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삼하 5:18~19) 블레셋은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세력이 강력한 존재로 부상하기 전에 제거하고자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에 능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하나님께 질문하여 그분의 뜻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일반적인 성도들 같았으면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무슨 “전쟁에 나갈까요? 말까요?”라는 질문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조건 군사를 소집하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나갔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으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늘 의지하며 살았던 삶이 몸에 베여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새벽 기도 시간에 두 번째로 많은 비중을 두는 부분은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데 둡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삶 외에 또한 저와 함께 계신 성령님의 지시를 늘 따르며 살아가는 데 온
“예전에는 심장 박동수를 빠르게 하는 사람이 좋았다. 요즘에는 심장 박동수를 느리게 하는 사람이 좋아졌다.” 노수봉 저(著) “뜨끈뜨끈 광고 회사인의 메모장”(북클라우드, 96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이 있고, 가슴을 잔잔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 다 좋고 필요하지만, 후자에 대한 평가절하가 많았습니다.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은 깃발을 꽂게끔 돕지만, 가슴을 잔잔하게 하는 사람은 ‘풍경’을 보게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청미래, 280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으면서 본다고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기차가 좋은 것은 ‘앞’을 보여주지 않고 ‘옆’ 풍경을 보여주며 생각에 잠기게 한다는데 있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자주 그림에서 떨어져 그 대상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야 사물의 형상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풍경을 본다는 것입니다. 들숨 뿐 아니라 날숨이 있어야 호흡을 하듯이, 일 뿐만이 아니라 창조적인 안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 높이 날아 보기를 원합니다. 더 넓게 보기 위해서 더 높이 떠오르시기를 바랍니다. 더 깊이 보기 위해서 뚫어지게 쳐다보기를 원합니다. 한반도 창공을 높이 떠올라 지구를 통찰해 봅시다. 러시아의 흰 곰이 얼음 구멍에서 먹이를 찾아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남쪽의 섬에서는 물개가 먹이를 찾아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저 태평양 넘어 독수리가 언제 보았느냐는 듯이 자기 먹을 것만을 찾고 있습니다. 높이 떠올라 더 높이 떠올라 서쪽을 보세요. 수 만년 묵은 고목나무가 새순이 돋아났습니다. 동남아를 쳐다보세요. 야자수 그늘이 점점 사라지고 고목나무의 새순이 그늘을 이루고 있습니다. 날개를 활짝 펴고 한반도 위 창공에 떠올라 보세요. 휴전선 토막한 땅 속에 두더지가 먹을 것을 찾아 남진하다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땅 위로 올라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래의 지도자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 종교 등 미래의 지도자는 세계 속에서 국가관을 일깨워주고 한국인의 민족혼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이제는 양떼를 어느 곳으로 인도할 것입니까? 산 좋고 물 좋은 곳,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곳이 어디인가?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
미래를 명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현실을 정확하게 관찰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또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거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래 볼 수 없는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다면 또한 할 수도 없습니다. 눈이 먼 소경은 아무도 인도할 수 없습니다. 혹시 인도한다 할지라도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질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지도자란 과거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현실은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어야 하며, 미래를 정확하게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과거와 현실과 미래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미래의 지도자입니다. 만약에 과거와 현실과 미래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얘기할 수 없다거나 내다 볼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아무도 인도할 수 없는 소경과 같습니다. 