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도 자신의 새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0)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새 계명만 제대로 지킨다면 구약의 십계명은 자연히 지켜지게 될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의 새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십계명을 포괄하는 것이요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십계명은 율법이지만 예수님의 새 계명은 복음이다. 침례교인들은 신약성서적 교회를 추구하며,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신약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다. 침례교인들은 주일학교나 교회학교나 성경공부반을 통한 새신자 양육과 제자훈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의 사람들”인 침례교인들은 성경을 신앙생활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권위로 믿는다. 그래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성경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하고자 애쓴다. 침례교인들은 교회가 제공하는 성경공부 프로그램이나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성경을 배우고 헌신된 제자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2. 구원 침례교인들은 구원은 오직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써 받게 된다고 믿는다. 여기서 “회개”(repentance)란 돌이키는
벌써 20년 전인 1997년 한국 갤럽은 개신교회를 다니다가 다니지 않게 된 사람이 무려 1,000만 명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국민 5명 중 1명은 교회에 다녔다는 말하고 기독교의 구원관에 대해 무엇인지 최소한 들어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2014년도 조사에 의하면 비종교인의 호감 종교로 불교 25%, 천주교 18%, 개신교는 10%에 그치고 있다. 200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 조사 자료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숫자는 1,200만 명이 아닌 861만 명인 것이 확인됐다. 그 후 매년 교단 총회에 보고되는 교인들의 숫자는 해마다 수십만 명씩 줄어드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실제로 한국사회를 돌아보면 기독교가 쇠퇴할 때 불교와 천주교는 오히려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개신교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 미혹되어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또한 국내외 유명한 목사님들 중에 불교나 다른 종교에도 마치 구원이 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구원론에 큰 오류가 있음을 보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제일 좋아하는 말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저는 타고난 필력이 있다거나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천부적인 글재주가 있는 분들을 보면 참으로 부럽기 그지 없습니다. 문학이나 그와 관련된 어떤 재능도 출중하지 못한 제가 날마다 글을 쓰는 것은 국순정 님의 “내가 시를 쓰는 이유”와도 어느 면에서 거의 같습니다. 우선은 글을 쓰면서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내 안에 정제되지 못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마음의 편리들을 하나씩 주워 모아서 작은 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그 안에 담고 싶은 것들을 담아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살며시 담아서 건네는 사랑의 통로와 이어지는 실낱같은 아름다운 끈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헉헉대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마음으로 산길을 오르는 심정으로 한줄씩 글을 옮겨봅니다. 제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썼든지 내 손을 떠난 다음에는 제 것이 아님을 압니다. 마음을 받아 주고 읽으시는 분의 것으로 그의 마음과 영혼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날마다의 글쓰기는 일종의 일기이고 성스런 팡세나 고백록이기도 합니다. 물론 파스칼의 팡세나 어거스틴의 고백록에다 감히 빗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마음의 자
왜 예언자가 필요했는가?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백성이 한 지역에 정착하고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세겜 모레 상수리나무 숲에 얼마동안 머물다가 벧엘로 갔고, 벧엘에 흉년이 들자 애굽으로 갔다가 다시 헤브론 마므레 상수리나무 수풀로 돌아왔다(창23:19).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너와 네 자손”의 땅으로 약속 받은 가나안은 무주공산이 아니라, 토착민들이 대대로 자기들의 신 바알을 섬기며 살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하셨다. 이주민의 입장에서는 토착민의 종교와 문화를 수용하면 삶이 용이하려니와 정착지의 신을 배격하면 고립과 박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자가 필요했던 것은 백성들이 이방 세계에서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가르치고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예언자의 역할을 위탁하셨다. “그는[아브라함] 선지자라”(창20:7). 또한, 하나님께서는 구변이 부족하다고 변명하는 모세를 꾸짖으시면서 아론
모세오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의 형법은 문자적으로 매우 엄격하다. 그 대표적인 기록 두 곳을 상고해 보았다. 1)출애굽기 21:24~25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 지니라” 2)신명기19:19, 21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개역한글판) 우리나라의 현행 형법은 기능적인 면에서 응보주의(應報主義), 일반예방주의, 특별예방주의로 구분 할 수 있다. 응보주의란 죄질에 따른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것, 일반예방주의는 범죄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것, 특별예방주의는 교화(敎化)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법의 기능에 비추어 볼 때 모세가 광야의 백성들에게 가르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한 출애굽기의 법과 “생명에는 생명으로”라고 한 신명기의 법은 일견 응보형법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명기의 율법 조항에는,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에게 행하지
