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66권 가운데서 요나서만큼 영감성을 의심 받은 책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서구 학자들 가운데는 요나서의 물고기 이야기를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 해야 요나서 속에 든 하나님의 진정한 메시지(kerygma)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성경은 창세기 첫 행부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행까지 모든 내용이 직 간접적인 초자연적 역사(役事)로 점철된 책인데 굳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 동안 갇혀 있었다는 사실만은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논리가 이상하다. 성경은 과학적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책이 아니라, 믿음으로 수용하는 책이므로 선택적으로 어떤 부분은 믿고 어떤 부분은 믿을 수 없다고 거부할 수 없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성령 잉태와 부활 승천은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은 물론 성경 전체를 부인하는 것과 같으며. 66권의 책 중에서 한 권이라도 믿지 못하면 전체를 믿지 않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요나는 북왕국 여로보암 2세의 통치기간인 B.C. 800~750년경에 아모스와 동시대에 활약한 예언자이다. 여로보암2세(793~753)는 통치 초기에 앗수르와 시리아의 세력이 위축된 틈을 타
루터(M. Luther,1483-1546)와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1497-1560)은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선봉 주자들이다. 종교개혁은, 천여 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정권을 등에 업고 천하를 호령해 온 로마가톨릭교회와 맞서는 거사인 만큼 조직화 된 지지 세력 형성이 필요한 운동이었다. 16세기 초에는, 알다시피, 스위스 중심의 쯔빙글리(Urlich Zwingli,1484-1531)와 칼뱅(John Calvin,1509-1564)의 개혁교회와 독일에서 시작된 루터와 멜랑히톤의 개혁세력이 양대 산맥을 이뤘다. 종교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헤세 주의 제후 필립(Philip of Hesse)은 개혁 세력 간의 연대를 목적으로 1529년에 루터와 쯔빙글리 진영 간에 “마르부르크 회담”(Marburg Colloquy)을 주선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 회담은 슈바바흐 조항(Articles of Schwabach) 15개 중 마지막 조항인 성만찬에 합의를 보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그 후, 1570년에는 루터파 개혁파 보헤미안형제단이 일치를 위한 노력으로 “센도밀합의”(Consensus of Sendomir)를 발표했으나 역시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21:35~36) 15년 전의 일입니다. 저희 막내 아이가 저희 사택 앞에서 제가 오는 것을 보고 친구랑 너무 좋아서 펄쩍 펄쩍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단지 아빠를 보고 좋아서 라기보다는 그 반가움 안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학교 끝나고 집에 왔는데 엄마가 집에 안 계시고, 그리고 집 열쇠도 없어서 친구랑 고민하고 있다가 건물 구석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오는데 저 멀리서 아빠가 집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답니다. 만약 이 아이들이 오늘날처럼 손에 핸드폰을 들고 다녔다면 하나님께 기도했을까 싶습니다. 더 나아가서 기도응답을 통해서 믿음이 자라 가는데 과학 문명의 발달은 우리에게 많은 편리함을 주지만 하나님을 향하는 우리 마음을 많이 막기도 합니다. 최근에, 일주일에 3번씩 종합병원에서 정기적으로 혈액 투석을 받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릴 때 부모로부터 감염되어 B형 간염 보균자로 지내다가 39세가 되던 해에는 간경화가 발생해 간이식 수술을 받아 지금은 정상적인 몸으로 잘
예수님도 자신의 새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0)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새 계명만 제대로 지킨다면 구약의 십계명은 자연히 지켜지게 될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의 새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십계명을 포괄하는 것이요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십계명은 율법이지만 예수님의 새 계명은 복음이다. 침례교인들은 신약성서적 교회를 추구하며,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신약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다. 침례교인들은 주일학교나 교회학교나 성경공부반을 통한 새신자 양육과 제자훈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의 사람들”인 침례교인들은 성경을 신앙생활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권위로 믿는다. 그래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성경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하고자 애쓴다. 침례교인들은 교회가 제공하는 성경공부 프로그램이나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성경을 배우고 헌신된 제자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2. 구원 침례교인들은 구원은 오직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써 받게 된다고 믿는다. 여기서 “회개”(repentance)란 돌이키는
3. 이론적 배경 역사적으로 갈라디아서는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 교리, 선포 그리고 실행의 기초였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갈라디아서의 문제와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어떤 신학이 지지되며, 어떤 메시지가 선포되고 어떤 삶의 유형이 실행되는지’를 크게 결정한다. 갈라디아서는 종교개혁기간 동안에 중요성이 높아져서 개혁주의 구원론에 기본 토대가 되어 왔다.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사랑했으며 그 안에서 개혁활동의 무기 병기고를 발견했다. 그리고 1538년판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이신칭의’ 교리를 강조했다. 존 칼빈은 갈라디아서의 주석을 1548년에 출판했다. 그는 중요한 문제들에서 루터와 마찬가지로 철저히 종교개혁주의 전통을 따랐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의 비성경적인 신앙에 대항해 ‘이신칭의’를 강조해 기독교 구원론의 정립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종교 개혁주의의 좁은 ‘이신칭의’의 관점에서만 갈라디아서를 해석하게 됨으로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려고 하는 구원론에서 많이 빗나가게 됐다. 칼빈과 그 외의 많은 종교개혁가들도 갈라디아서를 중요시 하였는데 그들의 시각 또한 루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근대의 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이신칭의’를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작년 가을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목회를 시작하며 총회에 참석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총회를 마치고 돌아온 날 메스컴을 통해 어느 광고에서 “바다 곁에 살면 넓은 사람이 된다”라는 대사가 귀에 들어왔다. 