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동시적’이라 함은 중생이 우리 안에서 회개와 믿음이 완성될 때 완성되고, 회개와 믿음도 중생이 완성된 때에 완성된다는 뜻이다. 멀린스는 대그나 보이스와 같이 이 믿음은 오직 은혜를 인하여 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구속을 확보해 주는 공로적인 활동이 될 수 없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했다. 이처럼 멀린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 관점에서 중생의 조건을 회개와 믿음으로 규정했다. 카너는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을 통해 중생의 조건을 제시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소생시키는 행위를 통해 발생한 중생이 믿음보다 앞선다고 주장한 반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구원의 조건인 믿음이 중생보다 앞선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카너는 믿음과 중생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영적 체험의 두 국면으로 규정한 후에, 인간은 믿음에 의해 중생하지만(갈 3:26; 요 1:12~13), 이 믿음은 하나의 중생적인 행위측면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카너는 구원의 순서가 “회개와 믿음을 통해 체험하는 죄 용서, 칭의, 화해, 양자, 중생, 그리고 성화”로 전개되는 하나의 실재에 대한 다른 묘사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카너는 믿음이란 파산한 죄인이 하나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 나오는 로고스의 화육과 화육하신 로고스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다루는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존재성을 제시한다(1:14, 18). 요한은 영원한 신성의 창조주인 로고스가 역사상의 한 구체적 인간이 되어 그들 가운데 함께 거주하셨던 사실을 제시하고 그 속에서 그 분의 유일한 존재성을 특별한 용어를 통해 표현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a).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말씀이 ‘육신’ 곧 ‘인간’이 된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신성의 존재가 인성의 존재로 변형된 것을 말한다. 그것은 또 그 영원한 신성의 존재가 살과 피를 가진 인성의 존재가 되어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온 것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에서 ‘육신’이란 단어는 아주 드물게 나오는데, 신체 곧 살과 피를 가진 인간 존재라는 중립적 의미로 사용된다. 사도 바울도 그의 기독론적 성찰에서 화육과 관련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롬 1:3);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냈다(롬 8:3);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셨다(딤전 3:16). 이러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불평불만만 늘어놓으며 보내는 사람에겐 불행한 하루가 되고, 감사하는 사람에겐 행복한 하루가 된다. 자주 들어 귀에 익은 ‘감사’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입만 열면 불평하고 비판하며 심지어는 욕이 입에 붙은 사람도 있다. 감사한 마음이 없고 불평불만이 가득하면 감사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불평불만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시계의 배터리가 다 닳으면 시계바늘이 몇 번 째깍째깍하다가 딸깍 멈추듯이 우리 인생도 어느 날 정해진 시간을 다 사용하고 나면 숨이 째깍 멈추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만큼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처럼 정해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가족에 대해, 직장 상사나 사장에 대해, 정부에 대해 늘 불평불만을 하며 불행한 시간만 보내다가 인생의 시계가 멈춰버린다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인가? 필자의 주변에도 30~40대의 젊은이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있어서 참으로 인생은 내일 일어날 일을 모르고 산다는 것을 절감한다. 우리의 인생이 생각보다 짧은 인생일 수도 있으니 매사에 감사하며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렘 20:12) 하나님께서 늘 제 마음을 보실 때에 그리고 제가 시험을 당해 저의 마음의 깊은 곳을 보실 때에도 죄를 범하지 않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사는 것이 제 생애에 유일한 목표이며 또한 평생 기도 제목이기도 합니다. 