소경은 인도자가 될 수도 없고 길가는 나그네에게 이정표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듯이 앞을 내다볼 줄 아는 능력도 없는 사람이 길가는 이들에게 이 말 저 말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데 사흘길이 되는 길을 떠나라고 재촉하는 지도자도 있습니다. 빗자루 들고 마당 쓸러 나가는 사람에게 마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나타난 영광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독생자’로 번역된 단어(‘모노게네스’)는 본래 “단 하나의” 혹은 ‘유일무이한’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다. 요한은 예수의 존재의 특별한 성격 곧 하나님과 유일한 관계를 가진 존재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한다(1:18; 3:16, 18). “아버지의 독생자” 혹은 “하나님의 독생자”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세상의 어느 누구도 혹은 세상의 어떤 존재도 가질 수 없는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관계의 존재 곧 창세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의 존재이셨으며, 화육하셨고, 죽으셨으며, 부활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고, 아버지와 아들의 신비한 연합이 완결되셨으며, 이제는 보혜사 성령의 존재로 그의 제자들에게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독생자라는 용어에서 중간에 위치한 ‘생’은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의 출생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출생한 것은 동정녀 출생의 신학에서 부각된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요한은 동정녀 출생의 신학과는 다른 화육의 신학을 부각시킨다. 화육의 신학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중생과 칭의의 동시성 개념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신분을 제공하여 의롭게 만드는 칭의와 새 생명 곧 새로운 본성을 부여하는 중생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롬5:18; 요5:24). 이처럼 카너는 ‘의롭게 만드는’ 칭의의 경험적 측면을 통해 중생과의 관계를 설명했다. 반면에 무디는 중생의 당연한 결과로서 칭의가 발생하지만, 이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 관계라고 간략하게 표명했다. 2. 중생과 성화와의 관계 대그는 중생을 성화와 연결하여 설명하기를 선호했다. 이는 그가 중생과 성화의 행위가 지속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중생한 자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과 육신의 소욕 사이의 지속적인 적대행위를 증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갈5:17). 그래서 대그는 중생과 성화의 시작을 동시적인 것으로 파악했다(빌2:13). 보이스는 대그와 달리 중생이 성화보다 선행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가 중생을 성화보다 앞선 것으로 보는 이유는 사람이 중생을 통해 새로운 본성을 획득해야만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중생과 성화가 본성적으로 하나의 변화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같은 강조는 중생과 성화 모두가 시작부터
사람을 위해 돈을 만들었는데 돈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됩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이 있는데 너무 좋은 옷을 입으니 내가 옷을 보호하게 됩니다. 사람이 살려고 집이 있는데 집이 너무 좋고 집안에 비싼 게 너무 많으니 사람이 집을 지키는 개가 됩니다. 이런 것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어느 순간 거꾸로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니까 의미의 노예가 되고 행복하지 못한 겁니다.전도(顚倒)는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거꾸로 보는 것이고 몽상(夢想)은 헛된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꿈인 줄을 모르고 현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① 많은 것을 곁에 두고 다 써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이상한 현대인(現代人) ② 미래의 노후 대책 때문에 오늘을 행복(幸福)하게 살지 못하는 희귀병에 걸린 현대인(現代人) ③ 나누면 행복(幸福)이 온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알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현대인(現代人) ④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현대인(現代人) ⑤ 늘 행복(幸福)을 곁에 두고도 다른 곳을 해매며 찾아다니다가 일찍 지쳐버린 현