유난히 칼바람 매서웠던 어느 월요일 이른 아침, 음식 쓰레기를 내다버리러 1층 수거함에를 갔더니 마침 헌옷 수거 차량이 와있었다. 헌옷들과 신발들까지 분리하여 정리하는 기사님의 모습이 능숙하고도 빨랐다. ‘잠깐 쓰레기 버리러 나온 나도 이렇게 추운데 얼마나 추우실까’라는 생각에 한마디를 건넸다. “아저씨 수고 많으십니다.” “아. 예~.” 아저씨는 멈춤없이 그대로 고개를 떨군 채 그렇게만 짧게 답하셨다. “이렇게 운전도 수거도 혼자 다 하시는 거예요?”라고 재차 말을 건넸으나, 여전히 “예~”만 하실 뿐 고개는 들지 않으셨다. “실례지만 이렇게 하루에 얼마나 다니세요?”라고 또 건넸더니, “하루에 아파트 단지로는 4~6군데, 수거함 개수로는 20개 내외 정도 됩니다.”라고만 하신다. “아이고 그럼 너무 힘드시겠어요?”라고 또 건넸더니, 그제야 아저씨는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보고 답하셨다. 약간의 미소와 함께. “힘들긴 해도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바로 그 말, 그 말씀에 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마지못해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감사함으로 오늘도 그 일을 하신다니 그 고백이 내겐 참으로 놀라웠다. 버리는 사람 따로, 줍
기독교에는 통일성(unity)과 함께 다양성(diversity)이 함께 존재한다. 모든 건강한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면서 동시에 이 지상에서는 다양하게 각 교파와 각 교회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는 현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본고에서는 통일성의 가치와 함께 침례교 신앙이 다른 교파 교회들의 신앙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침례교인들이 특별히 강조해서 믿고 있는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필자는 침례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신앙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1. 성경 침례교인들은 구신약(Old Testament and New Testament) 성경 66권을 최종적이며 유일한 권위라고 믿는다. 교리나 전통이나 헌법이나 어떤 탁월한 지도자(개혁가나 신학자나 목회자)의 신학적인 체계가 성경의 권위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침례교인들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조들(Creeds)를 배격하며, 일정한 시대에 일정한 지역에서 한시적으로 유효한 신앙고백들(Confessions)을 만들어서 진술해 왔다. 침례교인들은 “그 책의 사람들”(People of THE BOOK)이다. “그 책” 즉 성경만을 최종적인 권위로 여기며 그 가
특히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역사로 보기 위하여 첫째로, 신론적 측면에서는 창세전의 하나님의 작정과 경륜, 아브라함과의 약속,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 구원의 세 가지 시제를 살펴보고, 둘째로, 기독론적 측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인한 언약의 성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믿음(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살펴보고, 셋째로, 성령론적 측면에서 칭의, 성화, 영화과정에서의 성령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을 살펴보겠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세우신 영원한 작정과 그리스도 안에 세우신 경륜을 따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복(아들들, 상속자, 영광에 참여)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믿음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차별됨이 없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성취되는 약속을 받게 된다. 성령의 약속을 받은 자들은 성령을 따라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됨으로 하나님께서 보증으로 성령을 세우신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이 신자 안에 이루어지고 영생을 거두게 된다. 연구자는 이러한 전체의 내용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구원론으로 본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면서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니는 낭인 신세가 된 다윗은 광야의 아둘람 굴로 은신합니다. 그 소문이 퍼지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모였는데 환난당한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 등 약 400명 가량 됐습니다. 사실 다윗 자신도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을 때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를 의지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가 아둘람이 돼야 합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니까 어떤 사람도 예외없이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지만 특히 교회는 병들고 약하고 고통가운데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 들이 와야 하는 곳인데 오늘날 교회가 그렇지 못함을 봅니다. 기득권층의 편에 서있거나 힘있는 자들의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에돔사람 도엑이 다윗을 보았다고 사울에게 밀고를 했습니다. 도엑은 간신이었는데 사울의 목자장이었습니다. 사울에게 입속의 혀처럼 굴던 도엑이 놉 땅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주고 음식도 주고 골리앗의 칼도 주는 것을 봤다고 한 것입니다. 사울은 도엑의 말을 듣고 신하를 시켜 제사장들을 불러놓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아히멜렉은 “왕의 신하 중에 다
성경에는 천사, 마귀, 악령, 귀신 등 하나님 외의 영적 존재에 대한 기록이 많다. 또한 성경은 세상을 선과 악을 상징하는 빛과 어둠의 대결장소이며 예수께서는 어둠의 권세, 즉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해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예속되기 때문이다(요한1서3:8). 악령(귀신)은 마귀의 하수인들로서 자기들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베드로전서5:8). 악령은 세상의 신이요(고린도후서4:4),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며(에베소서2:2), 아담과 하와와 사울 왕과 유다를 유혹했고,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고(마태복음8:28~34), 세상에서 악을 증진시킨다(마태복음13:39). 성경은, 악령은 사람의 극단적인 감정의 기복을 노린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악령은 사울 왕이 시기심으로 심한 불안에 빠져 평상심을 잃었을 때 그를 유혹했고(사무엘상16:14), 바벨론과 두로 왕의 교만이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을 거역 하도록 부추겼고(이사야14:12~14; 에스겔28:12~17), 가룟 유다가 돈을 탐했을 때 그를 사로잡았다(요한복음12:2). 친구와 가족을 배반하고 부당한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