건축했는데 왕거미는 하룻밤 공사로 우리의 예배당에다 자기의 주거용 사업용 거미줄을 쳐놓았던 것이다. 그 날 왕거미와 거미줄은 당장 없어졌다. 단번에 빗자루로 거미줄을 쓸어버렸고 왕거미는
회복은 무조건 옳다. 하나님의 복음은 망가진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기적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대학 다니는 아들이 최근 한 선교단체에서 개최한 이단관련 특강에 다녀와서 말했다. “아빠, 세상에는 별의 별 이상한 이단들이 많은 것 같아요.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JMS, 구원파….” 어느 덧 다시 학기말이 됐다. 매년 이 시기가 되면 캠퍼스의 CCC, IVF, JOY, SFC 등 기독교 선교단체들이 분주하다. 선교단체 마다에서 개최하는 여름수련회에 많은 학생들을 초청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같은 시기 같은 곳에서 동일하게 분주해지는 것이 이른바 캠퍼스 이단들이다. 이 시기가 되면 구원파는 IYF(IVF가 아님)라는 교묘한 이름으로 각 단과대학 거의 모든 화장실 소변기 위에 여름방학에 학생들이 보람있게 보낼 수 있도록 초청한다. “굿뉴스코해외봉사단”이라는 위장 단체를 내세워서 해외봉사 초청 스티커를 부착하고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다. 신천지는 UNPO(United New University Peace One)이라는 위장 단체를 내세워서 학생들을 유혹한다. 이 단체는 “새로운 문화로 분쟁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멋진 단체명의 의미를 내세우고, 마치 자기들이 U
그렇다면 바람직한 설교는 무엇일까? 좋은 설교는 성경 본문과 오늘날의 청중을 견고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설교이다. 성경 본문이 처음 쓰일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말씀의 의미를 찾고 하나님께서 성경 저자를 통해 의도하신 뜻을 오늘날의 청중에게도 전달해야 한다. 남침례신학대학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는 헤셜 요크(Hershael W. York) 박사는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청중들과 교감을 강조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청중들에게 성경적 정보를 주는 것으로 충분하고 믿는다”라고 비판한다. 이와 같이 편향된 설교 접근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진리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청중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지양되어야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침례교회 설교는 어떠한가? 한국침례교회는 대체적으로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신학노선을 지향했다.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성경본문의 계시를 강조하고 연구하지만 실제로 청중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많지 않은 경향이 있다. 한진환 박사의 설명처럼 “청중을 그저 메시지를 전달받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여길 뿐 그들을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한 변수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 침례교 설교도 본문과 청중 간에 균형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국 사회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화두가 되고 있는 말 중 하나가 4차 산업 혁명(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이다.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AI) 로봇과 사물인터넷, 3D 프린팅 등을 융합하는 기술적 변혁의 움직임이다. 미래학자들은 지금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성년이 되어 사회에 진출할 때는 이들 중에 70%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될 것이고, 10년 이내에 길에서 운행되는 자동차 10대 중 1대는 무인자동차가 될 것으로 예측한다. 이러한 고도의 기술적 변혁은 이미 시작됐고, 사회 각 기관에서는 혁신의 시대를 선도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기독교 연구기관에서도 근래에 이러한 사회 환경의 변화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되고 있다. 그렇다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교회는 과연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설교자는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현대 설교자에게는 ‘해야 할 일’(to do lists)이 많다. 또한 목회환경이 변화하기에 사역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캠벨 몰간(Campbel Morgan)은 “사역자의 최상의 임무는 설교이다. 우리가 범할 수 있는 큰 위험
4) 귀납적 개요 설교 본문 : 요한복음 3:1~15 주제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중생의 길 서론 : 이 땅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성공과 업적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삶의 공허감과 영적인 갈증을 가지고 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는 이러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대변해 준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I. 수많은 성취와 업적들(과학, 부와 재물, 학문, 지위 등등)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여전히 삶의 목마름과 갈증이 있음 - 수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는 인생 - 위대한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 - 본문의 니고데모 이야기 - 그러나 영적인 것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혼란 가운데 있는 인간 - 현실과 물질세계에 갇혀있는 인생 - 영적 진리(거듭남)에 어두운 당대의 지성인 니고데모와 같은 현대인들 II. 알 수 없는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방법을 찾는 인생 - 인간적인 능력(돈, 명예, 권력, 쾌락 등)을 의지하여 끊임없이 추구함 - 소유하면(위에 것들) 소유할수록 영혼의 갈증은 고조 됨 - 한국 정치인들의 말로 - 인기 연예인들의 자살 등등 III. 길과 진리 되시는 주 예수님만이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 줌 - 모든 사람
우리 교회가 매입한 농지에 지하수를 세 곳이나 팠는데 물이 나오지 않아 업자들이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문제는 올해는 그 교회 땅에 교인들이 함께 깻잎농사를 통한 수익사업을 하기로 해 모든 준비를 했는데, 날씨가 너무 뜨거워 지면이 말라버려서 교인들이 깻잎 어린 모를 심는 족족 말라서 비틀어집니다. 고민 하다가 우리 이장 교인 형제님의 트럭을 가지고 와서(저희는 차키를 서로 아무 때나 공유하는 교회입니다.) 800리터짜리 큰 물통을 싣고 바로 옆 교인 하우스에 가서 물을 받아 가져와서, 우리 농사짓는 밭으로 가져와서 일일이 물조리개로 주는, 다시 30~40년 전의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돌아갔습니다. 일일이 10리터짜리 물조리개 두통으로 최소 80m 이상 되는 골을 수도 없이 다니며 일일이 물을 주어 거의 90%이상 살렸습니다. 뜨거운 태양에 생명의 싹이 죽어가는 것을 보니, 견디기 어려워, 8시간동안 점심밥도 못 먹고 시리얼로 대신하며 20kg을 들고,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여러 번씩, 물을 줬더니 집에 들어와 스마트폰 어플에 제가 하루 종일 걸은 양을 보니 8.65km가 찍혔습니다. 그렇게 철야기도회 설교와 기도회 인도를 준비하며 교회당에 왔는데, 다리가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 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1~12) 위의 “이런 일”이란? 구원 받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우상 숭배자들”과 “간음한 자들”과 “주를 시험한 자들”과 그리고 “원망하던 자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멸망을 받은 사건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말세를 만난 우리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기록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깨우치게”란 단어는 개역개정 성경의 단어로서 그전의 성경의 단어와는 좀 차이점이 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 이전의 개역한글 성경에는 “경계”란 단어로 써져 있습니다. 그리고 NIV영어 성경에는 “WARNING”즉 “경고”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깨우치게”란 “깨어있어라, 정신을 차리라”는 말로, 감나무에 올라가서 감을 딸 때는 따는 데만 몰입해서는 안 되고 감나무 가지가 약하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경계”라는 말은 자동차 도로에서 차들이 오고, 갈 때 중간에 경계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계선을 무시하고 차선을 넘어가게 되면 가히 상상하기조차도 힘든 무시무시한 사고를 당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