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한국교회가 남북한 통일운동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잘못이 있다면 반성하고 회개해야 하며, 좋은 점은 계승해야 한다. 그럼 한국교회가 정부의 통일정책에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 살펴보자.첫째, 해방이후부터 50년대까지는 이승만 정권의 제 1공화국 시대에 해당된다. 이 시기 정부의 북한을 향한 공식정책으로 ‘북진통일론’이 있었다. 이 시기 정부의 통일정책에 대해 한국기독교는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김창준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좌파가 있었고,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선을 따르는 중도파가 있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우파였던 대부분의 한국교회 노선이다.둘째, 60년대 통일논의는 남북 교류협상론 등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좌파는 한국 전쟁으로 남한의 기독교에 신뢰를 주지 못했고, 우파로 단순화된 한국교회는 신학적 성향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극단적 ‘반공’에 의해 그 정체성이 규정됐다. 이 시기 한국교회 대다수의 흐름은 여전히 반공노선을 견지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60년대 새로웠던 것은, 강원용, 박성중, 박형중, 문익환 목사 등에 의해 공산주의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의 방식으로서 교회 내부의 혁신과 사회내부의 개혁이 강조되었다는
나는 27살에 자격도 안 됐는데 성일교회(현 임마누엘교회)의 집사로 직분을 받았다. 부족하지만 그냥 순종했는데 하나님께서 서울에서 내려온 한 선교단체의 책임자를 내가 섬기던 교회로 보내 주셔서 말씀 훈련을 잘 받고 직분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게 해주셨다. 바쁜 가운데서도 주일학교 교사, 중고등부 교사, 청년지도교사, 여선교회장까지 맡겨주시는 데로 순종하고 고산면에서 전주까지 수요예배와 금요 철야기도회까지 참석했는데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기는 것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던 것 같다. 나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일을 맡기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마25:21).남장로교 선교 병원인 전주 예수병원이 침례교인인 내게 참 많은 신뢰와 혜택을 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6년 반 동안 그 병원에서 일했는데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홍콩, 일본, 미국의 농촌 보건의료 사업을 견학할 기회를 줬고 스리랑카와 페낭에서 개최된 아시아 태평양 농어촌 보건의료를 위해 일하는 의료인 회의에 참석할 기회를 제공해 줬다. 나는 간호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천직이라고 생각했기에 죽을 때까지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내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려고 노력했다.그러나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2013년 말을 기준으로 한국 선교사의 파송 현황을 조사해 최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 선교사 2만5천여 명이 169개국에서 활약하고 있다.2012년 2만 4,742명으로 매년 1천 명 이상씩 증가하는 추세다. 함께 거주하는 선교사 자녀 수도 지난해 1만 7,618명으로 크게 늘었다. 대륙별로는 동북아시아 6,360명, 동남아시아 5,9명, 북미 3,149명이다.이들의 주요 사역은 교회 개척(10,693명), 제자 훈련(8,612명), 캠퍼스 사역(2,499명), 교육(1,361명) 복지 및 개발(819명), 의료(515명) 등이다.우리 침례교단은 타 교단이 부러워할 만큼 지역을 선택하고 집중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연합해 선교하고 있다. 지난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여의도교회 한기만 목사님은 그동안 수십억 원을 투자하며 해외선교회를 이끌어 오면서 일관된 정책을 펼쳐 오늘날 700여명의 침례교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는 일에 쓰임 받다가 영원한 나라로 상급을 받으려 떠나셨다. 선교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이다. 이 명령에 순종하여 130여년 전 서양의 선교사님들이 수많은 순교의 피를 이 땅에 뿌렸
