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뒤에서 팍팍 밀어줄테니 하고 싶은 일 해보세요.” 어느 날 보험회사 설계사인 K집사님이 뜬금없이 해온 말이었다. 한 교회에서 30년 넘게 목회해왔지만 그동안 개인적으로 목사의 후원자가 되어주겠다는 교인은 없었다. “그래요. 기도와 봉사로 많이 도와주세요.” “아니에요. 돈으로 후원하겠어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거든요.” K집사님의 아이디어는 이런 것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동차 보험에 들게 하고 거기서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수당의 몫은 전부 목사의 이름으로 된 통장에 바로바로 입금해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나는 그녀의 아이디어에 대해서 솔직히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수당이란 게 적은 금액일 수도 있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협조해줄지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K집사님은 실행에 옮겼고,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 때로는 몇 만원 때로는 일, 이십 만원 이란 금액이 꾸준히 들어오더니 얼마의 기간이 지나선 몇 백 만원이 됐다. 그때서야 나는 해보고 싶은 일이 뭐였지를 생각해봤다. 교회를 개척하거나 교회당을 지어줄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란 말 ‘소확행’이 유행되고 있었다. 그녀가 힘쓴 후원금으로 뭔가는
“병이란 그리워할 줄 모르는 것 사람들은 그리워서 병이 나는 줄 알지 그러나 병은 참말로 어떻게 그리워할지를 모르는 것” 이성복 님의 시 ‘오늘 아침 새소리’입니다. 시인은 그리움 때문에 병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워할 줄 모르는 것이 병이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리움 대신에 차지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성공, 명예, 돈, 욕심… 이런 것들로 인해 어느덧 그리움은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시가 없고 그리움이 없으면 플라스틱 인생입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그리움 때문입니다. 철새는 그리움의 힘으로 날아갑니다. 자기가 떠나온 늪지대의 물소리, 바람 소리가 그리워 구만리 장천도 마다하지 않고 날아갑니다. 그리움이 있는 옛날을 ‘추억’이라 하고, 옛날에서 그리움을 빼면 그저 ‘기억’이 됩니다. 혜원 신윤복이 남장(男裝) 여자라는 오해를 일으킨 ‘바람의 화원’이란 팩션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드라마에서 단원 김홍도가 도화서 서생들에게 묻습니다. “그대들은 그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서생들이 대답을 합니다. “사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묘사한 것이 그림입니다.” “멀고 가까운 것을 분별하는 것이 그림입니다.” 혜원의 차례가 왔습니다. “너는 그림이
우리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서 있다. 산업이라는 단어에 혁명이라는 말이 덧붙여진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업혁명은 기술혁신과 이에 수반해 일어난 산업상의 변화가 사회, 경제 구조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결과를 두고 만들어진 말이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증기기관과 기계화로 대표되는 1차 산업혁명, 19세기 말 전기를 이용한 대량생산이 본격화된 2차 산업혁명, 그리고 20세기 말에 인터넷이 이끈 컴퓨터 정보화 및 자동화 생산시스템이 주도한 3차 산업혁명에 이어 4차 산업혁명이란 IT(information technology) 기술,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빅데이터(Big Data) , 우주항공(Aerospace) , 생명공학(Biotechnology) 그리고 모바일(Mobile) 등 지능정보통신기술이 기존 경제와 산업, 사회 전반에 융합되어 혁신적인 변화가 만들어지는 차세대 산업혁명을 말한다. 3차 산업혁명의 키워드가 정보화였다면, 4차 산업혁명의 키워드는 지능화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은 어떤 징조를
