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나 국가가 잘 운영되려면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 장(長)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장의 지도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은 지도자를 존중하고 따르는 구성원들의 태도이다. 장을 세워놓고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협력을 거부하면 아무리 유능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 단체를 잘 이끌어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세계 어느 나라든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에게는 호 불호와 여야 간에 공석에서는 경의를 표함으로 지도자에 대한 예를 나타낸다. 전쟁 중인 두 나라의 대표가 회담을 할 때도 피차 격식에 따라 예를 다 한다. 자기 나라 장군이 회담 장소에서 적장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경의를 표했다고 해서 그것을 조국을 배반하고 적국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그런데 근래 우리의 영상 매체에는 국가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잊은 듯한 행위와 표현이 때때로 방영된다. 대통령이 투표소에서 한 자원봉사자에게 수고한다면서 손을 내밀었는데 그 자원 봉사자는 대통령의 선의의 악수를 무시하고 얼굴을 돌렸다. 누구든 대통령을 싫어하고 좋아하고를 떠나 국민으로서의 예의는 갖춰야 하는 것이다.우리
동방 박사가 방문한 베들레헴이 당시 사회에서 어느 지역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그들이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를 보여주는 인종적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동방 박사에게 메시아 출생지역을 분명히 가르쳐준 사람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은 헤롯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마 2:7~8).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유다 베들레헴”(evn Bhqle,em th/j VIoudai,aj)은 신학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4km 떨어진 유대 지역의 작은 마을로 다윗이 출생하고 자라난 곳이다. 구약 시대 유대인들은 이곳을 다윗의 도시라고도 불렀다(삼상 16:1~13; 눅 2:4). 마태복음 서사는 예수를 다윗 왕과 연결시키고 있는데, 족보에서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한다. 이것은 다윗 왕조를 다시 회복할 구원자 메시아를 의미하는 칭호로 볼 수 있다(마 1:1). 그리고 두 소경은 자비를 구하기 위해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마 9:27). 그들이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부른 것은 예수가 메시아적 소명을 수행하고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태가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족보에 언급하고 출생지를 베들레헴(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피차 함부로 부르거나 불리어서는 안 된다. 살피건대 목사와 선생과 연예인과 정치인의 이름이 대게 가장 많이 불리어지는 이름인 것 같다. 연예인은 인기인, 정치인은 국가적 공인, 교육자는 만인이 의무적으로 거쳐야 하는 필수 교육과정의 중심에 있는 신분이므로 그렇다 하더라도 목사의 이름이 함부로 불리어지는 것은 잘못된 기독교 문화를 반영하는 그림자인 것 같다.필자는 주일학교 학생으로부터 시작된 교회생활에서 잘 잘못 간에 목사의 신분이 능욕당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목사를 거명하면서 ‘목사’라는 직함까지 떼어버리고 ‘김00이가,’ ‘조00’이 하고 함부로 말하는가하면, ‘000 목사의 비리’ 등의 제목을 붙인 유인물을 만들어서 전국교회에 살포하고 신문이나 매스컴에 비방 기사를 내는 것도 보았다. 목사라고해서 어찌 과오 없이 한 생애를 살 수 있으랴. 때로는 넘치고 때로는 모자라고 작은 실수도 하고 큰 과오도 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목사를 고발하는 유인물에는 작은 과오를 침소봉대하고 때로는 없는 혐의를 지어내기까지 하는 것도 보았다. 세상에는 목사의 이름으로 불리어지기에는 부끄러운 이도 있
둘째, 동방 박사를 이방인이라고 믿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태가 동방 박사를 베들레헴을 기준으로 동쪽에서 왔다고 묘사한 것을 근거로 그들이 이방인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유대 동쪽에서부터 유럽 지역까지 폭넓게 흩어져 살고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참고, Jewish War 2:398; 7:43). 이것은 동방 박사가 유대 땅 밖 동쪽에서 왔다고 해서 그들을 인종학적으로 반드시 이방인으로 볼 수는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게 만들었다.마태는 ‘동방으로부터’(avpo. avnatolw/n)라는 방향을 제시한 전치사 구를 사용했지만, 동방 박사가 온 곳을 알 수 있는 명확한 지명은 언급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마태가 언급한 동쪽을 바벨론, 아라비아, 이집트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동쪽은 아랍 유목민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됐는데, 그들은 그두라와 하갈의 후손으로서 팔레스타인 동쪽에 살고 있었다. 따라서 구약 시대 동쪽은 시리아-아라비아 지역을 지칭한다. 초대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신약 시대 역시 동쪽을 시리아-아라비아 지역으로 지칭했다. 이것은 마태가 사용한 ‘동쪽’ 이라는 단어는 정확한 지
