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쯔는 갈라디아서 3장 8절에 있는 ‘아브라함의 복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해석은 대개 “판타 타 에드네” 표현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이방인’을 의미한다고 한다. 여기서 “타 에드네”는 “이방인들”을 의미하고 “판타 타 에드네”는 “땅의 모든 족속”과 병행되는 “모든 민족”으로 해석돼야 한다. 사도 바울의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축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구약을 초월하고 있고 사도 바울 시대의 유대교를 벗어난 우리들은 아브라함으로 인해 모든 민족에게 확실하게 축복이 주어짐을 잘 알고 있다.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하심으로 인한 축복을 확인할 때,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도 이런 맥락에서 그 사실을 이해했다고 결론지었다. 즉 아브라함은 사실상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복음을 알고 있었다. 갈라디아서 3장 6~14절에서 바울은 한 번에 율법과 선지자를 5번이나 인용하면서 독점적으로 성경을 다뤘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으리라고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똑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아브라
“다방이다” 한글학교 학생들이 진도에서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한글백일장에 가는 차 안에서 한 분이 길가에 보이는 간판을 한 글자 한 글자 읽다가 소리치는 소리다. 늦게 글자를 배워 버스를 탈 때도 글자를 읽을 수 있어 좋고, 은행에 가도 내 이름을 내가 쓸 수 있어 좋다고 하시는 늦깎이 학생들이 일 년에 한 번씩 진도에 있는 모든 한글학교 학생들이 모여 백일장을 펼치러 가는 자리다. 설레면서도 떨려 못 간다고 하시더니 막상 당일 아침에 머리에 염색도 하고 꼬까옷도 입고 나오셨다. 교회 승합차에 가득 모시고 소풍 가는 마음으로 달려가다가 창 밖에 보이는 글자들을 하나하나 읽다가 “다방”이라고 써진 글씨를 읽다가 흥분해서 소리치며 기뻐한 것이다. “다방, 저것이 다방이었네. 이제야 저곳이 뭐 하는 곳인지 알겠구먼.”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글자를 가르친다고 힘쓰던 보람을 느낀다. 이제는 문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학생으로 인정받게 된다. 전국적으로 여러 곳이 이미 실행하고 있지만, 진도도 내년부터 3년의 과정을 지나면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졸업장이 먼 소용이여?” “이제 그런 거 받아서 머에 써 먹을라고?”하시던 분들이다. 그도 그럴 것
바울 사도는 자기를 사랑한 교회와 성도들에게 자기가 담대하게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부탁을 하고 있습니다(엡6:19~20, 골4:3~4). 나도 동일하게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병원에서 환자들에게 사망선고를 내릴 때 세 가지를 확인하는데 심장사, 호흡사, 뇌사가입니다. 이 세 가지 기능이 멎으면 죽었다고 판정을 내립니다. 심장이 뛰지 않고 호흡을 하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듯이 영적 호흡과 맥박인 기도가 멈추면 죽은 교회, 죽은 신앙이 됩니다. 지난 두 주간 동안 가산디지털 지역에 있는 가산중앙교회와 죽전에 있는 지구촌교회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두 교회 다 찬양과 기도가 살아있고 매우 강력한 교회였습니다. 공통점이 있었는데 두 교회 목사님들이 모두 신실하고 순수한 복음의 열정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두 교회의 성도들 또한 말씀을 사모하는 열심과 설교를 들은 다음에 뜨겁게 간절히 기도하는 영적인 갈망이 무척 높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집회를 인도하는 내내 나도 매우 행복했고 주의 성령께서 시간 시간마다 강력하게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은혜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요즘 많은 교인들이 세련된 순서와 프로그램을 즐기고 잘 준비된
