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 지난 호에는 바울이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성에 관한 첫 번째 국면인 선재와 화육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두 번째 국면인 부활과 승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바울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성은 선재와 화육 그리고 부활과 승귀로 압축된다. 빌립보서 2:6~11에 나오는 기독론적 찬송시의 전반부(2:6-8)는 선재와 화육에 관한 것인 반면, 후반부(2:9~11)은 부활과 승귀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전반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 안에 선재하시던 분이지만 종의 본체를 가진 사람이 되었으며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으로서 그의 존재성에 있어서 신성과 인성의 신비한 결합을 제시했다. 바울은 후반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를 통해 인성과 신성의 신비한 결합으로 나아간다. (1)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의 존재가 되셨다(빌 2:9). 바울은 전반부에서 자기 자신을 비우고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됨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바울은 후반부에서는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하심
창세기 24장에 기록된 내용에 아브라함의 며느리요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는 다섯 가지 좋은 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시대의 영적 리브가를 본받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첫째, 매우 아름다웠습니다(16절). 우리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하나님과 사람들 보기에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여인이었습니다(15절). 엘리에셀이 목적지인 밧단아람에 당도해 우물가에서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리브가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사야 65장 24절에는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마다 “미리” 예비하신 응답을 받게 하옵소서!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셋째, 따뜻한 마음씨로 배려하고 성실하게 도와주고 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17~19절). 그녀는 마실 물 좀 달라는 엘리에셀의 말을 듣고 급히 물동이를 내려놓고 물을 떠서 드리면서 요구하지 않은 낙타들에게까지 물을 손수 길어다가 끝까지 먹여주는 것을 봅니다. 낙타의 별명이 “사막의 배”라고 합니다. 그
필자는 정치의 잘 잘못을 따지려 하거나 어떤 정치인이나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비난할 의사가 없다. 다만 최근 몇 년 동안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보여준 치졸한 계파 갈등과 어지러운 20대 국회의원 선거로 인해 우리사회의 상식과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는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면서 한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은 공천방식을 변경하거나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정부 여당은 전통적으로 해오던 당 중심의 하향식 공천방식 대신 상향식 프라이머리 방식을 채택하고 선거관리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런데 동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된 이가 당이 정한 새로운 방식을 거부하고 종전의 공천방식대로 공천 작업을 추진하겠다며 반기를 들고 나섰다. 이에 대해 당 대표는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으나 선관위원장은 선관위는 독립기관이므로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공표하고 당대표를 포함해서 모든 소속의원들을 면접까지 하면서 선관위 방식으로 공천을 밀어붙였다. 참으로 서슬이 퍼런 권세였다. 그러나 국민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선관위는 당이 정한 정책 안에서 공천과 선거를 수행 감독하는 한시적 기구이므로 당의 정책을 거부할 권리가 없고 업무수행 과정과 결과를 수
새벽이슬-15 충성된 종 ‘엘리에셀’ 창세기 24장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단연코 아브라함의 종인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입니다(창15:2). 이삭을 장가 보내기 위해 자기 고향 자기 족속에게 가서 자기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구해오라는 아브라함의 특명을 받은 종인 엘리에셀은 비록 늙었지만 순종했습니다. 엘리에셀(도우시는 하나님)은 자그마치 아브라함 밑에서 최소한 60년 이상을 종으로서 충성을 다한 신실한 사람으로 충성의 표본입니다(고전4:2). 예수님께서도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 복이 있으리라”(마24:45~46)고 말씀하십니다. 디모데전서 3:10~11에는 집사를 세우는 기준으로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직분을 인정상 주고, 시험든다고 주고, 대접상 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엘리에셀같이 충성된 사람들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져야만 소망이 있으며 미래가 있습니다. 주여! 우리 교회에 엘리에셀같은 충성된 일꾼이 세워지게 하소서! 엘리에셀의 두 번째 특징은 그는 설득력있는 말
말과 언어에 대해서 여러 번 글을 올렸거니와 목회자와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조심해서 사용하며 계몽해야 할 표현 몇 개를 더 하고자 한다. 아버지, 어머니, 형님 아버지 어머니는 자기를 낳아준 육친의 어버이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아버지와 다름없이 친근한 어르신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아버지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근래, 속세를 떠나 홀로 사는 기인(奇人)들을 찾아가서 대화와 체험을 나누는 방송 프로그램 등에서 아버지 호칭이 오, 남용 되는 사례가 많이 보인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생면부지의 산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사회의 법도와 통념을 벗어난 일이며 듣기에도 민망하다. 아버지 대신 선배님, 어르신, 노인장, 또는 아버님 등으로 불러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달리 친근감과 존경의 마음을 나타낼 때 폭넓게 사용되는 호칭이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가려서 사용해야 한다. 존경의 마음을 담아 어머님이라 하든지, [누구]어머니, 아주머니, 어르신, 여사(님) 등의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바르다 하겠다. “형님”은 친근한 선배에 대해 흔히 사용하는 말이지만 근래에는 남용이 심해 듣는 이를 식상하게 만든다. 이사람 저사람에게 공연히 형님 형님 할 것이
