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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1)

키르케고르 산책-2
이창우 목사
카리스아카데미

용감한 전사가 대담하게 앞으로 나가면서 적의 모든 화살을 가로막을 때, 또한 뒤따라오는 그의 병사들을 보호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 병사들이 그를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랑스러운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남편에게 그토록 닮고 싶었던 인생의 아름다운 본보기를 찾았을 때, 그리하여 그를 의지하면서 그의 옆을 걷고 있다면, 우리는 이 아내가 남편을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대담한 스승이 조롱으로 에워싸이고 질투로 핍박받으면서 조용하게 그의 자리에 서 있을 때, 모든 공격이 오직 스승에게만 향하고 있고 그를 지지하는 제자에게 향하고 있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이 제자들이 그를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암탉이 적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암탉의 날개를 펴 뒤에 따라오는 병아리들을 덮고 있을 때, 우리는 이 병아리들이 암탉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관계는 바뀌어야 합니다. 용감한 전사는 그의 병사가 진실로 그를 따르는지 분명히 할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서야 합니다. 모든 화살이 병사의 가슴을 겨냥할 때, 실제로 나타난 위험에서 그가 그를 따르는지, 혹은 병사가 용감한 자를 잃었기 때문에 그가 비겁하게 위험에서 등을 돌려 용기를 잃었는지 명확히 할 수 있도록 용감한 전사는 옆으로 비켜서야 합니다.


숭고한 남편, 그는 비통해하는 과부가 그의 지원이 없이도 그를 따르고 있는지 명확히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녀를 떠나야만 하고 그녀 옆으로 비켜서야만 합니다. 혹은 그의 지원을 빼앗기고도, 진실로 그녀가 그 본보기를 포기하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 숭고한 남편은 떠나야만 합니다.


대담한 스승은 자신을 숨기거나 무덤 속에 자신이 숨겨져야 합니다. 그때 제자가 그를 따르고 있는지, 조롱으로 에워싸인 그 장소에서, 질투로 핍박받는 그 장소에서 그가 견디고 있는지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혹은 스승이 죽음으로 명예롭게 그 장소를 떠났지만 부끄럽게도 제자는 그의 평생에 그 장소를 버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스승은 숨겨져야 합니다. 


그때,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은 당신이 따르고 있는 자가 걸었던 같은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스승이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앞에 걷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지를 명확히 하기 전에, 그분이 떠나시고 죽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후 수많은 세기가 흘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여전히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거의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아이 옆에 걸으셨던 시기가 있었고 또한 아이 앞에 먼저 갔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감각적인 눈의 상상력으로부터 사라진 때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제 어른이 결정의 진지함 가운데 그를 따르는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이가 엄마의 옷을 잡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을 때, 그래서 아이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아장아장 걸을 때, 아이는 엄마가 걷는 같은 길을 간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먼저 아이는 엄마가 걸었던 같은 길을 걸을 수 있기 전에 홀로, 혼자 힘으로 걷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가 혼자 걷는 법을 배웠을 때, 엄마는 무엇을 할까요? 


엄마는 자신을 눈에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가 홀로 걸을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야 합니다. 그녀의 상냥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 아마도 아이가 혼자 힘으로 걷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바로 그때 상냥함은 오히려 더욱 증가한다는 것, 우리는 이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아이의 머리로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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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의 유산을 넘어 다시 희망의 깃발을 듭시다!
존경하는 침례교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전국의 3500여 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저는 교단의 내일을 가늠할 중요한 길목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에게 미래를 열어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30년 전 우리 선배들이 눈물로 심었던 그 거룩한 씨앗을 기억해야 합니다. 30년 전, 우리에게는 ‘거룩한 야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3000교회 100만 성도 운동’이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외쳤던 구호는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침례교회가 한국 교회의 희망이 되겠다”는 당찬 선언이었으며, 복음의 능력으로 시대를 돌파하겠다는 영적 결기였습니다. 그 뜨거운 구령의 열정이 있었기에 우리 교단은 한국 교회사에 부흥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 열정의 거룩한 불씨는 꺼지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는 104차 총회에서 ‘부흥협력단’이라는 아름다운 동역의 저력을 통해, 개교회주의를 넘어 ‘함께하는 부흥 목회’의 가치를 배웠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하며 우리는 ‘상생’이라는 침례교만의 독특한 저력을 확인했습니다.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