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 증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확증됐기(롬1:4) 때문에 베드로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셨던 성령을 받은 후로는 이 사실을 산헤드린 앞에서도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선포했던 것이다.(행4:10) 유대인들을 수신자로 기록한 히브리서의 증언은 어떠한가? (필자는 히브리서를 바울의 서신으로 여긴다. 히13:23) 히1:2, 3 :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apaugasma)시요 그 본체(hupostasis=본질=substance)의 형상(karagma=각인=a stamp, impress)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본질”(hupostasis)을 “그대로 새겨 놓은 존재”(karakteer)라고 말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고 말한다. 특별히 바울은히1:8에서 시45:6,7 말씀을 인용해 메시야께서 “하나님”으로 불리
스펄전은 책 읽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책들을 통달하십시오. 그 책들을 철저하게 읽으십시오. 여러분들이 그 책에 몰두될 때까지 그 책 속에 흠뻑 잠기십시오. 그것들을 읽고 또 읽으십시오. 씹어서 소화될 때까지 그 책들이 바로 여러분 자신이 되게 하십시오. 좋은 책을 여러 번 정독하고 그것을 기록하고 분석하십시오. 어떤 학생이 20권의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완전하게 이해함으로 그의 정신적인 구성이 더욱 더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서두르는 독서는 조금 배우고 크게 뽐내는 결과만을 가져오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양의 독서에 치중하다가 묵상하는 것을 멀리하게 됨으로 결국 그의 독서는 무익한 것이 되고 맙니다. 독서에 관한 여러분의 좌우명은 ‘풍부하게, 수적으로는 많지 않게’가 되도록 하십시오. 독서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독서의 중요성과 독서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없이는 강조할 수 없는 말이다. 또한 성경읽기와 성경 연구에 대해서도 그는 뜨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형제 여러분, 성경을 연구하십시오. 얻을 수 있는 도움을 최대한 이용하여 계속해서 성경을 연구하십시오. 오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말한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부활로써 시작된 것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시작됐고 이제 성도들 안에도 부활의 생명이 역사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새로운 가족 공동체가 세워진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 공동체로 세워지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아버지’로 알려지기를 바라신다. 제임스 던은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예수를 죽음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을 덧붙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서술이 합당하다고 한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 악함을 끝낸 후에 재창조주로서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바울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로서 최고의 하나님이라는 더 넓은 개념과는 다르게, 바울은 하나님을 예수와 관련한 그의 행동으로 그리고 죽음에 대해 최후의 승리 안에서 충만함에 이르는 창조에 대한 뜻을 가진 하나님으로서 정확히
그리스신화는 기원전 3000년 경에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서 온 세계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이 되기까지 진화했다. 그러나 그 신화는 종교로서의 가치를 상실해서 오늘날 올림포스의 신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리스신화는 문학과 철학과 회화, 심지어는 성경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교사와 설교자는 신화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은 가져야한다. 그리스신화 속의 세계와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존재들이다. 기원전 8세기에 ‘신들의 계보’를 쓴 헤시오드는 세상은 무한 공간을 의미하는 카오스에서 나왔고 우주 형성기 말기쯤에 땅에는 인간이, 하늘과 땅 사이에는 티탄(Titan)이라는 신족(神族)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티탄 신족 가운데 젊고 힘센 크로노스가 하늘과 땅을 지배하다가 그의 아들 제우스(로마 신화에서는 주피터)에게 폐위 당했다. 왕좌에 오른 제우스는 그동안 아버지에게 유폐되었던 형제들을 불러내어 포세이돈에게는 바다를, 풀푸톤에게는 하데스(음부)를 다스리게 하고, 자신은 신들의 우두머리로서 올림포스 산에서 하늘을 지배했다. 사도행전 14장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
이 구절은 요1:3,10과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이시라는 것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다. “모든 것들”(만물)이라고 그 범위를 못 박아 놓고 있으며, 그분에 “의해서” 그분을 위해서 창조됐다고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특별히 “그분을 통해서”라는 표현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암시하며 요1:3에 상응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장자”라는 표현은 오해 받기 쉽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의 장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육체의 몸을 입으심으로써 피조물의 세계에 참여하셔서 그들의 주인이 되신 것을 의미한다. 고대 근동에서 “장자”는 모든 형제들의 주인이 돼 그들을 다스렸던 것이다. 요셉의 형들이 그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죽이려고까지 했던 것은 이런 전통 때문이었다. (창37:8 :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그런데 “모든 충만함이 그분 안에 거주하기를 기뻐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모든 ”무엇이“ 충만했다는 것인가? 그 해답은 2장 9절에서 찾아 볼 수
