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찬송가-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서책을 의미하는 글자 ‘책(冊)’은 서가에 꽂혀있는 책의 모양이고, ‘전(典)’은 상이나 문갑 위에 놓여 있는 책의 모양이다. 이 두 글자는 획이 단순하면서도 어딘가 품위가 있어 보인다. 옛사람들은 책을 접거나 던지지 않고 상이나 문갑 위에 단정하게 놓았고, 내용 여하 간에 집안에 있는 책은 가보(家寶)나 경전(經典)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그런데 사회가 다변화 되어 읽을 것과 볼 것이 많아지면서 책을 소중하게 여기던 마음이 사라져버린 것 같다. 신자들은 성경을 가지지 않고 교회에 가며, 성경 없이 성경을 통독하고, 성경 없이 성경공부를 한다. 영상과 CD가 성경을 대신해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아이들을 교과서 없이 학교에 보내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다윗은, “복 있는 사람은…여호와의 율법을…주야로 묵상”한다고 했는데(시1:1~2), 성경 없이 어떻게 성경을 주야로 묵상 하겠는가. 교회는 어떤 환경에서도 신자의 손에서 성경이 멀어지게 해서는 안 되며 성경을 상고(尙古) 하고 상고(詳考) 하도록 가르쳐야 하겠다. 성경과 찬송가를 합본하는 데 대하여 근래에는 성경과 찬송가를 합본해서 지퍼를 다는 것이
벌써 3년이나 된 일, 그렇다고 기일(忌日)도 아닌 난데없는 날에 왜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그렇게 목이 메었는지 모르겠다. 폭포 같은 눈물도 눈물이거니와 주체할 수 없는 괴로움에 왜 그리 고통스러웠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내 속에 그렇게 깊은 쓴 뿌리와 결핍과 거절과 학대에 대한 눌림과 상처가 있었던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그 모든 것들이 실제 가래 뱉는 것으로도 다 쏟아져 나오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는 요즘 아내와 함께 목회자 훈련을 받는 교육 장소에서 일어난 일인데, 다른 목회자들도 많이 있는 그곳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이 다 큰 어른이, 체면도 생각해야 할 중형교회 목사가 그냥 마냥 울어 젖혀 버린 것이다. 다른 분들이 뭐라 하든 말든. 왜 그랬을까? 왜 나는 그날 나의 이성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북받쳤을까? 이는 ‘아버지’에 대한 강의를 듣던 중 순간 내 안에 일어난 몇 가지 감정적 역동 때문이었는데, 첫째는 아버지로부터 나와 우리 가족이 받았던 ‘부재의 학대’(Absent Abuse)가 준 고통들이 순간 확 밀려와서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아버지는 폭력을 가하는 등의 가학적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를 가장 필요로
자유교회(Free Church)는 국가교회(혹은 시교회)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교회가 국가교회가 된 시발점은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313년에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신교의 자유를 허락하면서부터였다. 이는 한편에서는 기독교회나 복음이 로마제국을 정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기독교회가 세속권력과 결탁하여 타락(Fall of the Church)의 첫걸음을 내디딘 사건이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가 국가권력과 바람이 난 것이다. 군사적 정치적 통일을 이룬 콘스탄틴 황제는 아직도 로마제국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당시 급성장하고 있던 기독교 세력에게 손을 뻗쳐 자신의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교회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를 “콘스탄틴의 공생”(共生, Constantine Symbiosis)라고 부른다. 국가가 교회와 공생을 하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어떤 이들은 “국가와 교회의 결혼”(結婚, Marriage)라고도 하고 “국가와 교회의 합금”(合金, Amalgamation)이라고도
오늘도 잠이 쉬 들지 않는다. 몇 번을 뒤척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의 자리로 갔다. 주님께서 무엇인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찾아 무릎을 꿇었는데 갑자기 어두움이 짓누른다. 한밤중이지만 조용히 기도할 수 없어 소리를 높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어둠의 악한 영을 향해 선포하며 예수의 보혈의 능력이 충만하도록 간구한다. 벌써 모기들이 출현했다. 무더위가 시작되는 지난해 오월. 한국에 귀국해 산청 산골에 있는 누님 사업체에서 일할 때였다. 마치 지어낸 이야기처럼 한밤중 1시나 2시가 되면 모기로 인해 잠에서 깨어나 네 마리씩 잡아야 했다. 몇 날을 연이어 똑같이 네 마리 어느 날은 세 마리를 잡아야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같은 시간에 같은 모기의 숫자를 생각하다 두려운 마음과 놀라운 생각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기도와 말씀을 묵상하고 곧바로 일을 시작해야 하지만 밤사이에 치러야 하는 행사를 거를 수가 없게 하셨다. 그러는 사이 기도하게 하시는가 보다 싶어 엎드려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기도하던 사무엘의 심정으로 주님의 뜻을 구했다. 발람에게 나귀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민 22:23)은 모기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 지혜와 계시의 성령 6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서 지혜와 계시의 성령의 활동의 내용을 알아보고 있다(엡 1:17~23). 지난 호에는 에베소서 1:19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성령의 역할 중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하신다는 내용을 ‘힘’과 ‘위력’과 ‘역사하심’이란 단어들을 추가하여 제시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도록 공급하시는 ‘힘’(실행력)과 그리스도인들의 사역에서 병을 고치며 귀신들을 쫓아내는 ‘위력’과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에서 실제적으로 능력의 일하시는 ‘역사하심’을 통해 나타난다. 바울은 이렇게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단어들의 삼중의 결합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힘과 위력과 역사하심을 통해 강력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표현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실제로 어떻게 역사해 오셨는가를 제시한다(엡 1:20~23). 먼저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를 통해 결정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1.