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진흥원 간사에서 원장 사역, 그리고 교단 미래에 대한 생각 1991년 8월 1일 진흥원 사역을 시작했는데 당시 교회훈련부(현재 연구개발팀) 간사로 각종 훈련 프로그램 교재 개발과 세미나 강의 등을 주로 하는 사역이었습니다. 먼저 기존 훈련 교재들을 처음부터 복습하며 강의 준비를 하는 것과 계속해서 당시 미국 Sunday School Board(현 LIFEWAY)의 우수한 교재들을 번역, 출판하는 것이 주 사역이었습니다. 이 때 “새신자훈련총서”를 시작하여 “Survival Kit 시리즈”, “최선의 삶”, “연쇄전도훈련” 등을 직접 공부하며 강의 준비를 하게 되었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제 자신이 신앙 체계를 바로 가지게 되었고 나아가 제자의 십자가 교과를 설계하게 되었으며 기존 교재를 중심하여 연령별, 단계별 교과과정을 만들어 보급하면서 교재 개발도 이 커리큘럼에 맞추어 보강한 것이 현재 교회진흥원 단계별 제자훈련 기본 도표입니다. 특히 “새신자훈련총서”는 40년 넘게 많이 보급된 교재로 지금은 영어판을 비롯해 중국어, 인도네시아어, 카자흐스탄어, 러시아어, 그리고 몽골어판으로 번역되었는데 그 중에 몽골어판은 2014년 요단출판사 최초로 해외에 저작
1. 신앙 입문 및 소명 저는 1968년 10월 중학교 1학년 때 형님의 인도로 처음 울진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중, 3학년 여름 수련회에 참석하여 목사님의 메시지를 듣는 중에 죄인임을 진심으로 깨닫고 눈물로 회개하며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여 1970년 8월 22일 당시 교회 담임이셨던 고 김용근 목사님의 집례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고등학생 시절 중, 고등부 회장과 주일학교 교사로 열심히 봉사하던 중에 고등학교 2학년 때 소명을 받고 목회자로 헌신할 것을 다짐하였으나 일반 목회를 하기에는 좀 부담스러워 고민하고 있을 때 헌신 예배 강사로 오신 인근 부대 군목의 설교를 들으며 깨닫고 군목으로 지원할 것을 결심하고 학교 등하교 할 때마다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고등학생 시절 교회 생활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매주 토요일 오후에 시작하여 저녁 늦게까지 기름종이에 철필 가로반으로 꽁꽁 언 손을 톱밥 난로에 녹이며 교회 주보를 만들었던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거의 매일 등하교 시 집과 학교 중간에 있는 교회에 들러서 목청 높여 기도하였던 일입니다. 아마 이 때 변성기 목소리 관리를
‘하늘나라 이야기꾼’으로 부흥의 새 역사를 써내려가는 정희량 목사 “어릴 때, 부흥사이신 교회 목사님을 따라 다니며 영혼을 살리고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모습 속에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뜻이구나!’라는 생각이 뇌리에 박혔습니다. 요즘 부흥회가 안된다. 부흥사가 뭐가 대단하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더 열심을 다해 기도하고 사모하게 됩니다.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부흥사가 아닌 생명을 살리고 교회를 일으키는 부흥사, 먼저 전도하는 부흥사, 다음 세대를 바라보고 준비하는 부흥사가 제가 앞으로 가야 할 길임을 매일 매일 다짐합니다.” 예배와 말씀, 부흥과 기도를 사모하는 광정교회 정희량 목사(사진). 홍성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고 열악한 목회 환경에도 복음의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 나라를 사모했던 정 목사는 세도제일교회에서 예배당을 건축하고 2003년 광정교회에 부임했다. 인근 지역에 태성교회가 있어 오관석 목사와 김장환 목사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광정교회에 다수 있어 부흥에 대한 열망과 사모함이 남달랐던 광정교회는 전도와 선교, 교육에 역점을 두고 목양에 전념했다. 또한 부흥사로서 기도원 집회와 교회 집회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특히 어
60여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부산 범일교회(최재훈 목사)는 선교적 비전 사역을 전개하며 해외 선교와 선교지 사역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국내 선교 사역에도 관심을 가지며 새롭게 지역 다문화 가정에 관심을 두고 이에 대한 선한 행보를 전개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이주여성에 대해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로 교회에서 기도 모임을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사역을 이끌어가기 위해서 동역자들을 기다렸고 교회 구성원 중에 헌신자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다문화 한글학교를 시작하게 됐다.” 최재훈 목사가 다문화 사역을 시작한 계기를 이렇게 설명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이 먼저임을 밝혔다. 한글학교를 시작하면서 교회의 문을 낮추고 지역에 다문화가정들을 파악하며 교회에 출석하기 보단 먼저 교육의 문을 먼저 열었다. 의사소통에 어려운 이주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그들의 자녀들을 먼저 양육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특히 교회 청년들과 직분자들의 재능기부로 교사들이 배치되고 돌보미들이 함께 하면서 이주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현재는 약 70여 명의 다문화 가정과 여성, 학생들이 한글공부와 검정고시 공부, 합창단 연습 등 다