마치 욥이 그 큰 시험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예전에 서해바다에 1만2000여 톤의 기름 유출 사건이 있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참사랑교회에서 봉사하러 현장에 갔을 때는 이미 120만 명 정도의 자원 봉사단들이 다녀감으로 말미암아 현장이 너무나 깨끗한 상태여서 정말 기름 유출 사건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현장 감독 되시는 분에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삽과 물통과 융과 같은 종이를 주면서 한 팀은 삽으로 모래사장을 파고, 한 팀은 바닷가에서 물통으로 물을 담아와서 웅덩이에 부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팀은 모래 속에 스며들어 있는 기름들이 물 위에 뜨면 닦아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염되어 있는 기름들을 제거함에 있어서 먼저 바닷물에 떠있는 기름부터 시작해서 모래사장 속에 베여있는 기
“가방을 새로 사면 가죽에 힘이 들어가 있어서 각이 살아 있죠. 그게 보기엔 좋은데, 막상 들어보면 몸에 착 붙질 않아서 불편합니다. 그럴 땐 가방을 일부러 문고리에 며칠 걸어두는 거예요. 가죽이 약간 늘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모양이 잡히도록. 힘을 빼야,더 멋있는 것도 있거든요.” 강혜정 이고운 공저(共著) ‘오프닝&클로징’ (프런티어, 19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힘이 들어가야 아름다운 것이 있고, 힘을 빼야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몸에서 힘을 빼는 것이 모든 운동의 기본이고, 머리에서 생각을 빼는 것이 모든 평안의 기본이 됩니다. 좋은 연기를 하려거든 감정에서 힘을 빼고, 좋은 노래를 부르려거든 목소리에서 힘을 빼야 합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분의 색이나 선을 덜어낸 넉넉함, 한 색 빼기를 하여 그 간격이 만들어 내는 리듬이나 여백이 고요함을 느끼게 합니다. 움켜쥔 손의 힘을 빼고 손바닥을 펴는 순간 무한의 공간이 손바닥에서 열립니다. 대중 민요 ‘갑돌이와 갑순이’에 얽힌 유머입니다. 서로 갑으로만 살았던 이 둘은 먼저 사랑한다고 하면 손해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끝까지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갑돌이는 ‘을순이’에게 장가
손님 대접하기를 즐거워하는 어느 여인이 공원에 앉아있는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집에 들어오셔서 따뜻한 차 한잔 하시지요?” 노인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함께 집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요?” “내 이름은 부(富)이고 저 친구의 이름은 성공(成功)이고, 다른 친구의 이름은 사랑(Love)입니다. 집에 들어가셔서 가족과 상의 하세요. 우리 셋 중에 누가 당신 집에 들어가기를 원하는지를….” 부인은 집에 들어가서 노인들이 한 말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남편은 매우 즐거워하면서 말했습니다. “우리 부(富)를 초대합시다. 그분을 안으로 들게 해서 우리 집을 부(富)로 가득 채웁시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여보! 왜 성공(成功)을 초대하지 않으세요?” 조용하던 집안이 소란해졌습니다. 며느리가 시부모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사랑을 초대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 싸우지 않고 사랑으로 가득차게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부인이 공원으로 나가서 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어느 분이 사랑이세요? 저희 집으로 드시지요.” 사랑이 일어나 집안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두 노인(부와 성공)도 일어나서 사랑을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부인이 놀라서
세계적인 암센터에 31년간 근무한 “김의신” 박사는 하나님을 찬양함이 암치료에 실제적인 효과가 있다고 소개하면서 교회성가대원들과 일반인들을 비교해 연구해 보니 성가대원들의 면역세포수가 일반인보다 몇 십 배도 아닌 무려 1000배나 많은 것으로 측정됐다고 발표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는 성가대원들의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 신체의 면역체계를 강화시켜 준 것입니다. 또한 1998년 미국 듀크 대학병원의 “헤롤드코니히”와 “데이비드라슨” 두 의사가 실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매주일 교회에 나와 찬양하고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평균 7년을 더 오래 건강하게 산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처럼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면 신체의 면역체계가 강화되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잘 유지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며 또한 우리에게 찬송 받기를 원하시며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께서 병이나 고난을 통하여 우리들을 연단하시거나, 믿음을 성장시키시거나, 인격을 만들어 가시는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비록 아프고 힘들고 어려움이 찾아올지라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양
