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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부부도 서로 이해 못하는 시대이다.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그대 있음에 / 내 맘에 자라거늘. / ,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 /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 나를 불러 손잡게 해(김남조의 시, ‘그대 있음에’)

 

우리는 얼마나 남의 근심을 위로하고 남의 고독과 아픔에 동참하고 있는가? 에리히 프롬은 남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의 첫걸음이라고 했다. ‘이해하다는 영어 단어가 ‘understand’ 아닌가! 그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 밑에 서서 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 그래야,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의 절실한 사정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눈물 나도록 고마웠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모두가 한결같이 자기를 이해해 준 사람이라고 말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 인생의 험한 고비를 넘을 때, 찾아와서 위로해 주고, 이해한다고 손을 잡아주고, 함께 울어준 사람, 그 사람이 가장 고마운 사람인 것을.

 

우리는 얼마나 내 주변 사람을 이해하고 사는가?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 내 친구, 그리고 나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얼마나 이해하고 위로하며 사는가? 왜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마음의 문을 열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지 않는가?

 

한평생 가르친 서강 대학 강단을 내려오면서 노교수님이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제자 장영희 교수에게 남긴 글이다.

 

내가 이제야 깨닫는 것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면 기적은 정말 일어난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숨길 수 없다는 것,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교실은 노인의 발치라는 것, ‘하룻밤 새 성공은 보통 15년 걸린다는 것, 어렸을 때 여름날 밤 아버지와 함께 동네를 걷던 추억은 일생의 지주가 된다는 것, 삶은 두루마리 화장지 같아서 끝으로 갈수록 더욱 빨리 사라진다는 것, 돈으로 인간의 품격을 살 수 없다는 것, 삶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매일매일 일어나는 작은 일들 때문이라는 것 , 하나님도 여러 날 걸릴 일을 우리는 하루 만에 하려 든다는 것,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단 한번이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한평생 한이 된다는 것, 우리 모두는 다 산꼭대기에 살고 싶어 하지만, 행복은 그 산을 올라갈 때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모든 진리를, 삶을 다 살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면 너무나 쉽고 간단한데, 진정한 삶은 늘 해답이 뻔한데, 왜 우리는 그렇게 복잡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일까?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보면서 혹시 후회하는 일은 없는가? 혹시 용서하지 못한 일은 없는가? 용서 받아야 할 일은 없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버려도 나는 결단코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맹세하더니,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다. 한 소녀가 말한다. “당신도 갈릴리의 예수와 함께 있었다.”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다른 하녀가 말한다.

 

이 자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 베드로가 또 맹세하고 부인한다. “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조금 뒤에 또 한 무리가 말한다. “너도 확실히 그들과 한 패라.” 그 때에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그 때 수탉이 울었다.

 

베드로는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는 밖에 나가 통곡하며 울었다.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베드로를 용서하신다. 세 번이나 맹세하고 저주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물으신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신 후 그를 용서하시고 다시 제자로 받아들여 사명을 주시고 예수님을 따르게 하셨다.

 

아직도 용서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속 썩이는 남편인가? 자존심 상하게 하는 아내인가? 애먹이는 자식인가? 아니면 말 못할 상처를 준 형제자매인가? 내게 손해를 끼친 친구인가? 그도 저도 아니라면, 이렇게 밖에 살아가지 못하는 나 자신인가? 아니면 용서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 무엇이 나와 그 사람을 가로 막고 있는가? 그 무엇이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가?

 

결혼한 지 35년 된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중장비 사업을 해서 한 때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나 그의 밤(?)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자기를 버리고 시집을 갔다고 들었다. 그 상처가 한이 되어 결혼 한 직후부터 33년 동안을 밤마다 술집과 노래방을 전전했다. 새벽에 집에 돌아와서는 소리 지르고 싸우고 가재도구를 부셨다.

 

아내는 아내대로 상처를 받아서 결혼 생활은 점점 피폐해져갔다. 그 동안 아내는 교회 집사로 또 전도사로 신앙을 붙들고 살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다가 3년 전에 우리 교회로 왔다. 남편은 17년 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사랑진 치유부흥회 때 하나님을 만났다. 구원을 받자 가정이 회복되더니 서로 용서하고 위로하고 매일 가정예배 드리고 교회 모든 예배와 모임에 남편이 참석한다. 가정이 천국으로 바뀐 것이다. 그렇게 용서하기 힘들었던 자기 자신을 용서한 것이다.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참 어렵다, 상처받은 나 자신을 용서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실 때 주님은 고통 속에 부르짖으셨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마디에서 어그러졌으며 내 심장은 밀초같이 되어 내장 한가운데서 녹았나이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내 턱에 붙었나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모진 고통, 극한의 십자가 위에서도 주님은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하셨다. 십자가상에서 하신 주님의 용서를 기억하자.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23:24)

 

예수님의 위대하심이 어디에 있는가? 그 누구의 실수와 허물도 이해하고 용서해 주시는데 있지 않는가? 그 누구의 슬픔과 고통도 다 이해하고 받아 주시는데 있지 않는가? 사랑의 또 다른 말은 용서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이다. 그 분의 십자가는 용서의 십자가이다. 용서 못할 일이 없고 용서 못할 사람이 없다. 누구든지, 어떤 일이든지.요즘 우리 교단도 신학교도 말들이 많다. 이런 말이 있다. 이해하면 친구 되고 오해하면 원수 된다. 그저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살면 좋겠다.

 

김현일 목사 / 사랑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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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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