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는 대조적으로 로마가톨릭 교회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으로 인해 유럽 땅에서 잃어버린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등 해외를 향해 선교의 눈을 떴다. 16세기 중반 로마가톨릭 교회와 교황청은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의 일환으로 해외 선교에 박차를 가하였다. 전통적인 로마가톨릭 선교단체였던 프란시스칸 수도회(Franciscan Order)와 도미니칸 수도회(Dominican Order), 그리고 종교개혁기에 새로 생긴 예수회(Jesuits, Society of Jesus) 등이 서로 선의의 경쟁을 벌이며 교황청에 충성하였다. 그들은 무장을 한 정복자들(Conquistadores)과 함께 수도사 선교사들(Missionaries)을 파송하여 식민지 확보를 도모했을뿐 아니라 유럽 밖의 세계를 로마가톨릭화 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대형범선들을 소유하며 운행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과 같은 해양강국들이 급부상하여 교황청의 해외선교를 위한 동반자들이 되었다. 16세기 중반부터 교황청의 후원을 힘입어서 로마가톨릭 국가들에 의한 제국주의적 선교(Imperialistic Mission)가 이루어진 것이다.반면에, 프로테스탄트
이력서와 신문에 공고되는 학력기재에 정확하지 못한 것이 간혹 보인다. 청빙서류, 선거, 또는 취업을 위한 공적 문서로 학력을 제출할 경우,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으면 뜻밖의 화를 당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학력기재학력을 기록할 때 많이 쓰이는 수료(修了), 이수(履修), 연수(硏修)는 의미는 비슷하지만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다. 수료는 정해진 과정을 모두 마친 것을 강조하고, 이수는 과정을 마치되 학점을 따거나 요건을 충족한 것을 강조하며, 연수는 부분 또는 전 과정을 연구 또는 실습했다는 의미이다. 수료와 이수는 같은 의미로 사용해도 괜찮지만 연수는 정한 과정을 마친 것과는 무관하므로 의미가 다르다.이 세 말은 모두 아직 학위를 취득하지 못 했거나 학위와 무관한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졸업(卒業)’은 규정된 교과를 모두 마치고 공인된 자격 또는 학위를 취득했을 때 쓴다. 알다시피, 대학에는 학사에서 박사까지의 정규학위과정 외에 자격증 취득이 가능한 평생(사회)교육원 급의 여러 과정과 지도자양성대학원, 경영자대학원 등 비정규 연수과정이 있다. 대학에서 이수하는 과정은 정규 비정규나 학위 취득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중요한 경력이 되므로 학력이나 경력으
1) 정한 시간보다 회의가 조금 늦어지자 사회를 맡은 회장이 청중에게, “죄송합니다. 시간이 지연 되어서요” 하고 사죄한다. 2) 음식점 안주인이 차를 나르는 종업원과 가볍게 몸이 부딪히자, “죄송해요” 하고 말한다.3) 교통경찰이 과속차량을 길 한편으로 불러 세우고 운전자에게 다가가서, “사장님, 죄송합니다. 운전면허증을….” 하고 말한다. 4)경찰관이, 여자 친구의 얼굴에 염산을 뿌린 청년을 검거해 심문하면서, “왜 그러셨어요?”라고 묻는다.죄송(罪悚)하다는 말은 큰 잘못이나 결례를 해서 송구스럽다는 의미이므로 위의 예문들과는 맞지 않는다. 회의가 좀 늦어진 것이 사회자가 사죄 할 일인가? 회의의 성격에 따라 사과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일상적으로는, “시작이 늦어진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도가 맞을 것이다. 또 음식점 주인이 어린 종업원에게 무슨 “죄송”인가, “미안” 정도가 적절한 말이다. 교통경찰이 속도위반 차량을 불러 세우고 무슨 ‘사장님’이며, ‘죄송’인가? “귀하는 과속 운전을 했습니다. 면허증 제시 하세요” 해야 하며, 염산 투척 피의자에게는, “범행 이유가 무엇이오?” 하며 당당하게 심문해야 하는 것이다. 사죄, 사과, 미안의 정도를
최고의 전략가 아히도벨의 전략을 물리치고, 위장 잠입한 후새의 거짓전략을 수용함으로써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은 쿠데타에 실패하였다. 반란에 실패한 압살롬은 반란괴수로서의 책임을 죽음으로써 마감해야하는 극단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제 아무리 악한 행동을 했다 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아들인지라, 자식에 대한 인정을 과감하게 끊지 못한 다윗은, 요압을 비롯한 자신의 부하들에게 반란은 진압하되 압살롬을 죽이지는 말라고 명령했다.그런데 군사령관 요압의 생각은 다윗의 그것과 달랐다. 다윗왕의 말년을 불행하게 만들고 다윗왕국의 존립 자체를 위협한 모든 사건들의 진원지가 압살롬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를 살려두면 안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압살롬이 패전하여 도주하다가 풍성한 머리카락으로 인하여 나뭇가지에 걸려 대롱거릴 때 요압은 창으로 그의 심장을 찔러 죽였다. 아들의 죽음이 알려지자 다윗은“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는 비가로 울부짖으며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그의 울부짖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적당한 선에서 그쳐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의 울부짖음은 요압이 왕궁에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요
현대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나름 정의해 본다면“끝없는 경쟁의 시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야곱은 경쟁의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쌍둥이 형 에서와 치열하게 경쟁했으며 하물며 출산과정에서도 형 에서를 이기기 위해서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야곱”이 된 것입니다. 그는 성장 과정 가운데서도 자기 형을 속이고 아버지마저 속여서 축복을 가로채기까지 했습니다. 그 결과로 야곱은 형의 살해 위협을 피해 외갓집이 있는 밧단 아람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그는 경쟁하는 삶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습니다.그는 자기 장인과도 끊임없이 경쟁했습니다. 야곱은 경쟁하는 순간만큼은 인생 존재 가치를 느끼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참된 축복은 세상에서 끝없이 경쟁하는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 달려가는 사람이 될 때 참 복을 누리게 됩니다.첫째로, 누구나 생의 치열한 경쟁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누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까요? 삶의 경쟁에서 더 이상 치열할 수 없는 절박한 사람입니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24절) 누구에게도 기대할 수 없고 도