“어느 성악가가 노래를 부르다가 숨이 막혀 죽었다고 한다. 이유를 알고 보니 악보에 쉼표가 없었다고 한다. 쉼표는 노래의 여백이다. 여백 없는 악보, 쉼표 없는 악보는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질식하게 한다.” 한재욱 저(著) “인문학을 하나님께”(규장, 26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글도 그러하고 그림과 사진도 여백이 있는 것이 넉넉하고 좋습니다. 여백은 독자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창조의 공간입니다. 흔히들 동양의 미학을 ‘여백의 미’라고 합니다. 넘침보다는 모자람을 선택한 것입니다. ‘없음’으로 인해 ‘있음’이 빛납니다. 흰 여백은 감상하는 사람이 들어갈 공간입니다. 이론도 그러합니다. 웃을 수 있는 여유와 여백이 없는 이론은 복수와 증오에 불타오르는 이론입니다. 100의 출력 능력을 가진 오디오 기기를 70정도로 해 놓고 음악을 들으면 가장 편안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여백이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틈이 없고 매끈한 유리 같은 사람에게는 이웃의 눈물이 스며들지 못합니다. 넉넉한 무명천같이 여백이 있는 사람은 이웃의 눈물을 흡수하며, 소통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됩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머리에 기억되지만, 배려의 여백이 있는 사람은 가슴에
얼마 전 섬기는 캠퍼스에서 젊은 영혼들과 함께 성경말씀을 나누며, 상담을 하며 또 다시 화제가 된 방탄소년단(BTS) 이야기를 많이 나눌 기회가 있었다. 아마도 방탄소년단의 소속 회사의 대표가 섬기는 캠퍼스 동문이기 때문에 관련 이야기가 미디어에 노출되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며 확인한 것은 이전 지구적인 열광과 반향은 결코 우연이나 일시적 스캔들이 아니며 놓쳐서는 안 될 값진 교훈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었다. 최근 발표된 BTS의 앨범이 폭발적 반응과 함께 영국과 미국 매인 차트에서 동시에 1위를 차지했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매우 진귀하고 대단한 일이라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이 번 노래가 “나 자신을 찾는 여정”이란 엄청난 철학적 성찰의 자리로 모든 청중을 초대하는 메시지라는 점이다. 앨범은 제목부터 심상치가 않다. 심리철학계의 거장 칼 융(Carl Jung)의 사상이 담겨 있다. 그래서 제목도 지난 30년 이상 융을 연구한 한 저자의 책 제목에서 그대로 빌어 왔다. “영혼의 지도 : 페르소나.” 가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Ego)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융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전쟁을 하는 페르소나와 그림자
피셔 험프리스(Fisher Humphreys)에 의하면, 오늘날 교회에서 중생은 주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자주 이해된다. 대그(John L. Dagg), 보이스(James P. Boyce), 그리고 멀린스(E. Y. Mullins)는 칭의나 양자의 관점에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언급하지만, 그들은 중생을 말할 때 새로운 관계뿐 아니라 새로운 도덕적 실재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중생은 새로운 성품을 지닌 새로운 사람이 존재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고, 성령은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새로운 도덕적 자아를 성화시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험프리스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중생에 대해서 좀 더 세밀한 접근과 분석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연구자는 이같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중생의 의미와 조건을 살피고, 중생과 다른 구원의 용어인 칭의와 성화와 양자의 관계를 분석하며, 조직신학자들이 어떤 중생관 전개 구조와 방식을 가지고 중생을 설명했는지 연구할 것이다. 그런 후에 연구자는 중생 교리에 대한 실제적인 적용을 살피며 중생 교리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추구할 것이다. 그리고 연구자는 중생 교리를 포괄적으로 살피기 위해 험프리스의 분류에 따라 남침례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