일반적으로 가족 모임이 있을 때 서로의 가정의 자녀들에 대한 덕담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가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 가정의 자녀들의 외모를 칭찬하며 관례적으로 하는 말들 중에 “야,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잘 생겼구먼” 하는 농담이 있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의 부모들은 오히려 마음 뿌듯해 하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모두가 다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아주 드물지만 어떤 분들은 이러한 농담을 불쾌해 한다. 심지어 정색하며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면 모임의 분위기가 자못 썰렁해지는 부작용이 따라오곤 한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기 자녀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를 대단히 기뻐하기 마련이다. 자녀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가 그 자녀들을 낳고 키운 부모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사제 간에도 이러한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자신이 가르친 학생이 노래를 잘 불러서 각종 음악콩쿠르의 대상이라도 탄다면 스승은 누구보다도 이를 기뻐하는 것이 상식이다. 물론 간혹 이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못난 스승들도 있긴 하다. 제자가 너무 잘 해서 혹시 자신의 영역이나 자리까지 넘보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과 두려움으로 인해 제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에 있어서 전통주의와 새 관점주의자들의 관점의 문제점들을 살피고 그 새로운 대안으로써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관점에서 구원론을 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고 그 예로 바울서신을 중심으로 살펴봤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시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기에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관점에서 갈라디아서가 말하고 있는 구원론을 갈라디아서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이로써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론을 넓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Ⅲ.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신론적 측면의 구원 신약성경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관점은 구약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유대교의 가장 근본적인 믿음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바울은 어려서부터 쉐마를 고백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 이 구절은 유대 사상의 토대였는데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구약성경에 놓인 기초 위에 건축했
퇴직한 후에 몇 타 교단 신학교로부터 강의 요청을 받았다. 그 중 어떤 곳에서는 필자가 연구하거나 가르친 분야가 아닌 사도행전과 요한복음, 교회사, 설교학 등을 요청해서 나는 교재를 찾고 교안도 새로 만들어야 했다. 나는 서점은 물론, 도서관과 장서(藏書)를 가진 친구의 서재에 까지 가서 관련 분야의 책을 섭렵했다. 필자가 검토한 책 중에는 제목과 장정은 그럴듯한데 문장에 대한 기초지식도 없고 심지어 주(註)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여기저기서 따온 글을 짜깁기 한 책도 있었고, 방대한 분량의 책에 색인(索引)을 달지 않아서 저술로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내용면에서는, 어떤 책은 내용은 말 할 수 없이 좋았으나 너무 이론적이어서 교재로는 적합하지 못했고, 어떤 책은 분량이 많아 감당할 수 없었고, 또 어떤 책은 저자의 교리적 신학적 편견이 심해서 어떤 이론이나 인물을 지나치게 선양하거나 배척하는 등 편협한 견해를 드러낸 것들도 있었다. 좋은 책이 많았지만 교재로 쓸 만한 것을 찾기가 어려웠다. 심사숙고 끝에 선택한 일부 교재는 다음과 같다. 사도행전 교재로는 평택대학교 피어슨연구소가 펴낸 피어슨 박사(Arthur T. Pierson)의 ‘신
웨슬리는 그 바쁜 시간 속에서도 책 읽을 시간을 스스로 만들었다. 환경과 여건을 뛰어넘어 책 읽기를 감당했다. 의지적으로 책 읽기에 마음을 모았다. 분명한 것은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꿨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더욱 분명한 것은 성공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책 읽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더더욱 분명한 것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전형적인 책벌레들이었으며, 하루하루 모든 일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웨슬리는 대학생활에서 400여 권의 책을 읽었으며, 그렇게도 분주한 전도자의 생활 중에도 일생 동안 1000여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그는 한마디로 독서광이었으며, 책벌레였다. 목회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책을 읽는 것이 목회자들에겐 생활이 돼야 한다. 아무리 해야 할 일이 많아도 책 읽는 시간만큼은 확보해야 한다. 사람이 책을 많이 읽어서 좋은 지식을 소유하면 그것이 눈빛으로 비치고 얼굴에 나타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목회에서도 빛을 발휘할 수 있고, 목회의 열매로 드러나기도 한다. 웨슬리는 아주 부지런한 독서가였다.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는데 보통 많이 읽은 것이 아니라 책에 빠져 있었다고 할 정도로 많
하나님은 교회를 향한 모든 계획은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시고(1:4), 우주가 아들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고(1:10),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피로 죄 사함과 구속과 은혜를 받고(1:7)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화목을 이루게 됐다(2:16). 성자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속’과 ‘죄사함’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제시된다. ‘구속’의 개념은 애굽의 통치 아래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된 출애굽 사건을 통해 예표했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성취됐다. 이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복종한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였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그 은혜는 새 삶이 시작된다는 약속과 함께 주어졌다. 이에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8)라고 말한다. 에베소서에는 모든 것 위에 뛰어난 그리스도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묘사하는 이른바 우주적 기독론이 서신 전반에 걸쳐 강조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모든 정사와 권세 위에 뛰어나신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