침례교회가 다른 교단과 구분되어 독자적인 교단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침례교회만이 믿고 있는 독특한 신앙교리 때문이다. 기독교회가 같은 성경을 믿으면서 여러 교단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성경 해석의 차이에 기인한다. 교리와 신학은 성경 해석의 기준이 되며, 따라서 교단의 나누어짐은 교리의 차이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내에서 교리의 차이는 크고 본질적인 경우도 있고, 미세하고 비본질적인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개신교회는 로마가톨릭이나 정교회와는 상당히 다른 교리를 믿고 있으나, 개신교단들 간에는 교리적 차이가 크지 않은 편이다. 침례교회는 개신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한 하나님이요 유일한 구원자이며,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하나님임을 믿는다. 또한 성경의 권위, 유일한 중보자 예수님,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 등의 교리를 믿는다. 침례교회는 이처럼 개신교단의 일원으로서 다른 개신교회들과 공통적인 신앙교리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침례교회는 다른 교단과 구별되는 독특한 신앙적 특성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특성은 침례교 정체성의 핵심이며, 침례교회로 하여금 독립된 교단으로 남아 있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것은 성경중심주의와 신
태종 시대에 대궐 밖 문루(門樓) 위에 북을 달아 놓고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고도 그 원한을 풀지 못한 사람이 북을 치면, 그 사람의 소원을 듣고 왕이 직접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신문고(申聞鼓)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북을 치는 절차가 까다로워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북이 있으나 마나 했다. 서민들이 신문고까지 가기에 너무 먼 길이었다. 북을 치기 위해서는 먼저 수령에게 고하고, 다음에 관찰사, 그 다음에 사헌부,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세종이 왕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1419년(세종 1년) 2월 17일, 참찬 김점(金漸)이 이름뿐인 신문고 제도를 혁신할 것을 제안했다. 모든 절차를 폐하고 누구든지 북을 칠 수 있게 하여 소원을 들어주자는 건의였다. 그래서 세종은 신분과 귀천에 관계없이 노비라도 북을 두드려 억울함을 풀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자 탐관오리들이 백성을 조정하여 청렴결백한 동료나 상관을 모함하는데 신문고를 이용했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마구잡이로 북을 치거나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는 자나 그 배후 세력까지도 엄격하게 처벌하는 제도를 보완했다고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재판은 가난하고 힘
1977년 미국에서 제작된 조지 루카스 감독의 영화 스타워즈(에피소드4: 새로운 희망)는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영화로 그 당시로는 황당한 공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42년이 지난 2019년 지금 황당한 공상이 대부분 현실이 되어 버린 세상이 됐다. 4차 산업혁명은 인간 상상력의 현실화가 핵심이다. 전 세계의 화두는 이제 4차 산업혁명이다. 4차 산업혁명은 이전의 1, 2, 3차 산업혁명과는 달리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2016년 1월 20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클라우스 슈밥에 의해 처음 언급된 4차 산업혁명은 3차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과 바이오산업, 물리학 등의 경계를 융합하는 기술혁명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했던 개념인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는 이제 인간의 삶에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다주고 있지만 상상 속에서만 꿈꿨던 미래생활과 기술들이 가져올 파급력은 제대로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게 할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제 4차 산업혁명은 IT기술, 인공지능, 드론, 우주항공, 사물 인터넷, 가상현실, 생명공학 등이 연계되고 급속도로 발전되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대혁
필자는 앞으로 세계 침례교 역사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하려 한다. 침례교회는 17세기 초 영국 분리파 청교도들로부터 시작되어 미국에서 꽃을 피운 세계 최대의 복음주의 개신교단이다.교세로는 침례교세계연맹(BWA)에 가입한 교단들의 합 4800만 명, 미남침례교회 1300만 명, 그리고 독립 침례교회들을 합하여 전 세계에 약 8000만 명의 신자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명한 침례교인들로는 윌리엄 캐리, 찰스 스펄전, 마틴 루터 킹, 월터 라우센부쉬, 빌리 그레이엄 등이 있다. 필자는 구체적인 침례교 역사를 기술하기 전에, 침례교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성경중심주의와 교회관을 먼저 다루려 한다. 이번에는 침례교 성경중심주의에 관해서만 살펴보겠다. 성경이 신앙과 행습의 유일한 권위가 되어야 한다는 성경중심주의는 침례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개신교단들도 공통으로 믿고 있다. 개신교 보편 신앙인 성경중심주의가 어떻게 침례교회의 독특한 특성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 측면 때문이다. 첫째, 침례교회는 어떤 신학이나 사상을 성경해석의 틀로 삼지 않고, 성경에 직접 나아가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집중하려 한다. 장로교회는 존 칼빈의 신학을, 감리교회는 존
