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 살던 고장에는 산우리, 새신바우, 안골, 장수바우, 아치나리, 방갓, 여우골, 거촌, 무섬 등의 마을과 지역 이름이 있었다. ‘산우리’는 산울타리라는 의미, 거촌(居村)은 사람이 사는 마을, 장수바우는 마을 입구 언덕에 큰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 아치나리는 작은 시내를 뜻한다. 방갓은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이 부모를 여윈 죄인으로서 하늘을 볼 수 없다 해서 일정 기간 쓰고 다니던 대나무를 쪼개 만든 삿갓이다. 방갓은 방갓장이들이 모여 살면서 생긴 마을일 것이다. 무섬은 마을 둘레로 물이 돌아나가는 ‘물돌이 섬[마을]’이라는 뜻인데 한자를 병용하면서 수도리(水島里)가 됐다. 일찍이 설총의 이두(吏讀, 또는 鄕札)의 영향을 받아 땅과 마을 이름이 많이 변형되었으나 지명의 차음(借音)과 차훈(借訓)을 따라서 양지마을을 양촌리(陽村里)로, 음지마을을 음촌리(陰村里)로 바꾸고, 까마귀고개, 또는 까막재는 까마귀 오(烏) 자와 고개 현(峴) 자를 써서 오현(고개)라고 쓰는 등 이해하기는 좀 어려워도 본뜻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는데 일본어식 표기가 사용되면서부터는 의미가 전도(顚倒) 되는 경우가 많았다. 뜻이 뒤바뀐 땅 이름 작은 논(땅)
1. 갈릴리 바다와 사해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행20:35) 30년 전 성지순례에서 우리 일행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텔아비브에 내려 성도인 예루살렘을 보고 여리고에 내려가 이어서 맛사다를 보고 사해에서 쉬었다. 들은 대로 몸이 바다위에 뜨는지 속옷 입은 채로 수영하러 들어가는데 가이드는 말렸다. 눈에 소금물이 들어가면 큰일 나니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양해를 구하고 수경을 끼고 들어갔는데 처음이라 수영하기가 만만치 않아 하늘을 보고 누어 팔과 다리를 벌리고 조금씩 움직여도 부력으로 둥둥 뜬 몸은 잘 나아갔다. 우리는 이어서 요단강변 길을 따라 갈릴리 바다(게넷사렛 호수 또는 디베랴 호수)에 이르렀다. 울창한 숲과 만년설로 덮여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의 국경이 되는 해발 2814m의 헐몬산에 내린 비나 눈이 녹으면 계곡을 따라 가이사랴 빌립보를 지나 갈릴리 호수에 이른다. 갈릴리 호수는 분화구로 추측되는 곳으로 물이 고였다가 그물을 요단강을 따라 사해로 내려 보내주기 때문에 갈릴리 호수는 살아있는 바다로 미생물이나 플랑크톤 및 각종 물고기들이나 이끼와 수초가 번식하지만 사해는 지중해 해저
사도행전의 핵심 역시 예수님의 부활 복음서와 함께 사도행전에 수록되어 있는 사도들의 설교와 선교 이야기 속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그 주된 내용으로 되어 있다. 베드로의 반복되는 설교 속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었다(행 2:14~36; 3:15; 10:40~41). 바울의 설교 가운데 부활은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행 13:36~38). 심지어 부활을 도무지 믿지 못하고 어리석은 일로 여기는 스토아학파나 에피큐리안학파의 사람들에게도 굳이 그는 부활을 강조하여 설교하였다(행 17:18, 31).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설교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죽어간 순교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역사서 다음에 수록된 바울서신(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이나 히브리서와 일반서신은 예수님의 부활을 그 전제로 두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바울신학의 기초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부활 신앙을 세 가지를 적용하고 있다. 첫째로, 예수님의 즉각적인 다시 오심(imminent parousia)이다. 바울의 두 번째 부활 신앙의 적용은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께서 지금 교회 안에 내주 하셔서 성도들이 의롭게 살도록 격려하며 힘을 주신다는 그의 확신에 있다. 이 내용은
3. 종교다원주의 모판, 종교다원화 현상 선전 동성애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종교다원주의와 종교다원화 현상은 어떤 관계인가? 종교다원화 현상은 우리 시대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한 사회적 환경 중의 하나이다. 한국 사회도 오랫동안 종교다원화 사회였고, 이스라엘을 둘러싼 문화도 마찬가지였다. 종교다원화 현상이 우리 시대의 산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를 마치 이 시대에 발생한 독특한 하나의 사회적인 현상처럼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럴까? 종교다원주의는 종교다원화 현상 주장과 밀접한 관련을 한다. 그런데 일부 그리스도인은 평화, 사랑, 대화와 같은 어감이 좋은, 긍정의 의미를 주는 용어들에 현혹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종교다원주의자가 되어가면서 표면적으로는 종교다원화 현상을 말할 뿐이지 종교다원주의자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또는 각 종교가 나름대로의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 뿐이며, 이를 믿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자신이 무엇을 지지하는지를 모르거나 아니면 종교다원화 현상을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틀(frame)에 빠져서 그 실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종교다원주의는 먼저 종교다원화 현상이라는 사회 구조를