나의 목회의 개척 떄의 모습을 보면, 잊을 수가 없는 가슴시린 시절의 모습, 3층 상가에서 매일 새벽과 밤에 강단 십자가 밑에서 창대한 목양의 꿈을 꾸면서 눈물의 기도를 주님께 드렸다. ‘ 주여! 꿈같은 목회의 길을 열어 주옵소서!’ 아파트 입구에서 어린이 전도를 하며 부흥하는 교육부를 그리면서 기도하며 전도했다. 눈물로 교회부흥을 그리며 기도하여 조그만 3층 상가에 예배당을 꿈같이 채워서 예배를 드렸다. 3층 상가건물에서 부르짖는 기도소리에 “시끄럽다”는 소리를 듣고 성전건축의 꿈을 키우며 기도하여 마침내, 그림과 같은 아담하고 조그만 성전을 건축하여 주님께 영광의 예배를 드렸다. 그 아담한 예배당에 성도들이 가득 찼다. 이제는 더 넓은 곳을 성전 터로 기도한지 몇 년 후에 더 광활한 꿈의 성전을 그리며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성전건축 도중 붕괴사고가 생겨 말할 수 없는 큰 시련 속에서 “회복의 그날”을 그리며 매일매일 눈물로 기도를 하였다. “이제는 이 불안전한 성전으로는 주님 앞에 영광 돌릴 수 없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전기화재가 계속 발생하고, 벽체가 금이 가는 불안전한 속에, 주여! 기적의 그날을 주옵소서!” 결국은 주변의
필자는 지금까지 바울서신들을 토대로 사도 바울의 기독론적 교훈들을 살펴봤다. 이제는 요한복음을 토대로 사도 요한의 기독론적 교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 요한은 사도 바울 못지않게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한 선명하고도 깊이 있는 많은 교훈들을 전달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에 관한 그의 복음서를 저술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존재성 곧 신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요한복음서를 저술했다. 그런 면에서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에 비해 여러 가지 점들에서 다른 국면들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요한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국면은 바로 기독론적 국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록 표면적으로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의 존재로 사시면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셨지만, 동시에 그 분의 근본적인 존재성은 하나님과 동등한 신적인 존재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연합의 관계성 속에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요한은 ‘아버지’와 ‘아들’이란 가족 관계의 용어들을 계속적으로 수없이 많이 사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분명하게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청년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평소의 주장과 이 시대 보다 절실해진 젊은이 사역의 가치를 일깨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기대어 용기를 내어 본다. 필자는 1992년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학년 때부터 2017년 현재까지 약 25년 동안 전국의 여러 지역교회와 대학캠퍼스에서 젊은 영혼들을 줄곧 섬겨왔다. 교육전도사로 처음 부임한 청주의 작은 교회 담임 목사님은 내가 대학시절 캠퍼스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라는 선교단체에서 약 3년 훈련받은 것을 근거로 청년대학부를 맡겼다. 최근 6년은 서울대학교회 담임목사(2012.3~2016.2)와 서울대 캠퍼스 선교사(2016.3~현재)로서 현장에서 젊은 영혼들을 계속 섬겨왔다. 처음의 때는 20대 중반이었고 친구, 또는 형이나 오빠의 마음으로 사역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어느덧 대학생 자녀를 둘이나 둔 가장이 되었을 뿐 아니라, 부모의 마음으로 맡겨주신 젊은 영혼들을 섬기는 입장이 됐다. 그렇다면 50대에 접어든 나는 왜 여전히 젊은이 사역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이 바로 주님이 친히 맡겨주신 개인적 소명의 자리이자 한국 교회가 가장 시급히 회복해야 할 달란트 농
로이드 존스는 신학수업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독서광이었다. 이것이 목회에 힘이 됐고 지혜가 됐으며 방향을 바르게 가르쳐주는 나침반이 됐다. 5. 이동원 이동원은 1945년 12월 해방 이후 수원에서 이방규와 이봉후를 부모로 한 평범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한국의 전통적인 가정처럼 불교와 유교, 샤머니즘이 결합된 종교 배경으로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집안이었지만 반기독교 적이지는 않았다.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기에 조부모뿐 아니라 외증조 할머니에 대한 따뜻한 기억까지 간직할 수 있었고 대가족 속에서 조건 없는 따뜻한 사랑을 경험한다. 그러나 할머니와 어머니의 고부 갈등, 아버지의 중독성 만취현상과 계속되는 직장과 사업 실패로 어린 시절을 고뇌하며 보낸다. 사춘기 시절에는 아버지의 실직과 사업 실패로 어렵게 가정교사를 하며 고등학교를 다니게 된다. 이때 홀로 사색에 잠기면서 점점 더 책 속으로 도피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학교 공부보다 책 읽는 것을 훨씬 더 즐겁게 여기게 된다. 청년시절에는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구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이후 거듭남의 경험을 하게 되면서 전도와 간증의 삶을