부사역자에게는 때로 담임목사(당회장)를 수행해서 외부에 나갈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필자의 경험을 되짚어 수행원이 지켜야할 몇 가지 상식을 정리해 본다. 1) 목적지 파악 : 담임목사나 내빈을 수행해서 외부 기관이나 단체를 방문 할 일이 생기면 수행 담당자는 웹사이트를 검색하거나 직접 문의해서 목적지와 오가는 도로를 조사해 둬야 한다. 아무 준비 없이 길을 떠나 목적지 부근에 가서, “어디로 가야 하지요?”하고 묻는 것은 점수로 치면 낙제점이다. 2) 주차장 확인 : 규모가 큰 집회에 갈 경우 주최 측 영접 담당자에게 차량 번호와 도착 예정시간 등을 알리고 차를 세울 주차장을 알아둬야 한다.3) 운전 중 통화 : 운전 중 전화는 금해야 하지만 업무상 필요한 경우 이어폰으로 받고 손 수신은 삼가야 한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로 전화기를 들고 자기 집 뒷마당에서 하듯 큰 소리로 통화하고 너털웃음을 웃어대면 누구든 두 번 다시 그에게 운전을 맡기거나 동행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4) 도착 후에 주의 할 일 : 목적지에 도착하면 모시고 온 분의 신분을 밝히고(필요시)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한다. 이 때 수행원이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임의로 자리를
우리 성도들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만, 목회자인 내게 주일은 참으로 기쁘고 행복한 날이다. 이보다 더 좋은 날은 없다. 정말 육감(六感)이 모두 만족하는 날이다. 육신의 고단함마저 영혼의 기쁨이 죄다 이겨버리는 날이다. 우선 주일은 ‘눈’이 즐거워 좋다. 오늘도 어디서들 그렇게 몰려오시는지, 늘 보는 모습이지만 또 신기하고 또 재밌다. 어느 새 예배당을 꽉 메운 성도들, 하나님 앞에 나오는 걸음이라고 평소보다 더 잘 차려입고 나온 성도들, 그들 손에 들려진 성경찬송, 그들의 경건한 기도, 그들의 초롱한 눈망울을 바라보노라면 그 어느 화려한 무대에 서있는 가수나 배우들의 기쁨이라도 이에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행복한 주일이다.또한 ‘귀’도 즐겁다. 오늘도 여전히 은혜롭고 아름다운 성가대와 찬양단의 찬양소리, 우렁찬 회중의 찬송소리가 교회당 담장을 넘는다. 흡사 교회 앞을 지나는 행인들의 마음까지 흔들 정도다. 물론 그 소리는 하나님의 귀에도 영광이 되리라. 그런가하면 교회학교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선생님들이 말씀 가르치는 소리, 아이들이 따라하는 소리에도 영적생동감이 넘친다. 게다가 말씀의 한 문장 한 문장마다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들의 ‘아멘’소
초록이 논문은 마태복음의 동방 박사 경배 서사가 이방인을 마태공동체 구성원으로 수용하려는 신학적 목적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규명하는 시도를 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위해 동방 박사 경배 서사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를 비평적 관점에서 새롭게 평가하고, 마태복음에 언급된 경배의 유형도 분석했다. 즉 마태복음에 묘사된 동방 박사는 이방인이라는 학설에, 본 단락의 서사 구조 분석을 확장 정리했고 동방 박사가 행한 경배의 유형에 담긴 신학적 의도를 고찰했다. 이 주장은 세 가지 관점에서 증명됐다. 첫째, 동방 박사가 인종학적으로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를 증명했다. 동방 박사의 이방인 정체성은 본 논문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둘째, 마태복음 1~2장이 이방인 수용을 위한 서사 플롯으로 구성됐음을 전제로, 마태는 이 단락에 이방인 수용의 당위성을 직간접적으로 배열시켰고, 예수 탄생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대립적 반응을 통해 이방인 수용의 필요성을 더욱 심화시켰음을 관찰했다. 이러한 관찰은 마태복음 1~2장의 서사 구조가 이방인 동방 박사 경배를 통해 이방인 수용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돼야 함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에 나타난 다양한 경배 유형 분석을 통해 동방