한국보건산업연구원의 불임 실태에 대한 2013년 표본조사에 따르면 기혼부부중 13.5% 즉 부부 일곱 쌍 중 한 명이 불임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유는 결혼 연령이 늦어지고 공해와 오염 등으로 인한 생리적인 변화등과 각종 스트레스로 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특별한 이유나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아기를 갖는 게 축복인 시대가 되어가고 있음을 봅니다. 그만큼 임신과 출산이 만만치가 않은 세상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목이 타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하갈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엘로 인하여 사라는 온갖 서러움을 자신의 몸종에게 받고 있었던 터였기 때문입니다. 하갈은 자기가 임신한 줄 알게 된 때부터 사라를 노골적으로 무시했는데 이스마엘을 낳고 14년 동안 얼마나 자기 주인 사라를 힘들게 했겠습니까? 그러던 차에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말씀하신대로 돌보시고 행하심으로 약속의 아들로 성령을 따라 난 이삭(이쯔하크)을 주신 것입니다(갈4:28~29). 하나님은 인간과 다르셔서 한 번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고 실행하시며(민23:19) 변개치 않으시고 거짓말 하지 않으십니다(삼상15:29). 그리고 후회하지 않으십니다(롬11:29). 솔직히 말하면 저를 비
고전적 성경 해석 원칙 가운데서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것은 점진적 계시라는 대 전재 위에 제시한 E. J. 카아넬의 “다섯 가지 규칙”으로 보인다. 첫째,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해석한다 바울은, “율법은 장차 올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온전한 계시가 나타날 때는 그림자는 사라지고 원형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히10:1상). 그림자의 원형은 계시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이다. 이 원칙을 무시하고 여전히 구약성경을 온전한 계시로 믿는 자들에 대하여 바울은,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하고 탄식했다(고후3:15). 수건을 벗으려면 주께로 돌아가야 한다(16절). 둘째, 서한이 복음서를 해석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시면서,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라]”하고 말씀 하셨다(요16:12-13). 복음서는 성령이 오시기 전에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말씀이나 서한은 그 성령께서 오신 후에 기록된 말씀이다. 예언은 그것이 성취될 때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이 최초로 죄의 유혹을 받고 범죄하게 된 경위와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오로지 사람을 위해 만드신 아름다운 낙원에서 추방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인간은 죄의 유혹 앞에서 무기력하게 죄를 범하고 말았을까? 본문은 그 동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동기가 매우 가벼운데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인류가 죄를 범하는 동기들을 보면 인간은 죄가 유혹할 때 너무 쉽게 충동을 받으며 파멸의 길로 달려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죄가 사람을 유혹할 때의 특징을 보면 사람을 위협하거나 놀라게 하거나 두렵게 해서 죄를 범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나 가볍게 그리고 슬그머니 들어와서 인간을 유혹하고 인간의 영성과 인격을 해체시켜 버리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진면목을 보이지 않습니다. 죄는 매우 약삭빠르고 집요하며 강력하게 인간을 유혹하며 죄의 길로 이끌어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의 맥락은 죄가 인간을 어떻게 유혹하는지 그 절차와 과정, 방법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 안에서 죄의 유혹이 어떻게 우리를 실패하게 하는지 깨달아 승리의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죄의 유혹을 받는 이유는 주의하지 않는 삶의 태