“목사님, 안녕하세요. 오늘 또 왔습니다!” 박종수 씨는 예사랑 교회에 부임이후 3년간 한두 달에 한 번씩 예배보기보다는 돈 받으러 오는 단골손님이다. 구룡마을 무주택 지역에 모여 지내는데 주일만 찾아온다. 지난달에는 저가 미국 가고 없을 때에 왔다 갔다며 오늘은 말도 없이 내 사무실문을 밀어제치고 들어왔다. 예배시간이 남아있어 대화했다. “작년에 내 시킨 대로 요사이는 일을 하고 있느냐?” “예 파지 줍기를 열심히 하는데 한 달에 50만 원 정도 수입이 됩니다. 그래도 동료들과 먹고 살기엔 턱없이 부족해서 오늘 또 이렇게….” “그래 시킨 대로 놀지 말고 부지런히 일해야지!” 교회마다 주일에 돌아다니며 구호금을 받기보다는 지금 65세이고 건강할 때 부지런히 일해서 먹고 살며 주일은 꼭 예배를 드리러 오라고 엄중히 충고한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언젠가 비오는 날 신당동에서 손수레를 끌고 올라오는 노모 아주머니가 힘들어 하기에 뒤를 밀어주며 따라 올라갔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고 쇠약한 할머니도 매달 50만원이나 수입이 된다고 했지. 가게들과 파지수집 예약을 하고 다만 1,000원이라도 나눠주면 가게 주인이 잘해 준다고 하던데, 자네도 그렇게 해서 앞으로 10
지난 수요예배를 드리며 내겐 다소 충격이었던 중요한 묵상 하나, 요한복음 6장15절 말씀이다.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는 표현. 그날 따라 그 말씀이 왜 그리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아는 바와 같이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후 예수님의 능력에 너무나 매료되어 그를 ‘선지자’로 고백함을 넘어 ‘임금’으로까지 삼으려 했을 때, 예수님은 그 부탁을 들어주시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아예 그 자리를 떠나버리시기까지 하셨다는 내용이다. 왜일까? 주님은 이 땅의 선지자로도 오셨지만 왕이 되기 위해서도 오셨는데, 왜 그들의 원함을 뿌리치고 떠나버리셨을까? 백성들이 알아서 왕이 되게 해드리겠다는데도 왜 주님은 거절하신 걸까?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왕과 주님이 원하는 왕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고픔과 압제를 벗어나게 해줄 정치적 메시야를 원했지만, 주님은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킬 영적 메시야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이 ‘원함’의 차이가 주님의 ‘떠남’을 불러온 것이다. 그러니 이는 왠지 우리의 모습도 비추는 것 같아 섬뜩하다. 아무리 우리의 원함이 간절하여도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 11:5) 성경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유독 에녹만은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유념해 볼 필요가 있는 인물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 만은 특별히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데려갔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 때 당시 평균수명의 절반도 살지 않은 상태에서 더 좋은 곳으로 빨리 데리고 갔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 찾는다면 하나님은 창세기 5:24절에 이렇게 에녹에 대해서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동행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세상의 상식과 지식을 초월한, 그것도 모든 사람들이 통과하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길 정도로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신 것일까요? 2012년 3월, 저희 집에 큰아들이 어느 날 아무런 한마디 예고도 없이 “아버지, 저 장가가고 싶습니다.”라고 마음을 털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나 예견치 못한 고백을 들
또한 이들의 “간접적인 신앙적 후예들”에는 침례교인들(Baptists), 퀘이커교도들(Quakers,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 크리스천 교회(Christian Church),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들 교회(Brethren in Christ Church) 그리고 제자들(Disciples)이라 불리우는 교회들 등이 있다.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은 근대적인 의미의 자유교회(Free Church) 혹은 신자들의 교회(Believers’ Church)의 원천이 되었던 사람들이다. III. 초창기 침례교운동과 그 성격 1. 초창기 침례교운동 영국 분리주의자들(English Separarists)의 교회였던 게인즈보로 교회(Gainsborough Church)의 담임목사 존 스마이드(John Smyth)와 그의 교우들은, 영국국교회와 왕실로부터의 핍박을 피해 1607년에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집단이주를 하였다. 암스테르담에서 빵공장을 운영하던 메노나이트 교인인 얀 문터(Jan Munter)라는 사람이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자신의 빵공장에서 기거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
몇 년 전에 사회적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키며 상영되었던 영화 “도가니”를 보면서 가슴 아퍼하며 장애인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적 이 있습니다. 광주 인화학교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울분과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입니다. 여전히 사회에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존재함을 봅니다. 장애인에 대한 시선은 아직도 차가운 게 우리의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국의 5 만여 교회 중에 장애인 사역부가 있는 곳은 불과 300 여개 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한국교회 안에서의 장애인 사역은 마치 미전도종족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거의 방치되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또 하나의 선교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시설이나 프로그램에서 장애인을 배려한 것을 찾아보긴 쉽지 않습니다. 4월 20일은 국가가 정한 장애인의 날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지난 4월 17일을 장애인 주일로 지정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교회들이 장애인에 대한 설교나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교회들이 상당수가 될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