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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길, 은혜의 삶

세속적 성공 서사를 전복시킨 90년의 순종 기록
은퇴 없는 부르심을 택한 이상훈 선교사의 인생 고백록

오늘 우리가 당면한 난제 중 하나는 불과 얼마 전까지 공상과학에서나 꿈꾸던 ‘백세시대’를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소위 ‘은퇴(Retirement)’라는 문제다. 은퇴는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흔히 정년 이후, 안락한 휴식의 기간을 누리는 시기로 이해된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은퇴 후 휴식과 안정을 온전히 누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며, 삶이 녹록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명료하고 뜨거운 답변을 한 사람의 인생으로 보여준다.


이상훈 선교사(장로)는 65세의 은퇴 시점에 안락한 미국 생활을 포기하고, 험난한 선교지인 중국 연변으로 ‘순종’하며 나아간다. 시골 유교 집안의 한 소년은 교수와 미국 회계사가 되고, 다시 중국 북방에서 공산권 청년들을 품고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고 분단된 조국의 국경을 넘나드는 선교사가 된다. 그는 90년의 인생 여정 동안 일관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헌신하며 복음적 삶을 산다. 그래서 이 자서전은 노년을 바라보는 시니어세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직업과 신앙을 통합하고자 하는 모든 평신도에게 윤리적 모범을 제시한다.


저자의 인생 전반의 삶은 전문성과 소명이 만나는 ‘평신도 사역자’라는 정체성을 가장 탁월하게 보여준다. 그는 워싱턴에서 성공적인 공인회계사(CPA)로 활동했으나, 그 전문성과 재능을 세상의 논리가 아닌 교회의 필요에 온전히 바쳤다. 워싱턴 지구촌교회의 건축, 재정 관리, 그리고 한인 기독실업인회(CBMC) 창립을 주도한 것은 단순한 자원봉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자녀로 택함받고 하나님 나라 비전에 붙들린 모든 성도에게 요청되는 ‘성육신적 실천’의 결과물이다. 가장 세속적인 영역인 자본과 경영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심고, 복음을 심는 ‘직업 선교’의 모범이 된 것이다. 저자는 “회계사인가, 사역자인가”라는 이분법적 질문을 무너뜨리고, “회계사이면서 동시에 사역자”인 그리스도인의 통전적 정체성을 확립하며, 모든 크리스천에게 삶의 모든 영역이 ‘거룩한 사역지’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 책이 던지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후반부에 나온다. 바로 ‘노년의 윤리적 무게’이다. 남들이 편안함을 택하는 65세 이후, 저자는 오직 영혼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중국 연변과 북한을 향한다. 그는 연변과기대 교수로 16년간 봉사하며, 북한 동포 돕기 KASM을 이끌었고, 평양과학기술대학(PUST) 설립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시니어 선교사의 삶은 ‘은혜’라는 단어로만 설명 가능한 세상 일반의 은퇴와 노후의 관습을 초월하는 순종의 산물이다. 세월과 나이에 굴하지 않고 가장 험난한 선교지에서 헌신하는 그의 모습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시효가 없다”는 성경의 진리를 오늘의 언어로 재해석해 주고 있는 듯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기쁨이야말로 가장 궁극적이고 영원한 노년의 특권임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은혜의 길, 은혜의 삶’은 한 신앙인이 시대와 역경을 이겨낸 귀한 기록이다. 다만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 경계해야 할 점은, 자칫 이를 단순한 저자의 영웅 서사로만 소비하는 것이다. 워낙 방대한 세월과 사역을 다루는 과정에서 개인의 내면적 갈등이나 고뇌가 다소 빠르게 지나가는 경향이 있어서 더욱 그렇다. 물론 실제로 저자가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신앙 여정을 걸어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들이 저자가 ‘순종’의 과정에서 겪었을 인간적인 고통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서사를 만날 수 있었다면, 더 깊은 울림과 도전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퇴’의 쉼표를 찍는 대신, ‘사명’이라는 가장 영광스러운 새 문장을 시작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이 책을 혼돈의 시대 속에서 자신의 삶을 복음의 ‘통로’로 만들고자 하는 모든 성도에게 필독서로 강력히 권한다. 신학을 하고도, 평신도 사역자로 평생을 순종과 섬김으로 헌신한 저자의 발자취는 특히 전임 목회자들을 성찰과 겸손으로 이끄는 하나의 푯대가 될 만하다.

박찬익 목사
교회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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