같은 재능을 가졌지만 그 쓰임은 다르다는 것. 다 같은 기술을 가졌으나 그 기술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칼로 요리를 할 수 있건만 흉측스럽게도 그 칼로 범죄도 저지를 수 있지 않는가.달마도(達磨圖)의 대가로 꼽히는 법주스님이 있다. 그가 선묵화 40년을 돌아보는 고희전을 2013년 10월 16-22일 서울 인사동 한국 미술관에서 갖는다. 그는 홍익대 미대 서양학과 4학년 때 대학생불교연합회의 해인사 여름 수양회에 참가했다가 발심하여 출가해서 스님생활을 하게 되었고 주로 달마도를 그려재켰다. 용화사와 해인사 등에서 참선에 몰두하던 법주스님은 “내가 가진 특기를 살려보자”고 작심해서 달마도를 그려왔다. 그는 미술 특기를 그렇게 달마도 그리는데에 썼다.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누구나 다 알겠지만 그의 스승인 보톨도 지오바니라는 사실은 아마도 잘 모를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14살 때 지오바니의 제자가 되고자 방문했을 때 선생은 그를 데리고 술집 앞에 있는 조각상을 보여주고 그 다음엔 교회당으로 인도해서 교회의 조각상을 보여 준 뒤 네 기술과 재능을 무엇을 위해 쓰기를 원하느냐 질문을 던졌을 때 미켈란젤로는 주님을 위해 사용하겠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 34:4,6)헌트(Hunt)목사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그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레이 증후군이 발생했던 것이다. 레이 증후군이란 소아에게 흔히 있는 치사적인 뇌장애를 말한다. 그런데 그가 교회에서 가르친 로라 양도 이 병에 걸렸고 이미 11명에게 발병해서 9명의 어린이가 죽었다는 것이다. 로라 어린이도 지난 여름성경학교 때부터 교회에 출석했다. 이때는 로라가 병에 걸리기 6주전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다. 예수를 믿은 로라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기도밖엔 별도리가 없었다. 로라가 속한 교회학교 어린이와 헌트 목사님은 로라가 빨리 일어나 주님의 복음증거를 위해 살아나도록 간구했다. 금요일에는 로라의 병세가 호전되었고 토요일에는 눈을 떠서 병실에 있는 아버지를 알아보았다. 살아난 로라 어린이는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어요!”라고 기뻐했다. 두 주일 후 로라의 전 가족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다. 1974년 4월 3일 지방신문 1면에 “기도가 살렸다!”는 대서특필의 제목으로 상세한 내용이
설문 결과를 보면 고령층·저학력층 일수록 한 민족이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의견이 다수였고, 저연령층·고학력층일수록 안보불안 해소 이유로 필요하다는 의견이 다수였음을 알 수 있다. 넷째, 북한의 군사적 도발 가능성에 대해서는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74.5%로 다수이며, 우리나라 군사안보 상황에 대해서는 위험하다는 의견이 71.8%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의 분단 현실은 반드시 극복돼야 하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은 반드시 성취돼야 한다는 당위론이 출발점이다. 왜냐하면 남북통일은 민족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여론조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통일의 열망과 관심이 고조되어 있는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가 민족의 화해와 남북통일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성경에서 남북통일의 원리를 찾아내고 이를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은 그동안 통일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연구되어 왔으나, 통일신학은 사회과학적 분석에 치우친 진보주의자들의 전유물로 간주됐다. 이 문제를 정부에 의하여 주도 되고 정권에 의하여 제시되는 남북통일의 방법이나 사회과학적 분석이 아닌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의 관점에서 남북 간의 통일의 문제를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
세 번째 소원은 1982년에 이루어졌다. 그 때는 내가 전주예수병원 지역사회 보건과 수 간호사로 섬기고 있었던 때였다. 전주예수병원은 지역사회보건사업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었다. 독일의 후원으로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 분원을 세우고 5개 면을 대상으로 의료 전달체계 시범사업을 하고 있었다. 보사부 회의에 참석하면 의사들은 농어촌 의료 실태에 대해 많은 비판은 하였지만 정작 자신들은 농어촌에 가서 일하지 않았다. 우리는 마을 부녀부장들을 마을 건강원으로 훈련하여 마을에 응급 환자가 생겼을 때를 대비하여 응급 처치하는 것을 가르치고 응급 처치 세트를 나누어 주었다. 간호사들을 특별훈련을 하여 보건진료소에서 일하게 하고 마을 건강원들이 환자를 발견 시 보건진료소로 보내게 했다. 읍, 면단위에는 보건지소에 군복무 대신 파견된 공중보건의사가 있고 그들 힘으로 안되는 환자는 분원으로 오게 했다. 그 당시 농촌의 환자들은 의료보험과 돈도 없고 농사일이 바빠서 아파도 빨리 병원에 못가고 병을 키우다 정작 병원에 가면 병이 위중한 상태가 되곤 했다.그래서 우리는 병이 생기기전 예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각 마을을 다니며 예방보건교육도 힘썼다. 임신부들을 찾아 산전 진찰을
