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을 오로지 사래만의 작품이라고 해도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래가 제안하기 이전에 아브람에게도 비슷한 마음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정 안되면 후처를 들여서라도 자식을 봐야 할까?’라는 마음이 아브람에게 없었을까요? 아브람은 15장 4절에서 하나님께 받은 약속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겁니다. 훗날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받는다는 약속이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래가 낳은 아들이 상속자가 된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결국에는 아브람을 통해 아들이 나와야 하는데, 아이를 낳아야 할 사래에게 문제가 있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 사래가 제안한 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하갈에게서 ‘아브람 몸에서 날 자’가 태어날 수 있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전보다 훨씬 높은 확률로 아들을 얻는 선택일 수 있으며 하나님 말씀에 걸리는 부분도 없습니다. 아브람이 사래 말에 못 이기는 척하며 따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 말씀을 몰랐다면 왜곡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을 들어 아는 사람이어야 말씀을 따를 수도, 어길 수도 있죠.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켰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말씀하신 의도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들 생각대로라면 하나님은 가족도 도덕도 무시한 채 오로지 아브람에게 아들만 생기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됩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겠죠. 약속을 받았는데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서 자기 딴에는 어떻게든 해보려는 조급함이 만들어낸 어처구니없는 결과였을 뿐입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창 16:4)
사래는 하갈이 임신하기를 바랐을까요, 아니면 하갈도 임신하지 못하길 바랐을까요? 두 마음이 모두 있었을 겁니다. 하갈이 임신한다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상속자를 얻게 되고 자신이 제안한 일이 그대로 성취됐으니 태어난 아이와 관련된 문제에서 큰 발언권을 가지게 되겠죠. 자식을 낳지 못한다면 사래도 아들이 없는 책임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두 여자 모두 실패했으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거나 아브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게 되죠. 서로 다른 두 마음이 잔뜩 뒤얽힌 상황에서 하갈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됐고, 아브람, 사래, 하갈은 극적인 드라마에 휘말리게 됩니다. 아브람은 임신 소식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됐다며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론 잘한 일인지 의구심에 빠졌을 겁니다. 사래는 겉으로는 환영하면서도 속으로는 무너지고 있었죠. ‘역시 내가 문제였어’라는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을 테니까요. 하갈이 임신한 아이가 정말로 아들이라면 커서 아브람의 상속자가 될 것이고 그때 자신과 하갈의 위치가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가장 심각한 상황에 빠진 사람은 하갈입니다. 이제껏 살아온 삶이 극적으로 바뀌게 됐으니까요. 애굽에서 태어나 아브람 집안의 시녀가 되어 살다가 이제는 그의 아이를 낳아 모든 재산을 상속받을 자의 어머니가 될 기회를 잡은 겁니다. 태어날 아이가 반드시 아들이어야 하고 무사히 자라 성인이 됐을 때 완성되는 이야기이기는 해도 그렇게만 된다면 인생 역전도 이런 인생 역전이 없죠. 임신만으로도 이미 많은 변화를 체험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자식이 없던 집안에서 아이를 가졌으니 마님 대우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가 됐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임신 후 하갈이 사래를 멸시했다는 창세기 기록은 이런 면에서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불임에 관한 생각은 아브람 시대와 지금 시대 사이에 차이가 큽니다. 의학이 발달하고 개인의 존엄성이 널리 존중받는 현대에는 불임에 대해서도 여러 방향으로 접근합니다. 남성 혹은 여성에게 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한지, 가족의 형편은 어떠한지, 자녀에 대한 부부의 생각이 어떤지에 따라 원인과 해법이 다를 수 있다고 여기죠. 아브람이 살던 시대에는 의학다운 의학이 없었으니 불임의 원인을 의학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생명은 신이 주는 선물이었고 여성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는 신에게 버림받아 출산이 막힌 것이라고 생각했죠. 오랜 세월 사래가 고통받았던 까닭도 같았습니다. 그저 아이를 낳지 못했을 뿐인데 하나님께 버림받은 여자라고 손가락질받았을 테니까요. 하갈의 임신은 사래가 하나님께 버림받았음을 입증하는 한편 하갈을 축복받은 사람으로 인정할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래를 보는 하갈의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런 변화를 순순히 받아들일 사래가 아니었지만요.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창 16:5)
사래는 하갈을 제쳐놓고 아브람에게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떳떳하다는 주장도 잊지 않았죠. 하갈을 비난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를 선택한 사람이 자신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실패한 임신을 하갈이 했다는 사실에 대한 열등감이 함께 작용했을 겁니다. 아브람이 내렸어야 할 결정을 자신이 했을 뿐인데, 결국 가장 큰 피해자가 된 상황에서 아브람과 하나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요? 임신을 못해 하나님께 버림받은 여자로 그 오랜 세월을 살았는데, 자기를 섬기던 시녀가 단숨에 임신하다니 정말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이런 야속한 마음이 사래에게 또 다른 결심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유수영 목사
제주함께하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