윌리암스 박사에 의하면,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과 근원적 종교개혁가들은 교회개혁에 대한 근본적인 전제가 달랐다고 진단하였다. 전자는 “개혁”(reformatio)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하여, 개혁의 대상이 되는 당시의 로마가톨릭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사람들이었고, 후자는 “회복”(restitutio)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개념을 전제로 하여, 신약성서에 제시되어 있는 교회를 회복하여 16세기에 재현하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16세기 당시의 유럽 기독교계에서는, 유아 밥티스마 전통을 부정하고, 오직 신자들 즉 신앙을 분명하게 고백하는 자들에게만 밥티스마를 베풀고, 세속정치 권력과는 무관한 순수한 신앙공동체를 추구했던 운동은 너무나 “과격한”(radical) 것이었다. 그러나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이 16세기에 추구했던 신앙공동체가, 바로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초대 기독교의 교회 모습이었다.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Early Church) 혹은 “신약성서적 교회”(New Testament Church)는 세속정치에 물들지 않은 교회였고, 세속정치 권력으로부터 핍박을 받으면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머리로 하고 그 분만을 따랐던 신
동성애가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유럽, 미국, 호주 등 전 세계적으로 동성애 합법화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며 고착되는 상황이다. 특히 미국 문화가 마치 기독교 문화처럼 인식되는 세계의 흐름에서 동성애가 기독교 문화로 오인되면서 기독교는 타락한 퇴폐 문화의 상징으로 비추어져 선교에도 큰 저해 요소가 될 수 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연방 대법원의 동성결혼 합헌 결정을 축하하며 백악관을 무지개색 조명으로 밝힌 것은 홍수 심판 후의 무지개를 떠올리게 하면서 다가오는 이 세상의 심판을 실감하게 한다. 미국의 문화와 사상의 영향, 미국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의 영향에 취약한 우리의 현실은 이러한 타락의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여 확산시킬 우려할만한 상황이다. 이런 사회적인 상황에서 일부 기독교인이나, 기독교 단체들이 동성애를 심리학적, 생물학적 요인으로 간주하며 동성애를 정당화한다. 동성애를 성적 취향의 차이로 규정하면서 서로 다른 개인의 취향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소위 차별금지를 주장하며 사실상 동성애를 조장하는 것이다. 심지어 동성애 옹호가 마치 지성적이며, 인간에 대한 관용과 사랑의 척도인 것처럼 동성애 비판을 비판하거나 침묵으로 동조하기도 한다.
● 부활은 하나님의 신비 동서고금의 그리스도인들이 2000년 가까이 예수님의 부활을 환호하는 부활주일 예배를 드려오고 있다. 그러나 막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실 때의 그 부활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예수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사복음서 끝 부분을 모두 살펴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 주었던 이들이 맨 처음 본 것은 예수님의 빈 무덤뿐이었다. 부활은 신비에 속한 사건이기에 하나님께서 그 부활의 순간은 인간에게 숨겨지게 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선포하고 증거 한 모든 이들은 하나같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시며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증거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도 부활 그 자체는 아니었다. 실로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재창조의 첫 열매이기에(고전 15:20, 23), 마치 처음 창조의 순간이 인간에게 숨겨졌지만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로 된 것을 알게 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히 11:3). ●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그 전제로 두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 사건도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도 그분의 부활 사건도 모두 역사 속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이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