하나님의 그 약속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성취됐지만 아직 믿는 자 안에 완성되지는 않았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됐고,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약속이 믿는 자들 안에 적용됐다. 이를 성령의 약속이라 했으니(갈 3:14), 바울은 예수의 흔적이라 했다(갈 6:17).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되는 토대이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들을 성취하기 시작하셨다는 중요한 표지이다. 신약성경에 의해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되고, 말세가 왔으며(고전 10:11), 새 창조가 시작됐고, 영생이 임했고, 새 언약이 현실이 됐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430년 전에 아브라함과 약속의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주장한다(갈 3:15-18). 바울은 유언 또는 언약을 모두 의미할 수 있는 “디아데케”(언약)라는 단어를 다루면서, 사람의 언약도 정한 후에 더하거나 폐할 수 없는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도 후에 생긴 율법에 의해 폐해질 수 없음을 지적한다. 아브라함과 맺은 이 언약도 약속 가
여러 언어 중에서 프랑스어가 우리말에 깊이 침투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1970년대에 윤형주, 김세환, 이장희 등 젊은 통기타 가수들로 구성된 남성그룹 ‘세시봉(C’est si bong)‘은, 알다시피, ‘It’s very good’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이며; 1960년대 말에 결성되어서‘육군 김일병’과 ‘청춘목장’ 등 건전가요를 불렀던 남성 그룹4중창단 ‘불루벨스 봉봉(Bluebells bonbon)’의 ‘봉봉’ 역시 ‘good’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이며; 색채, 의미, 느낌 등의 미묘한 차이를 의미하는 뉘앙스(nuance)와 ‘함께’라는 의미에서 출발해서 남녀 간의 ‘만남’으로 의미가 발전한 ‘아베크(avec)’도 프랑스어이다. ‘사바사바’는 알다시피, 뒷거래를 통해서 은밀히 일을 성취하는 것을 뜻하는 일본어이다. 이 말의 유래를 찾는 중에, 일제 강점기에 관청 일을 보러가는 사람들이 일을 쉽게 하려고 간혹 고등어를 가져가 일본인 관리들에게 선물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요즈음과는 달리 당시에는 고등어가 귀한 생선이었고 특히 일본인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고등어는 ‘고기 魚’ 변에 ‘푸를 靑’을 쓰는 ‘고등어 청(鯖)’ 자로 표시되는 등푸른 생선으로서 일본어
3) Peleh Yo'etz(Wonder of a Counselor, 책사‘모사’의 불가사의‘경이’)라는 호칭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사9:6의 속에는 성령을 암시하는 “Peleh Yo'etz”라는 호칭이 들어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성령은 구약에는 주로 “하나님의 영” 또는 “야웨의 영”으로 표현돼 있고 신약에는 주로 “성령” 또는 “하나님의 영” 또는 단지 “to pneuma”라고 표현돼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성령을 보혜사(Parakleetos)라고 부르신 것이 요한복음에 기록돼 있는데 이 Parakleetos가 영어로는Comforter 또는Counselor라고 번역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사11:2에서는 성령을 “야웨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야웨를 경외하는 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략과 재능의 영”이라는 이 말씀 속의 “모략”은 바로 Etzah(counsel)로서 사9:6의 Yo'etz(couselor)와 함께 yaa'atz(advise, counsel)에서 파생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Peleh Yo'etz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