한 부자(富者)가 여행 중에 어떤 수행자(修行者)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집안에는 헌 옷가지와 밥을 지을 부엌 도구 몇 가지와 그릇 몇 개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집안을 둘러본 부자가 딱하다는 듯이 수행자에게 말했다. “집안에 살림도구가 아무 것도 없군요. 불편해서 어떻게…?”부자의 말을 들은 수행자가 대답했다.“나는 여행 중이니까요.”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누구나 꼭 필요한 것만을 챙겨 간다. 수행자는 인생이란 존재를 나그네에 비교해서 사람은 누구나 여행자라는 의미로 말한 것인데 부자가 그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 인간은 세상이라는 여객선에 표를 끊어 승선한 승객이다. 언제인가는 주어진 여행을 마치고 하선할 것이며, 그 때는 예언의 말씀대로 영혼은 그 떠나온 곳으로, 육체는 ‘흙의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십여 년 쯤 전에 어떤 일로 남미 몇 나라를 단체여행한 일이 있었다. 일행 중에는 수집에 열정을 가진 이들이 있어서 그들의 편의를 보아주다가 버스를 놓치기도 하고 여러 시간동안 공항 세관에 볼모로 잡힌 일도 있었다. 취미 생활은 보람된 것이지만 모으기는 젊을 때 시작해서 중년에는 모은 것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노년에는 취미든 무엇이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 인간에게 자기 자신과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성품]”을 주셨기 때문에(롬1:19) 인간은 피조물 중 유일하게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다.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 인간에게 자신과 자신의 뜻을 나타내셨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섭리 가운데서 친히 수행하시거나 일어났던 사건들 즉, 창조, 타락, 홍수와 노아 방주, 아브라함과 모세를 부르심, 출애굽, 예언자 시대,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 등등의 역사적 사건 속에 나타내셨다.그런데, 이러한 사건의 참 뜻은 입에서 입을 통해 구전(口傳) 되는 과정에서 왜곡되기 쉬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사람들에게 감동(영감)을 주셔서 사건들을 기록하게 하셨으니 그것이 곧 성경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온전히 기록된 하나님의 책이다. 종결된 성서계시성서계시는 사도 요한의 계시록을 끝으로 완성 되었다. 요한은,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얼마 전 일반 국민들의 모범이 돼야 할 서울시의회 모 의원이 살인교사를 했다는 혐의로 인해 온 나라가 큰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피의자는 자신의 오랜 친구에게 재력가 송모씨를 살해하도록 지속적으로 사주했고, 살인사건의 정범인 그의 친구는 오랜 세월 동안 심리적인 압박과 갈등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다. 형법 제250조에서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형법 제31조에서는 “타인을 교사하여 죄를 범하게 한 자는 죄를 실행한자와 동일한 형으로 처벌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살인교사 역시 살인죄와 같이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중죄이다. 어떤 면에서는 살인교사가 더 죄질이 나쁘다.교사범(敎唆犯)이란 타인에게 범죄를 결의하여 실행케 한 자를 말한다. 교사범이 성립하려면 교사자의 교사행위와 정범의 실행행위가 있어야 한다. 책임능력이 없는 소년이나 광인(狂人)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주어 범행을 하게 한 때에는 간접정범이 되는 대신 교사범이 되지 않는다. 교사범의 성립요건으로서는, 먼저 주관적 요건으로서 자기의 행위에 의하여 타인에게 어떤 범죄를 실행하도록 결의시켜 그 자에게 그
세계에서 가장 자연경관이 뛰어난 나라 스위스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까지 된 데에는 꼭 알아둬야 할 슬픈 역사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로맨틱한 호반의 도시 루체른의 작은 언덕 바위산에 새겨진 “빈사(瀕死)의 사자상(獅子像)”에 얽힌 스토리다.말 그대로 이는 “용맹한 사자가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조각한 것인데, 1792년 8월 프랑스의 루이16세 왕가를 지키기 위해 무려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이 장렬하게 전사했음을 기린 것이다. 듣기만 해도 감동인 이 스토리를 직접 가서 본 감동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등에 창이 깊이 꽂힌 상황에도 그 프랑스왕가의 문장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모습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사실 당시의 프랑스왕 루이16세는 시민혁명으로 몰락할 왕가였다. 실제로 대세도 이미 기울었다. 그래서 왕궁을 지키던 근위병들조차 다 도망가 버렸다. 그래서 그는 모든 걸 체념하고 스위스 용병들에게도 “이만 철수하라” 명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끝까지 그 궁을 지킨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자기 나라 왕도 아닌 남의 나라 왕인데, 옳은 왕도 아닌데, 그저 돈 받고 적당히 자리만 지켜주면 되는 용병이었을 뿐인데, 왜 그들은 끝까지 그 아까운