“영어를 왜 배워야 해요?”. “영어, 한문 그런거 필요 없잖아요.” 이곳 진도에 내려와 아동센터 아동들을 교육할 때 들었던 소리다. 올해도 계획하고 있는 일로, 작년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센터 아동들을 대상으로 미국체험과 어학연수를 계획했다. 가능할까 의심의 마음으로 시작을 하고 모집을 했는데 최종적으로 다섯 명의 아동들이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 자녀들을 향한 교육 열의가 많은 부모들의 마음을 보았고, 센터에 속하지 않은 지역의 아동들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한국의 땅끝 진도 농어촌의 시골 마을에서 비행기를 타고 아이들이 미국을 향해 날아 갈 수 있을 수 있을까 의아해하는 눈치도 받았다. 그러나 다섯 명의 아동들이 서류를 준비하고 사전 교육을 받고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 사진을 보는 순간, 설마 하던 마음에서 “나도 가고 싶어요.”라는 소리로 바뀌었다. 수시로 미국 생활의 사진을 볼 때마다 호기심과 설렘은 커졌고, 영어나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에 부정적이던 말이 싹 사라졌다. 그리고 “어떻게 가면 되요?”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이곳 지역아동센터의 29명의 아동 중에 대다수가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다. 가까운 읍의 학교 만해도 부모가 다른 나라 사람이라는
경주 보문단지의 펜션에서 둘째 처남이 회갑연을 베풀었다. 그 후 행사를 마치고 각자 거주지로 돌아가는 길에 90살인 장모님이 동행하는 자녀들에게 “이번에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구경을 했네.”라는 말을 했다. 관광지이긴 하지만 겨울철 경주 보문단지는 벚꽃이 만개하는 봄처럼 아름답지 못하다. 그 날은 몹시 춥고 바람까지 불어 밖에서 산책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구경을 했다는 장모님의 말에 모두들 의아했다. 그 동안 세 처남들 사이엔 갈등과 불화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유산을 적절하게 분배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가끔 집안 행사가 있어 모이면 서로 얼굴대하기가 껄끄럽고 힘든 관계였다. 하지만 회갑연에서 처남들과 가족들이 보여준 태도들이 전과는 사뭇 달랐다. 장모님에게 꽃바구니와 용돈을 드리며 낳아주고 길러준 은혜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였다. 그리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식사를 하고 재미있는 순서도 가졌다. 그런 것들이 장모님에겐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구경이었다. 90세가 되도록 자녀들에게서 늘 바랐던 형제 우애와 화목을 보았던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3절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책상에서 지리학을 배우고 독도법을 배운 사람들은 지도를 펴들면 산의 높낮이와 길이가 숫자로 떠오른다고 한다. 산사람들이나 특전사 요원들은 지도를 펴들면 먼저 새소리 물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두 발로 산과 계곡을 헤매이고 수없이 실시되는 야외 훈련을 통해 손발과 몸으로 독도법을 익혀기 때문에 박노해의 시 ‘정신의 발’입니다.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를 보면 지리학을 공부한 지리학자가 지리를 잘 모른다는 우스꽝스러운 역설이 나옵니다. 책상에서의 공부와 일상에서 이뤄지는 공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상에서 체득한 지식을 가슴으로 정리해야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습기 있는 지식이 있고 메마른 지식이 있습니다. 메마른 지식은 머리에서 나오고, 습기 있는 지식의 지성소는 가슴입니다. 습기가 부족한 지역의 이파리는 가시가 되어 가듯이 메마른 지식은 가시가 되어 수많은 사람을 찌릅니다. 눈물과 땀이 가득한 습기 있는 지식은 수많은 생명을 살려냅니다. 신약성경 사복음서에는 모두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그 중 누가복음의 내용에는 독특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눅8:6). 바위에 떨어진 씨는 습기가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