최근 대 도시에는 주일 날 성경책을 들고 집을 나서면서 ‘오늘은 어느 교회를 가볼까?’하는 교회 쇼핑객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새로운 볼거리를 찾아 여기 저기 맴돌다 대형교회 3층 뒷자리에 멀직이 앉아 예배를 구경하다가 내 삶에 필요를 채워달라는 기도를 간절히 드리고 일어선다. 마음의 허전함을 달래고, 벌 받을까 두려워 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한 교회에 정착하여 훈련받고, 간섭받기는 싫은 이런 교인들을 출애굽 광야를 떠도는 교인 ‘가나안 성도’라 한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해 훈련받기를 거부한다. 교회 출석은 오래 했지만 교회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오염된 영혼을 발견하고, 이로 인한 가슴 깊은 회개의 기도가 일어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성도간의 삶속에서 부딪히는 훈련을 통해 공급받는 곳인 것을 모르는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2050년이 되면 대한민국의 성도 수는 300~400만으로 줄어들고 1.2차 베이비붐 세대 1640만 명이 은퇴하는 2028년이 되면 교회의 헌금은 반 토막이 나서 부도나는 교회가 속출하고 많은 교회들이 통폐합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미 유럽의 교회
그리스도인이 된 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주신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게 하신것과 기도라는 보석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수없이 응답해 주셨는데 물론 믿은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는 그냥 생각만 해도 응답해 주신 것도 많았다.바로 지난 회고록에서 이야기했던 세 가지 소원들 같은 것이었다. 첫 번째 소원이었던 영어로 된 음반을 받은 후 빌리 그래함을 만나고 싶다고 한 두 번째 소원은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침례 병원 특진실에서 근무하던 1973년에 이루어졌다.빌리 그래함 한국 전도대회는 1973년 5월 30일에서 6월 3일까지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는데 그 대회전에 대 도시 전도 집회가 빌리 그래함 전도팀 목사님들에 의해 개최됐다. 내가 살던 부산에서도 개최됐는데 낮에는 미국 각지에서 온 개인 전도팀들이 개인 전도를 하고 저녁에는 부산 공설 운동장에서 집회를 하였다. 우리는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가 시작되기 전 전도 상담요원 훈련과정을 수료하고 수료증도 받았다.마침 특진실 테이버 선교사 의사께서 안식년 중이라 나는 휴가를 받아 개인 전도팀의 통역으로 낮에는 그 들과 함께 개인 전도를 하러 다녔다. 내가 통역했던 개인 전도자는 캔터키 주에
강소형교회는 성인 80~150명 정도의 성도들이 안정적으로 출석하며,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는 ‘작지만 강한 교회’를 말한다. 교회성장주의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면서, ‘강소형 교회’가 미래 목회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목회 전반에 대한 교회 리빌딩(rebuilding) 작업을 통해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하는 강소형교회 세우기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30년 전, 지하 43평을 얻어 언제 이 지하실을 탈피하나, 언제 밝은 창문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릴까, 언제 이 곰팡이 냄새나는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처갓집 충주를 갈 때마다 시외버스가 산허리를 돌때마다 나타나는 정겨운 시골교회가 그리움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건물에서 목회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울컥 울컥 감사함이 밀려온다. 그러나 교회가 이런 외형적 규모만 갖추었다고 건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비대한 몸집을 건강한 사람이라 할 수 없듯이, 대형화된 교회가 건강한 교회의 모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건강한 교회란 “신앙과 삶이 유리되지 않는 복음의 확신,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공동체성, 체계적이고 실제적인 양육, 평신도들의 은사 활용 사역,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