능력이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은 기적적인 현상이나 사건을 일으키는 초자연적 힘을 말한다. 그러므로 능력이 나타나는 현장에선 항상 놀라움과 두려움이 야기되게 마련이다. 능력사역은 주님께서 지상사역을 펼치실 때 친히 사용하신바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과 능력을 나타내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도록 부르시는 은혜의 방편이었다.예수님은 주로 능력 행하심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효과적인 복음전도를 위한 여러가지 다양한 이론과 전략들이 소개되고 있는 데 특히 20세기 후반부에 널리 파급된 이적과 기사 그리고 축사와 치유사역 등 능력사역은 복음을 전파하는 영적 전투가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는 복음전도의 최전선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능력사역은 현대목회 사역 현장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으며 능력전도 또한 교회성장 분야에서 중요한 주제로 여겨지고 있다. 능력사역의 중심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윔버(John Wimber)는 능력전도(power evangelism)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능력전도라는 말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이성적인 방식만이 아니라 이성을 초월하는 방식을 통해서도 복음
교단 연차총회를 앞뒤로 해서 회의 참석에 대한 대의원들의 태도를 말하려다 보니, 처음으로, 내가 마치 이 칼럼을 통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아무에게나 가르침을 주려는 것으로 비쳐지지 않나하고 염려됐다. 이 칼럼은 필자가 평소에 느껴온 것을 세상, 특히 젊은 목회자들에게 외치는 것일 뿐 특정 단체나 개인을 지목해서 말하는 것이 아님은 독자 여러분이 알고 있을 것이다. 가을이 되면 모든 교단이 연이어 연차 총회를 개최한다. 옵서버 신분으로 다른 교단 총회에 참석해본 경험에 의하면 교파 간에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점은 회의에 참석하는 대의원의 수가 등록회원 수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노회나 지방회에서 대의원(총대)을 선출해서 총회에 파송하는 교단들은 참석률이 좋았다는 점이다.대의원은, 교회로부터 파송된 위원 신분이므로 첫 회기부터 마지막 회기까지 성실하게 참석해서 의견을 개진하고 투표권을 행사하고 교회에 돌아가서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등록 하고 이름표와 자료를 챙겨서 곧장 골프장으로 가는 대의원, 단체관광을 나가거나 때도 아닌데 음식타령을 하며 삼삼오오 관광지와 유명식당을 찾아 나가는 대의원들이 부지기수이다.회의장에서는
말세상에 태어나서 고통이나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백 여덟 가지 고통 중에서 세상을 산다고 말한다. 그 중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피할 수 있을듯하면서도 피하기 어려운 고통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말로 인한 고통이다. 참소하는 말필자가 미국 연구유학을 마칠 즈음 평소에 다정했던 그 대학 교직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외면하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그들이 내가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남아서 목회하기로 했다는 헛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사역할 복음적 일꾼을 양육하려고 장학금과 온갖 편의를 다 제공한 대학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실망스러웠을 것이다.잠언은 참소하는 사람을, “칼로 찌르는 것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라 했고 우리 사자성어에도 촌철살인(寸鐵殺人)이란 말이 있거니와 지어낸 말보다 무서운 전염병은 없을 것이다. 참소하는 사람의 입은 터진 아궁이 같아서 태산으로도 막을 수 없다. 목회하면서 이런 사람을 만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일이다. 무례한 말 국가적으로는 다른 나라 정상과 기밀을 전재로 회담한 내용을 발설해서
필자가 어린 시절에는 의사가 외출할 때는 언제나 왕진가방을 들고 다녔다. 그것은 목회자가 항상 성경찬송을 지참하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일 것이다. 의사는 언제 어디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환자를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며, 목사는 상담을 하거나 말씀 전할 것을 대비해야하기 때문일 것이다.필자가 다닌 미국의 신학교(대학원대학교)에서는 교수는 물론 전교생이 넥타이를 매고 등교해야 하고 캠퍼스에서는 반바지와 청바지 및 운동화 착용까지도 금했다. 그것은 대학원 학생부터는 목회자로서의 품위를 유지해야하고 외출 시에는 언제 어디서든 예배를 인도 하거나 의식(儀式)을 집행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군인은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다니며 기자는 수첩을 가지고 다니고 사진가는 자나 깨나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교회가 아무리 흔하고 목사의 수자가 아무리 많다 해도 목사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자나 깨나 경성(警省)하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아닌가. 차제에, 목회학에서 지적하는 평가항목에 곁들여서 자신의 목회 사역을 한번 평가해보는 것이 어떨까.목회 중간 평가1) 교회가 왜 나를 초청했으며 교회는 내게 무엇을 기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