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1) 아담은 그 때 당시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의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생명과 영생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2) 아담 앞에 몇 가지 길이 있었습니까? 순종과 불순종, 겸손과 교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사는 길과 자신이 주인으로 사는 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과 마귀를 기쁘게 하는 길, 사는 길과 죽는 길 즉, 2길이 있었습니다. (3)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영과 육이 죽었습니까? 예. 먹는 순간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 영은 죽고, 육은 안 죽었다고 얘기 하는데 먹는 순간 영과 육이 함께 죽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차를 타고 가다보면 길옆에 가로수들을 보게 됩니다. 나무를 전정하는 사람이 한 나무의 가지를 톱으로 잘랐다고 해봅시다. 그 잘려 나온 가지가 산 것입니까? 죽은 것입니까? 모양새는 산 것과 똑같이 보일지 모르나 그 잘린 가지는 자름과 동시에 죽은 것입니다. 왜냐면, 생명이 끊어져 있기 때문
그것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고, 성경의 말씀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증명한다. 성경 안에는 역사, 문학, 철학 등이 다 들어 있다. 그 어떤 책도 성경을 넘어설 수 없다. 목회자는 성경을 영혼의 양식으로 여기고 꾸준히 읽는 것이 기본적인 사명임을 알아야 한다.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은 목회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온 땅에 책 기근이라 할 만큼 읽을 책이 없다 해도 여러분 모두가 갖고 있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손에 쥔 목회자는 물맷돌을 손에 쥔 다윗처럼 싸울 태세를 다 갖춘 것입니다. 성경이 곁에 있는데도 길을 우물이 없다고는 어느 누구도 말 못할 것입니다. 성경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도서관입니다. 성경을 철저히 연구한 사람은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책 전체를 다 섭렵한 사람보다 더 훌륭한 학자입니다. 성경을 철저히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포부여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주부가 바늘을 다루거나, 상인이 회계장부를 다루거나, 뱃사공이 배를 다루는 것처럼 능숙하게 성경을 다루어야 합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 각 권의 내용, 역사와 교리와 가르침의 세부적인 내용 등 성경의 모든 것을 알아
그는 갈라디아서 3:1-4:11을 면밀하게 조사함으로써, 바울 사상의 틀이 교리적 체계나 그의 개인적인 종교 체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무엇보다도 바울 사상의 동인은 복음 이야기에 함축된 의미,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속에 교회의 선교가 반영되어 있는 방식을 도출해내려는 바울의 관심이었다고 본다. 헤이스는 그의 책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의 한 단락(갈 3:1~4:11)에 초점을 맞춰 기존의 바울 사상이 ‘이신칭의’(단일 신학원칙)나 종말론(특정 상징적 사고 틀)이었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바울사상의 일관성은 메시야 예수에 관한 이야기에 있다고 한다. 즉 갈라디아서의 바울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의 신학적 성찰은 그 이야기의 의미를 분명하게 제시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한다. 그 이야기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는 오직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갈 1:4)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하여 행동을 취하신 하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에 관한 그 이야기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내용이
7월이 시작됐습니다. 7월은 한 해의 절반이 시작되는 달, 새로운 반년의 시작이니 남다른 각오와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무더위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마음까지 마냥 지칠 수는 없습니다. 얼굴을 바꿀 수는 없지만 표정은 우리가 마음 먹은 대로 변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7월의 꽃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7월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꽃들이 참 많이 핍니다. 접시꽃, 칸나꽃, 분꽃, 나리꽃, 나팔꽃, 백일홍, 백합, 맨드라미, 해바라기, 다알리아, 도라지, 상사화, 백합 등 여러 가지 다양한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우리의 삶에도 다채롭고 풍요롭게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알려진 꽃말들을 소개해 보면 접시꽃은 “열렬한 사랑”, 칸나꽃은 “정열과 쾌활”, 분꽃은 “수줍음”, 나리꽃은 “깨끗한 마음”, 나팔꽃은 “결속 또는 허무한 사랑”이라고 백일홍은 “꿈” 다알리아는 “감사와 영화”, 백도라지는 “영원한 사랑”, 상사화는 “이루지 못할 사랑”, 맨드라미는 “불타는 사랑”, 해바라기는 “숭배”, 백합은 “순결”이란 꽃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골목길을 다니다보면 어떤 집의 담장 위에나 베란다에 멋지게 늘어져 피어나는 우아한 능소화를
-하인리히 불링거의- 이번 주간에는 취리히의 개혁자로서 열 한 명의 자녀들 중 남아 여섯 명을 모두 목사로 길러낸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75) 목사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준 편지를 함께 읽고자 한다. 16세기 당시의 종교개혁자들은 대부분 사제의 결혼을 금한 가톨릭교회의 신부직을 버리고 개종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결혼이 늦고 결혼 기간도 짧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여섯 명의 자녀에 네 명의 고아를 입양해서 열 명의 자녀를 양육했고, 츠빙글리는 9년의 결혼생활 중에 여덟 명의 자녀를 가지는 등 자녀가 많았다. 불링거는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가 18년 동안 목회한 그로뮌스터 교회의 후임 목사로 부임해서 죽기까지 44년 동안 한 교회에서만 목회했다. 불링거 목사는 저술가로서는 ‘스위스 종교개혁사’를 비롯해서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펴냈고, 제네바시의 길롬 파렐과 쟝 칼뱅을 초빙해서 두 도시가 종교개혁에 연합전선을 펴기로 한 “취리히 합의”(Consensus of Zuerich, 1549)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특히 불링거 목사는 목회기간 동안 신앙 문제로 쫓기는 사람들은 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