“문장에 파란이 없는 것은 여인에게 곡선이 없는 것과 같다. 천하에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곡선이지만. 죽은 것들은 모두 뻣뻣하다. 자연계는 곡선을 좋아한다. 연기와 같이 피어오르는 안개, 뭉실뭉실 솜 같은 구름, 담을 넘어 삐죽 고개를 내민 꽃가지, 구불구불한 시내… 반면에 인조물은 직선을 좋아한다.” 임어당 저(著) 김영수 역(譯)“여인의 향기”(아이필드, 13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건축예술의 거장 안토니 가우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선이고, 곡선은 신이 만든 선이다.” 니체 또한 “진리는 모두 곡선”이라고 했습니다. 직선’은 ‘곡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에서 나옵니다. 산 능선에서 고요하고 은근하게 이어지는 어머니의 눈썹과 같은 곡선을 보십시오. 꽃은 모두 곡선이고 난초는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의 귀는 곡선으로 생겼기 때문에 직선의 언어보다는 곡선의 노래가 더 잘 들어옵니다. 나무도 그러합니다.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나무가 더 멋스럽습니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는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습니다. 새들도 곧은 가지보다 굽은 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고, 함
“마음이 설레지 않는 옷을 입고 행복할까? 설레지 않는 책들을 쌓아둔다고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절대 착용하지 않을 장신구를 갖고 있는 것으로 행복한 순간이 찾아올까?(중략) 마음이 설레는 물건만으로 채워진 자신의 공간과 생활을 상상해 보자. 그것이 바로 자신이 누리고 싶은 이상적인 생활이 아닐까? 마음이 설레는 물건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과감히 버리자. 그 순간부터 당신에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이다.” 곤도 마리에 저(著) 홍성민 역(譯)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더난출판, 58~5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정리의 여왕으로 불리우는 일본의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통쾌한 선언을 합니다. 그녀는 두근거리지 않는 것들에 둘러싸여 많은 에너지를 빼앗긴다고 하며, 두근거림이 없는 물건들을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그 이후에는 좋아하는 것들로 삶이 채워지는 체험을 합니다. 인생의 고통은 얻지 못해서가 아니라 버리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승리자는 많은 것을 얻은 자가 아니라, 의미 없는 것을 버린 자입니다. 어리석은 새는 반짝이는 것을 무엇이든 주워 모으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주워온 유리 조각 쇳조각들로 둥지가 엉망이
동내에서도 소문난 가정이 있다. 몇 십 년을 싸우며 칼부림도 나고 작은 마을 사람들이 다 듣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드디어 몇 달 전부터는 변호사에게도 여러 번 갔고 끝내는 법원 민원실까지 가서 서류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연세가 칠십을 넘기신 분들이시다. 진도에 내려와 전도 대상자로 지목하고 기도하던 사람들이었다. 선교지와 같은 마을에서 전도의 문을 열기 위해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는 분들을 지목하고 기도했던 것이다. 지난 달부터 더 심해서 이제 끝장이라는 상황에 우리 부부가 알게 되고 늦은 밤까지 찾아가기도 하고 찾아 오기도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땐 서로 숨기고 각자 찾아와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힘들면 끝내라고 말한다며 내일은 결정하겠다고까지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를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을 전해주고 싶다며 한번 도전해 보자고 울기도 하고 애걸했다. 성경의 하나님을 소개하며 시간이 흘러 두 분 모두 나중 더 힘이 빠졌을 때를 생각하고 이겨 보자고 당부를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고비를 넘기고 나서 지금은 만날 때 마다 “어떠시냐?”고 넌지시 물으면 미소를 지으시며 “좋아요.” 대답을 듣는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그분에겐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신학대학교 동기로 졸업한 뒤 서울에서 이웃 지역에 각각 교회를 개척해 목회를 시작했다. 그런데 몇 년이 안되어서 선배 목사님의 친구가 갑자기 미국으로 이민목회를 떠나버렸다. 그럴 사정이나 이유를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기에 그땐 궁금하기도 했고 몹시 섭섭함도 있었다고 말해 줬다. 세월이 지난 후 선배 목사님은 미국에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늦게나마 왜 이민목회를 떠났는지 물어봤다. 친구는 잠시 망설이더니 “자네 때문이었지”라고 충격적인 대답을 주더라는 것이다. 동시에 개척교회를 시작했지만 친구가 섬기는 교회는 별로 부흥이 없는 반면에 선배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선 계속 좋은 소식만 들려왔었다. 이에 친구끼리 자꾸 비교가 되고 열등감이 깊어지고 스트레스를 받음으로 선택한 것이 이민목회였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많지 않은 교인이지만 다른 목회자와 비교할 것 없이 목회를 하니 평안하고 행복하다고 알려주더란다. 목회를 하면서 선배 목사님의 친구처럼 다른 목회자나 다른 교회를 상대로 비교하다가 시험에 들거나 실망에 빠진 경험은 없는가? 특히 목회를 좀 더 잘해보겠다고 어떤 세
