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은혜”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모든 게 은혜 속에 녹아 있고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 때문에 살아 있고 은혜 때문에 죄도 용서 받고 구원도 받았으며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됐고 은혜 때문에 지금 여기까지 왔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이 고백하신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라고 고백한 것 같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세상에 죄가 가득하고 사람들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일 때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전해줍니다(창6:8). 노아가 이런 은혜를 입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창7:1). 창6:9에 보면 노아의 믿음을 보여주는 세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의인” “완전” “동행”입니다. “완전”이란 히브리어로 “타밈”이라고 하는데 이는 흠과 티가 하나도 없이 결점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고 중심과 태도와 방향이 하나님을 향해 있으며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런 노아에게 어찌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노아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나 어떤 육체의 행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 엄마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밤마다 보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이른 아침 엄마가 일하러 나간 빈 집에서 아이는 종일 엄마를 기다린다. 낮에는 배가 고파 찔레 꽃잎[순]을 따 먹으면서도 “엄마엄마”를 부른다. 엄마는 밤이 늦어 [품삯으로 받은 곡식을 이고] 하얀 버선 발목을 바쁘게 아이가 기다리는 집을 향한다. 마지막 2행은 어린 딸(성별 표시 없지만)이 자라서, 지금은 다른 세상으로 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다. 찔레꽃은 진달래와 봉숭아 개나리 등과 함께 가난과 더불어 우리민족의 정서에 깃들어 피고 진 꽃이어서 노랫말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찡해온다. 찔레꽃을 쓴 시인은, 대구 출신 월북 문인 윤복진(1907-91)이 분명한데 1920년에는 이태선이, 1930년 ‘신소년’ 잡지에는 이원수(1911-81)가 각각 같은 제목으로 조금씩 다른 내용의 시를 발표했다. ‘문학세계’와 대구문학관 등이 윤복진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고 그의 유작을 모아 전시했으나 작사자가 여럿 나타난 이유를 찾
요즘은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좀 적적하거나 동물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집에서 동물을 키웠고, 그런 동물이 언제부터인가 크기와 관계없이 집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들과 같이 먹고 자게 되었습니다. 거의 자식같이 키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제는 애완동물이라는 말을 거의 안쓰고, “반려동물”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하도 사람 대하듯 하고, 동물 이름에도 자기 집 성을 갖다 붙여주는 사람들까지 있다 보니 동물들이 자기가 사람인줄로 착각하는 일이 적지 않을 것 같다고 혀를 차는 분들도 있습니다. 거기다 이제는 동물학대방지법 같은 것도 있어서 자기 소유의 동물이라고 해도 밥을 제대로 안주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하면 법에 저촉되어 처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반려 동물의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개와 고양이입니다. 전통적으로 개는 사람 가까이서 살아왔고, 종자가 개량되어 크기가 작아지고 대소변을 가리는 훈련이 되어지면서 일찍부터 실내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공동생활이 많아지면서 개가 짖는 소리가 적잖은 민원을 발생시키고 이웃 간의 불화를 조장하게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고양이를 기르는 집이 많아졌습니다.
‘침례’는 외형적 형식이지만 그러나 내면의 상태와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실체로 기능한다요한의 침례(1:5; 11:16; 19:3, 4); 회개의 침례(2:38, 41; 8:12, 13, 16, 36, 38; 9:18; 10:47, 48; 16:15, 33; 18:8; 19:5; 22:16); 성령침례(1:5; 11:16); 기타(19:3). 요한의 침례(1:21; 10;37; 13:24; 18:25; 19:3, 4).. 예수는 승천하시기 전에 ‘물침례’를 비교점으로 삼아서 제자들이 ‘성령으로 침례’ 받을 것을 예고하신다물침례와 성령침례와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김선배,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침례’의 신학적 의미,” ‘복음과 실천’, 45 (2010 봄): 51-3..이 예고는 베드로의 회상을 통해서도 반복된다(11:16). 사도행전에서 침례는 구원과 침례의 시차적인 간격이나 개념의 분리 없이 구원을 표출하고 보증하는 형식이다로마서 6장은 침례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과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침례가 성령과 관련 하여 내면적인 상태를 표출하는 도구로도 사용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의 ‘침례’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는다. 성령
시편 23편은 내 어린 시절 처음 성경을 암송할 수 있었던 때에 첫 번째 암송했던 시였을 것으로 기억합니다. 질풍노도의 청소년의 시절을 지나며 수많은 좌절의 순간순간에도 시편 23편은 내게 격려를 주었고 희망을 주었고 행복을 주었습니다. 청장년을 지나 초로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먼저 주님의 품에 안기신 선친 고 이진팔 목사님 내외분의 묘소를 가끔 찾아 묘비 앞에서 그리움을 달래며 고개 숙여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나직하게 암송하며 영원한 그 날을 고대하면서 그리움을 달래봅니다. 이것이 나의 영적 히스토리이며 독자들도 같은 영적 역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시편 23편을 처음 대하면 너무나 달콤하고 포근한 솜사탕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 암송했으며 또 아름다운 곡을 붙여 노래하며 사랑해온 시입니다.웨슬리는 “이 작은 한편의 시가 세상의 어떤 수많은 책들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시편 23편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눈물을 닦아주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설교자는 “시편 23편이야말로 시편의 나이팅게일”이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깊은 밤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듣고 희망을 찾아 기쁨의 아침을 맞는다”라는 말은