총회를 마치고 오는 차 안에서까지 전염되듯 따라 하던 말들이 생각난다. 함께 총회를 다녀오신 분들은 귀에 익숙해져 잊혀지지 않은 말일 것이다. “조용히 하세요”, “할 말만 하세요”, “발언권 없어요” 등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하는 회의에서 진행자나 대의원 모두 할 말은 많고 다 할 수는 없어 실랑이를 벌려야 했던 시간들. 그러나 어렵게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는 것이 더 기쁘고 행복하기에 소리 높이며 싸움하는 것도 정겨웠다. 교단의 총회만이 아니고 곳곳에서 자신의 의견을 들어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큰소리치는 사람이 이기는 듯 조용히 있으면 바보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광고의 대사처럼 넓은 사람이 되고 싶다. 십여 년 동안 바다를 제대로 볼 수 없어 바다 냄새라도 맡아보고 싶어했더니 사면이 바다로 쌓인 바다에 살게 되었다. 바닷가 가까이 사는 특권으로 몇 번 항에 나가면 여지없이 낚싯대를 던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넓은 바다이기
구약성경에는 여전사들에 관한 기록들도 포함되어 있다. 사사기4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가나안왕 야빈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사 겸 여전사 드보라, 적장 시스라를 천막 말뚝으로 처리했던 야엘, 사사기9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자기 형제 70명을 척살하고 스스로 왕이 된 패륜아 아비멜렉을 맷돌로 응징했던 세겜 망대의 여인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사무엘하 20장에 기록된 아벨성의 지혜로운 여인이다. 그 당시 압살롬의 반란이 겨우 진압된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정치화합을 이루어내지 못한 다윗의 실정이 기폭제가 되어 이스라엘에는 내분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의 괴수는 사울왕조를 배출했던 베냐민지파 비그리의 아들 세바였다. 그는 유다지파 우대정책을 빙자하여 왕권회복을 꿈꾸었다. 대체로 권력자들은 거짓말과 선동정치에 능한 사람들이다. 많은 역사들 속에서 히틀러와 같은 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그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방법,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 전략들 중에서도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유언비어선동정치가 가장 잘 먹힌다. 몇 년 전 집권세력을 흔들어 권력을 빼
예수님도 자신의 새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0)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새 계명만 제대로 지킨다면 구약의 십계명은 자연히 지켜지게 될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의 새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십계명을 포괄하는 것이요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십계명은 율법이지만 예수님의 새 계명은 복음이다. 침례교인들은 신약성서적 교회를 추구하며,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신약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다. 침례교인들은 주일학교나 교회학교나 성경공부반을 통한 새신자 양육과 제자훈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의 사람들”인 침례교인들은 성경을 신앙생활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권위로 믿는다. 그래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성경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하고자 애쓴다. 침례교인들은 교회가 제공하는 성경공부 프로그램이나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성경을 배우고 헌신된 제자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2. 구원 침례교인들은 구원은 오직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써 받게 된다고 믿는다. 여기서 “회개”(repentance)란 돌이키는
벌써 20년 전인 1997년 한국 갤럽은 개신교회를 다니다가 다니지 않게 된 사람이 무려 1,000만 명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국민 5명 중 1명은 교회에 다녔다는 말하고 기독교의 구원관에 대해 무엇인지 최소한 들어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2014년도 조사에 의하면 비종교인의 호감 종교로 불교 25%, 천주교 18%, 개신교는 10%에 그치고 있다. 200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 조사 자료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숫자는 1,200만 명이 아닌 861만 명인 것이 확인됐다. 그 후 매년 교단 총회에 보고되는 교인들의 숫자는 해마다 수십만 명씩 줄어드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실제로 한국사회를 돌아보면 기독교가 쇠퇴할 때 불교와 천주교는 오히려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개신교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 미혹되어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또한 국내외 유명한 목사님들 중에 불교나 다른 종교에도 마치 구원이 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구원론에 큰 오류가 있음을 보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제일 좋아하는 말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저는 타고난 필력이 있다거나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천부적인 글재주가 있는 분들을 보면 참으로 부럽기 그지 없습니다. 문학이나 그와 관련된 어떤 재능도 출중하지 못한 제가 날마다 글을 쓰는 것은 국순정 님의 “내가 시를 쓰는 이유”와도 어느 면에서 거의 같습니다. 우선은 글을 쓰면서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내 안에 정제되지 못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마음의 편리들을 하나씩 주워 모아서 작은 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그 안에 담고 싶은 것들을 담아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살며시 담아서 건네는 사랑의 통로와 이어지는 실낱같은 아름다운 끈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헉헉대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마음으로 산길을 오르는 심정으로 한줄씩 글을 옮겨봅니다. 제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썼든지 내 손을 떠난 다음에는 제 것이 아님을 압니다. 마음을 받아 주고 읽으시는 분의 것으로 그의 마음과 영혼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날마다의 글쓰기는 일종의 일기이고 성스런 팡세나 고백록이기도 합니다. 물론 파스칼의 팡세나 어거스틴의 고백록에다 감히 빗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마음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