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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상실이 부른 참패(삼상4:1~22)

이희우 목사의 사무엘서 여행-5


말씀이 희귀하던 시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나타나셨고, 사무엘은 그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 전파했다.

성경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라고 했고 (3:20), 본문 1절에서는 사무엘의 말이 온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라고 했다.

 

단은 이스라엘의 최북단 도시이고, 브엘세바는 최남단 도시이다.

마치 한반도 전체를 의미하는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것과 같은 표현인데 지금 같은 미디어 시대도 아니고, 인터넷이 설치된 것도 아닌데 이스라엘 전체가 다 알았다는 것은 좀 과장된 표현 아닐까?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 영향을 미칠 선지자가 되었다는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런데 말씀은 갑자기 블레셋과의 전쟁 이야기로 바뀐다. 그것도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은 전쟁이 두 번이나 벌어진다. 너무 명암(明暗) 대비가 뚜렷한 전개라서 좀 당황스러울 정도다.

 

다만 전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과 엘리 시대에서 사무엘 시대로 바뀌는 과도기(過渡期)였기에 엘리 시대의 결말을 정리한 것으로 본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한 엘리 가문의 영적 타락, 그 결말이 너무 참담하다.

은혜 상실이 얼마나 비참하고 절망적일수 있는지를 보며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기를 바란다.

 

전쟁에서 참패(慘敗)하다

과거 사사시대 삼손을 떠오르게 하는 민족인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간에 전쟁이 잦았 다. 에벤에셀 곁에 진을 쳤던 이스라엘과 아벡에 진을 쳤던 블레셋 사이에 그 날도 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 량이라”(2). 왕정(王政)이라는 통일된 체계도 없고 철기 문명도 빈약했던 이스 라엘은 참패했고, 4000명 가량의 군사가 죽임을 당했다.

 

충격에 빠진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 언 약궤 동원이라는 새로운 전략으로 반전을 노렸지만 두 번째 전쟁에서 더 큰 패배를 당하고 만다.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육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10), 무려 3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 무참히 패배한 것이다. 블레셋은 엘리와 사무엘 시대 이스라엘의 최대의 적()이었다. 지금의 팔레스 인(아랍계) 사람들과는 다른 블레셋 족속이라 인종적으로는 관련이 없지만 블레셋은 팔레스틴이란 지명의 원조가 되는 부족이다.

 

그들은 지금의 크레타, 히브리어로 갑돌이란 곳에서 이동한 민족, 팔레스틴 남서쪽 해안가에 정착하고, 일찍부터 철기 문명이 발달하여 철기로 만든 무기로 무장한 강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사울 왕을 무너뜨리기까지는 했지만 다윗 시대에는 결정적으로 정복당한 후 도시국가 형태로 남아 이스라엘을 괴롭혔을 뿐인데 이번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패했다. 블레셋의 철기로 만든 무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은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라고 했다(삼상17:47).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 패배의 원인은 한 마디로 은혜 상실이다. 이스라엘은 엘리 가문, 즉 영적 지도자들부터 은혜를 떠났기 때문에 참패한 것이다.

 

그 블레셋은 오늘 우리 앞에도 있을 수 있다. 우리를 위축되게 만드는 세력이 블레셋이다. 나를 괴롭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내 인생의 장애물,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부르짖게 만드는 문제나 존재가 되기도 한다.

질병이란 블레셋과 싸우고,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고 있을 지라도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 최고의 백신이 예수님이며, 극복의 최고 비법이 은혜 안에 거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언약궤를 빼앗기다

블레셋과의 첫 번째 전쟁에서 패배한 후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3). 그들은 실패의 원인을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주권적으로 결정하신다는 신앙이 투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책임 전가 아닌가?

장로들은 실로 성소에 있는 언약궤를 30쯤 떨어진 아벡 전쟁터로 가져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언약궤, 법궤 또는 증거궤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안에 세 가지 보물이 담겼다.

 

첫째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생명의 떡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둘째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생명의 지팡이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의미다. 셋째는 언약의 돌비, 어떻게 살지 삶의 방향과 삶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새긴 돌판이다.

언약궤는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었다.

언약궤의 뚜껑에 해당하는 곳을 속죄소라 부르는데 속죄소는 두 그룹, 곧 천사들이 감싸고 있다. 이곳은 하나님의 보좌라는 의미로 시은좌(施恩座)라고도 한다. 그래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상징이거나 하나님 그 자체이다. 그런데 장로들이 이 언약궤를 전쟁터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특단의 조치였다.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오자 온 이스라엘은 환호성을 질렀고, 블레셋은 두려워했다. 고대 사회에서의 전쟁이 신들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장로들의 이 전략에는 문제가 있다. 미신에 사로잡힌 것과 다르지 않고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민수기에 보면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10:35~36), 언약궤가 일어서면 하나님이 일어서는 것이고, 언약 궤가 가면 하나님도 가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는 의미의 쿰마 야훼를 외치고,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라는 의미의 슈바 야훼를 외쳤다. ‘쿰마 야훼’ ‘슈바 야훼는 선지자나 경건한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부르짖음이었다.

언약궤는 승리의 상징, 그런데 언약궤를 모셔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참패한다. 그리고 언약궤마저 빼앗긴다. 하나님은 이용당하실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말씀에 순종할 때만 유효하다. 그런데 말씀에 순종하지는 않으면서 언약궤를 이용하려고만 하는 이스 라엘, 참패하고 언약궤마저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은혜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영광이 떠나다

전쟁에서 참패하고 언약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한다(11). 실로 성소에서 전쟁의 결과를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엘리는 베냐민 사람이 전해 준 비보(悲報) 를 듣다가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고,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도 아이를 낳다가 충격으로 죽는다.

그 며느리가 죽어가면서 했던 말이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였고, 그때 지어준 아이의 이름이 이가봇이었다. ‘영광 (카봇)은 어디 있는가?’라는 의미다.

 

이스라엘이 패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기 때문에, 엘리 가문이 완전히 망했기 때문에 한 말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것은 은혜를 상실한 것이다.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이 아니라 자기 가문의 영광이 떠난 것이다.

그 며느리는 자기 욕심이나 생각이 성취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영광 상실로 착각했던 것 같다.

 

세상 영광이나 실패를 하나님의 영광이나 실패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볼 때는 실패처럼 보이는 것이 오히려 성공이고 하나님의 영광일 수 있다. 신앙이란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기뻐하는 것이다.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 있는가? 은혜 상실로 인한 엘리 며느리의 마지막 말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을 통해 계속 들려지고 있다. 또 블레셋의 아스돗에서 가드에서 에그론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는 승리의 상징답게 우상들과 싸우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디에선가 지금도 빛나고 있다.

 

이희우 목사 / 신기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