요한복음서에서 부활현현 체험의 마지막 국면은 이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제자로 묘사된 “예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에 관한 주님의 언급으로 진행한다. 저자는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 속에 그 제자를 등장시킨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가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이더라”(21:20).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대화 가운데서 그의 동료이며 경쟁 관계에 있던 그 사랑 받은 제자에게 관심을 돌린다. 베드로는 그 제자가 이미 예수를 따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자는 ‘따르다’는 동사를 사용하여 베드로와 그 제자의 상황을 대조시킨다. “그 제자가 따르고 있다”라는 그 제자의 상황에 관한 표현 앞뒤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인 “나를 따르라”(v.19)와 “너는 나를 따르라”(v.22)는 지시가 반복된다. 그 제자는 베드로가 행하도록 반복적으로 지시를 받은 것 곧 예수를 따르는 일을 이미 행하고 있었던 것이 부각된다.그 제자는 고별 강화에서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과 동일시된다(13:23~25). 그는 예수께서 사랑한 제자이며 그래서 예수님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는 다른
일반적인 종교들을 보면 사랑을 경험하지 않아도 유지될 수 있지만 사랑을 경험할 수 없고 실천할 수 없는 종교를 참 종교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마태복음 22장 37-40절 말씀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사랑이 경험되지 않고 실천되지 않는 기독교를 기독교라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지체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모든 세대를 걸쳐서 가장 귀중한 가치입니다. 특별히 21세기를 살아가면서 기독교한국침례회 안에서 한 신앙의 고백을 공유하며 주님을 섬기는 모든 교회의 지체들이 그렇게 되었으면 합니다. 본문 9절에 “형제 사랑”이라는 말을 헬라어에서 ‘필라델피아스’입니다. 이 말은 문법상 ‘필라델피아’의 단수, 소유격입니다. 이 말은 “내 가족, 내 형제 자매의 사랑”이라는 좁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바울사도께서 곧이어 10절의 말씀에서 “온 마게도냐
사도행전은 ‘도’라는 용어에 비유적으로 구원의 길에 들어가는 통로의 개념을 내포시킨다주의 도(18:25); 하나님의 도(18:26); 이 도(19:9: 하나님 나라-19:8; 19:23: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19:20; 22:4, 14, 22). cf. 2:28(생명의 길); 13:10(바른 길); 14:16(자기들의 길); 구원의 길(16:17). 물리적으로 ‘길’을 의미하는 ‘도’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특히 이 용어는 헬라-로마 문화권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바울의 증언도 이러한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22:4; 24:14). 바울은 총독 벨릭스 앞에서 행한 변호에서 ‘도’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진술을 한다. 이 장면에서 반복되는 ‘도’는 바울의 강론을 통해서 ‘의인과 악인의 부활’(24:15)과 ‘죽은 자의 부활’(24:21)을 비롯해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24:25). 이 바울의 강론은 구원 이후의 결과를 함축한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뜻’은 매우 드물게 사용된다하나님의 정하신 뜻(2:23); 하나님의 권능과 뜻(4:28); 하나님의 뜻(13:36; 20:27). cf. 이단이라 하는 도(24:1
이번 시간에는 구약의 인물 중에 ‘셋’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 이름의 뜻은 “대리자, 임명하다 또는 택함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그것은 죽은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기 때문입니다(창4:25). 아담과 하와 부부는 죽임을 당한 작은 아들과 이로 인해 정처없이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던 큰 아들로 인해 좌절하고 어찌할 줄 모르고 넋이 나갔을 것입니다.그런 아담이 “다시” 하와와 동침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주신 아들이 바로 셋입니다. 셋은 낙심천만하고 있던 아담과 하와 부부에게 “위로와 기쁨과 소망”을 준 아들입니다. 셋이 태어남으로 초상집 같았떤 집안에 다시 웃음꽃이 피고 생기가 돌았을 것입니다. 끊어진 아담의 가계를 이어주려고 태어난 아들입니다. 역대상 5:1을 보면 야곱의 열 한 번째 아들인 요셉의 자손에게 실질적인 장사의 명분이 돌아갔다고 말씀합니다. 셋은 순서상으론 아담의 셋째 아들이지만 실질적인 장남이 되는 복을 받게 됐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버지 아담이 “다시”(again)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정비해서 아내와 동침(합)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다른 씨”를 주신 것입니다.그리고 셋은 훗날 이 세상의 구주로
문명사회가 역사를 존중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역사에서 과거의 실패와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을 교훈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는 때로 의도적으로 왜곡될 수 있지만 한 시대가 지나가면 왜곡한 사람의 저의가 추신(追伸)으로 첨부되어 저울추처럼 제 자리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역사에는, 알다시피, 정사(正史)가 있고 야사(野史)가 있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중앙 관청에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이 있었고, 어전(御殿)에는 임금의 치리(治理)와 모든 대화를 낱낱이 기록하는 어전사관이 있었다. 그들이 밤낮으로 기록한 것이 바로 후대 정사의 기초가 된 왕조실록(實錄)이다. 이 기록은 임금을 포함해서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기록 후 즉시 봉인해 두었다가 임금이 죽은 후에는 실록청(實錄廳)에 영구 보존했다. 선조들은 이처럼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록을 엄하게 취급했다. 우리나라 텔레비전에서는 저녁의 황금시간대에 앞 다투어 사극을 방영한다. 근래에는 ‘육룡이 나르샤’와 ‘장사의 신’ 등 비교적 수가 줄어든 것 같으나 한 때는 ‘단종애사’ ‘태조 왕건’ ‘여인천하’ ‘허준’ 등의 소위 대하드라마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적으로 방영되었다.‘대장금’과 ‘허준’에서와 같이 의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