전깃줄에 참새 열 마리가 있었습니다. 포수가 총알 한방으로 다 사냥하려 했는데 열 번째 참새만 죽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참새가 “앗, 총알이다”하며 피했습니다. 두 번째 참새도 “총알!”하며 피했습니다. 그런데 아홉 번째 참새가 “앗, 콩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열 번째 참새가 입을 쩍 벌리며 “아~~”하다가 죽었습니다. 우리 옛말에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 안 그런 척 하면서 더 염장질하는 사람 말입니다. 중간에서 살짝 말 한마디 바꿈으로 천국이 지옥으로 바뀝니다. ‘서울시 체육회’를 중간에서 잘못 옮기면 ‘서울 시체 육회’가 됩니다. ‘부산시 장애인 복지관’은 ‘부산시장 애인 복지관’이 되고 ‘희망 의상실’은 ‘희망의 상실’이 됩니다. ‘당신은 무지개 같아요.’ 라는 말을 살짝 꼬으면 ‘당신은 무지 개 같아요’가 됩니다. 사탄과 사탄에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합니다. 왜 우리들은 참소하고 험담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을 좋아할까요? 그 이유는 험담과 불평이 죄로 인해서 오염된 우리의 성품에 만족을 주기에 그러합니다. 험담하고 불평하면 만족이 생깁니다. 어느 정도 위로도 받고, 기쁨을
또한 ‘동시적’이라 함은 중생이 우리 안에서 회개와 믿음이 완성될 때 완성되고, 회개와 믿음도 중생이 완성된 때에 완성된다는 뜻이다. 멀린스는 대그나 보이스와 같이 이 믿음은 오직 은혜를 인하여 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구속을 확보해 주는 공로적인 활동이 될 수 없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했다. 이처럼 멀린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 관점에서 중생의 조건을 회개와 믿음으로 규정했다. 카너는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을 통해 중생의 조건을 제시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소생시키는 행위를 통해 발생한 중생이 믿음보다 앞선다고 주장한 반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구원의 조건인 믿음이 중생보다 앞선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카너는 믿음과 중생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영적 체험의 두 국면으로 규정한 후에, 인간은 믿음에 의해 중생하지만(갈 3:26; 요 1:12~13), 이 믿음은 하나의 중생적인 행위측면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카너는 구원의 순서가 “회개와 믿음을 통해 체험하는 죄 용서, 칭의, 화해, 양자, 중생, 그리고 성화”로 전개되는 하나의 실재에 대한 다른 묘사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카너는 믿음이란 파산한 죄인이 하나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 나오는 로고스의 화육과 화육하신 로고스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다루는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존재성을 제시한다(1:14, 18). 요한은 영원한 신성의 창조주인 로고스가 역사상의 한 구체적 인간이 되어 그들 가운데 함께 거주하셨던 사실을 제시하고 그 속에서 그 분의 유일한 존재성을 특별한 용어를 통해 표현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a).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말씀이 ‘육신’ 곧 ‘인간’이 된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신성의 존재가 인성의 존재로 변형된 것을 말한다. 그것은 또 그 영원한 신성의 존재가 살과 피를 가진 인성의 존재가 되어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온 것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에서 ‘육신’이란 단어는 아주 드물게 나오는데, 신체 곧 살과 피를 가진 인간 존재라는 중립적 의미로 사용된다. 사도 바울도 그의 기독론적 성찰에서 화육과 관련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롬 1:3);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냈다(롬 8:3);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셨다(딤전 3:16). 이러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불평불만만 늘어놓으며 보내는 사람에겐 불행한 하루가 되고, 감사하는 사람에겐 행복한 하루가 된다. 자주 들어 귀에 익은 ‘감사’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입만 열면 불평하고 비판하며 심지어는 욕이 입에 붙은 사람도 있다. 감사한 마음이 없고 불평불만이 가득하면 감사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불평불만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시계의 배터리가 다 닳으면 시계바늘이 몇 번 째깍째깍하다가 딸깍 멈추듯이 우리 인생도 어느 날 정해진 시간을 다 사용하고 나면 숨이 째깍 멈추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만큼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처럼 정해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가족에 대해, 직장 상사나 사장에 대해, 정부에 대해 늘 불평불만을 하며 불행한 시간만 보내다가 인생의 시계가 멈춰버린다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인가? 필자의 주변에도 30~40대의 젊은이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있어서 참으로 인생은 내일 일어날 일을 모르고 산다는 것을 절감한다. 우리의 인생이 생각보다 짧은 인생일 수도 있으니 매사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