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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박한 멸망 - 1(창세기 18장 1~33절)

유수영 목사와 함께하는 창세기 여행 38

헤브론의 아브라함은 평화로웠습니다. 롯과 갈라선 이후 재산은 꾸준히 불어났고, 이렇다 할 적의 위협도 없었죠. 유일한 혈육 이스마엘은 어느덧 청소년이 됐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집안사람이 할례를 받은 뒤로는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듯한 긍정적인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몸의 징표를 명하실 때는 분명 뜻하신 바가 있을 테니 자연스럽게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겠죠. 그 누구보다 아브라함 자신이 하나님의 증거를 간절히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8장에서 마침내 증거와 마주하게 됩니다만 아브라함 생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죠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창 18:1~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시간은 하루 중 햇살이 가장 뜨거운 대낮이었습니다. 하루 중 가장 밝을 때이기도 해서 상대 얼굴을 분간하기 좋은 시간이었죠. 뒤에는 이들이 하나님과 천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성경은 이들을 사람 셋이라고만 쓰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른 채 그저 지나가는 여행자 세 명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지체하지 않고 달려가 몸을 굽혀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면 평소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의 진짜 신분에 대해 아브라함이 완전히 깜깜한 상태는 아니었을 겁니다. 전에 한 번도 본 적 없었다는 점, 광야를 여행하는 다른 나 그네와는 달리 나귀와 시종같이 꼭 필요한 준비가 없다는 점, 초면인데도 정확하게 자신을 향해 왔다는 점에서 평범한 사람은 분명 아니었죠. 하나님이나 천사라고 느끼지는 못했어도 어딘지 모르게 특별하다는 생각 정도는 했을 겁니다. 어쩌면 17장에서 할례를 명하셨던 하나님께서 사람 모습으로 찾아오셨음을 감각적으로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님맞이는 달려가 몸을 굽히는 행동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발 씻을 물을 가져다드렸음은 물론, 사라에게 고운 가루를 반죽해 빵을 굽도록 했고 기름진 송아지를 그 자리에서 잡아 요리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식구를 동원해 엉긴 젖(아마도 치즈)과 우유까지 곁들인 음식을 대접하고는 그 옆에 모셔 선 채 시중을 들었죠. 이쯤 되면 분명 평범한 나그네 접대 수준을 넘어서는데, 아브라함에게 뭔가 짚이는 것이 없었다면 이토록 극진한 대접을 했을지 의문입니다. 손님은 이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습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창 18:10)


아브라함 아내의 이름과 부부가 오랜 시간 아이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 뿐만 아니라 일 년 후 아들을 낳으리라고 자신있게 예고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 외에 또 있을까요? 성경은 13절부터 이분을 정확하게 ‘여호와’라고 쓰고 있습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해도 어느 번역본을 보아도 아브라함이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상대가 하나님이심을 알아차렸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것도 모자라 음식을 대접한 최초의 인간이 되는 순간이었죠. 창세기는 이 장면에서 아브라함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주목합니다. 장막 뒤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사라입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


사라는 언제부터 웃었을까요?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을 듣기 전부터 이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서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비롯한 모든 식구에게 할례를 주고 그 자신도 할례를 받았던 때, 곧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때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창세기 17장에서부터 이미 웃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약속의 성취를 믿는 이들에게는 희망이 되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그저 헛웃음이 나오는 농담에 불과할 수 있죠.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웃었는데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한 후 에는 자기 몸에 할례를 행함으로써 마음과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반면 약속의 진짜 당사자였던 사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90세가 된 자기 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창 18:11). 아브라함과 온 식구가 할례를 받을 때도, 그날 이후 하나님 약속이 성취되리라고 굳건히 믿는 아브라함을 가까이 지켜볼 때도 사라는 한숨과 웃음을 섞어 내쉬곤 했을 겁니다. 집안사람 모두 내색은 안 해도 은근히 사라 몸에 하나님 증거가 나타나는지를 기대 가득한 눈으로 살폈을 텐데, 정작 본인에게는 아무런 징조도 없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뜻밖의 손님이 나타나자 호들갑 떠는 아브라함을 도와 음식을 대접했는데, 그들이 하나님 약속을 말하니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던 겁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평소 속마음은 절대 속일 수 없죠.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


믿음을 가지길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믿는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럴듯한 일이면 몰라도 상식에 비추어 불가능해 보일 때는 더더욱 그렇겠죠.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옳은지를 입증할 증거를 구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혹은 서로에게 확신을 주입하며 위안을 얻기도 하죠.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처럼 몸 어딘가에 징표를 새기기도 하고요.


이런 행동이 믿음을 지속시켜 줄까요? 징표나 증거를 구하는 행동은 주로 결과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아브라함 집안사람 모두가 날마다 사라의 배를 보면서 결과를 확인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작 이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라로서는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겁니다. 14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를 정확하게 알려 주고 계십니다. 믿기로 했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고, 그날이 되기 전에는 믿음의 결과가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기로 결단했다면 이제는 기다릴 때입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6~17)
 

유수영 목사
제주함께하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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