구신약 성경(Old Testament and New Testament)에는 연속성이 존재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구신약 성경 66권은 하나님 자신과 인간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뜻의 계시이다. 구신약 전체 계시의 주제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Agape) 혹은 구속(Redemption)이다.구약과 신약의 저자는 공히 하나님이시고, 그 주인공은 공히 예수 그리스도시다. 구약은 오실 예수에 대하여, 신약은 오신 예수와 다시 오실 예수에 대하여 묘사해 주고 있다.하나님께서는 장차 지상에 존재하게 될 교회를 염두에 두시고 그 교회를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통해 암시적으로 모형적으로 상징적으로 계시하셨다.그러나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불연속성과 차별성도 존재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은 너무나 획기적이어서, 인류의 역사는 BC(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와 AD(Anno Domini,“ 주님 이후”)로 구분되었다.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에는 “공의로운 해”(Sun of Righteousness, 말 4:2)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출 것이 예언되어 있다.예수 그리스도가
구속(救贖)과 구원(救援)1970년대 말에 각 교단이 사용하는 찬송가를 하나로 통합하는 큰 작업이 시작되어서 참여 교단에서 추천받은 인사들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선곡과 가사 수정작업에 들어갔다.그 때 제안된 의견들 가운데 가사에 많이 사용된‘구속’이란 말이 범죄 혐의자를‘구속(拘束)’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으므로 모두‘구원’으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아서 모두 고치지는 않았으나 실제로 여러 곳에서 ‘구속’이 ‘구원’으로 고쳐졌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구속하신 예수께서”하고 찬송하면서 “체포하신 예수께서”라고 생각하는 신자가 어디 있겠는가. 구속과 구원은 의미가 약간 다르다. 찬송가 뿐 아니라, 성경과 신학에서 무슨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구약성경에서(1) 이사야 63장 9절에는 구원(가알)과 구속(야솨)이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 대구(對句)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자기 앞의 사자(使者)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2) 호세아 13장 14절에서는 구속과 속량(贖良)이 같은 의미의 다른 낱말로 대구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파다)하며
어느덧 우리 교회가 창립 53주년을 맞고 보니, 새삼 내 인생과 함께 했던 ‘교회’에 대한 추억이 새롭다. 과연 ‘교회’는 내게 무엇이었던가? 어떤 의미였던가? 생각해보니 말할 것도 없이 교회는 내게 전부였다.난 교회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리고 어머니 품에 안길 수 있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유치원도 교회 유치원을 나왔다. 노래도 교회 어린이 합창단에서 배웠다. 이렇게 남 앞에 서서 말하는 재주를 갖게 된 것도 중고등부 시절, 교회가 기회를 줬기 때문이다. 학교를 다녀오면 난 늘 교회에 가서 놀았다. 교회에서 숙제도 하고 공부도 했다. 재밌는 노래와 율동과 놀이 역시 다 교회에서 배웠다. 물론 연극도 기타도 교회에서 배웠다. 친구도 교회에서 사귀었고, 청소년기 가슴 속 첫사랑도 교회 여학생이었다. 집안이 어려울 땐 교회에서 주는 쌀을 먹었고, 교회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학교도 다녔다. 여태껏 난 교회를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 가정형편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사 갔어야 할 상황에도 “교회 때문에 안된다”며 내가 나서서 강력히 반대했다. 교회가 좋았기 때문이다. 난 인생의 진로도 교회에서 정했다. 인생의 반려자도 교회에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소통의 부재와 단절로 인해서 아우성치며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어떻게 하면 소통을 원활하게 할까 라는 질문가운데서 수많은 전문가들이 그 해법을 찾기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과 사회, 국가와 세계가 소통되지 않는 인간의 문제들로 인해서 심각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소통을 회복하여 소통이 단절된 세상에 나가 세상 사람들에게 소통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소통은 기적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빠른 소통의 도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소통의 단절의 시대라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소통의 단절의 시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잠들어 있지 않은 이상 항상 누군가와 소통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적 없는 깊은 산속에서 까지도 누군가와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통의 기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소통의 홍수 가운데 살면서도 이것은 통신과학이 가져다준 결과일 뿐이라고
따라서 죄인인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심판석에서 “더 이상 죄인의 신분이 아니고 이제는 의인의 신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설명하면 칭의의 개념을 성화의 개념과는 무관한 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경험했던 과거적 구원의 사건으로만 이해했다는 점이다.그러나 이신칭의의 개념에는 법정적인 체계만이 아니라 “관계적인 체계”(Relational System)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죄사함을 받았다”는 면뿐만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이 나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는 면도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 즉 “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되심(Lordship)과 그 분에 대한 나의 종됨(Servanthood)”의 관계도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은 신자는 육신의 장막을 벗는 영화(Glorification)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신칭의를 단순히 예수 믿는 순간 얻게 되는 신분의 변화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변화된 신분을 가진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