“상록수교회 성도들은 모두 한 가족입니다. 목회자의 가정을 비롯해 사역자, 제직자, 성도 등을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입니다. 가족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함께 먹으며 나눌 수 있는 것이 바로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기쁨도 고통도, 슬픔도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다 함께 합니다. 믿음의 시작은 바로 가족입니다. 개척 당시부터 가족 공동체로 하나 되어 예수를 믿고 따르고 제자의 삶을 사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목회자가 생명을 걸고 성경의 말씀을 전하고 양육하는 것, 그것이 26년 한결같이 걸어온 상록수교회의 발자취입니다.” 안산에서 올해 3월25일로 창립 26주년을 맞은 상록수교회 이종성 담임목사는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힘주어 말했다. 경기도 안산은 농민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인 심훈의 ‘상록수’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 최용신의 묘소가 있고 세월호 사건이 있는 단원고가 있는 곳이다. 이종성 목사는 교회를 개척하고 전도하고 양육하고 제자 삼는 일에 열정을 다했다. 그 때는 전도할 때 많은 전도대상자들이 교인으로 열매를 맺었다고 귀띔했다. 이종성 목사와 아내 양진숙
"한국교회의 위기는 곧 선교지와 선교사들에게도 크나큰 위기이자 고난의 시간을 말합니다. 선교지의 위기는 한국교회의 위기 이상으로 하나님의 복된 소식 자체의 동력을 잃어버리는 상황입니다. 한국교회의 어두운 밤이 찾아오고 있지만 우리의 선교는 칠흑같은 밤의 밝은 별이 되고 싶습니다. 어두움과 두려움에 떠는 많은 이들이 별을 보고 안심하고 빛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바로 그 별이 침례교 해외선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제4대 침례교 해외선교회(회장 이재경, FMB)로 전세계 670여 명의 선교사들의 희노애락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김형윤 목사(서울제일)는 위기의 한국교회와 선교 사역에 새로운 동력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특별히 제2대 이사장인 고 한기만 목사의 2주기 날인 지난 1월 29일 서울제일교회 목양실에서 만난 김형윤 목사는 과거 해외선교회를 창립하고 함께 걸어온 선배 목회자와 동역자를 회고하며 세계 선교를 향한 꿈과 비전을 거침없이 제시하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뿌리없는 나무 없듯 침례교 선교의 뿌리는 개교회침례교 선교는 도전적이고 항상 적극적인 마인드를 꼽는다. 개교회의 후원과 협력을 통해 파송된 선교사들은 무엇보다 선교지의 환경에 녹아들기 위해 언어,
침례교 총회(총회장 유영식 목사)가 주관한 제4회 목회자자녀영성캠프는 120명의 목회자 자녀에게 신앙의 본질을 일깨워주며 목회자 자녀로서의 삶에 대한 목적과 비전을 선포하는 자리였다.특히 장소와 숙소를 제공한 포도나무 교회(여주봉 목사)는 매집회 시간마다 찬양으로 섬기며 행복한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했다. 또한 총회 제1부총회장 박종철 목사(새소망)를 비롯한 강사 목회자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챙기는 마음으로 귀한 말씀을 전하고 후원하며 이들이 교단 미래의 주역이 됨을 선포하고 격려했다.총회 교육부장 이재옥 목사(부평중앙)는 “이번에는 말 그대로 목회자 자녀들의 영적인 삶에 포커스를 두고 캠프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계속 이어지는 깊이 있는 강의를 집중해서 듣는 모습이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웠다”며 “열심히 강의를 듣고 메모하고 강의 후 목사님들과 대화를 나누며 삶을 나누는 모습에 우리 교단의 미래가 참으로 밝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고 귀뜸해 줬다.목회자자녀들은 이미 그들만의 공감대를 갖고 캠프 현장에 왔다. 그들은 조별로 짜여진 그들의 조에 편입되자마자 10년지기라도 되는 듯이 친해져서 총회에서 주는 저녁 간식, 피자와 치킨으로 배를 채운 뒤에 그치지 않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국내 목회자를 꼽으라면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를 빼놓고는 말하기 힘들 것이다. 1934년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민족의 비극이었던 1950년 6·25 한국전쟁을 겪은 김 목사는 미군 부대의 하우스보이로 도미, 미국 밥-존스 신학대학에서 놀라운 성적으로 목회자로서 소명과 사명의식을 갖춰 한국교회의 미래를 짊어질 차세대 주역으로 일찌감치 준비된 사역자라고 할 수 있다.1959년 수원중앙교회를 단 12명의 성도와 함께 개척한 김 목사는 그 자신의 특유의 부지런함과 탁월한 설교 능력, 전도의 열정과 추진력으로 교회를 성장시켰다.그가 한국 침례교회에 새로운 획을 그었던 장면은 바로 1973년 빌리 그레이엄의 서울 여의도 전도집회 때였다. 미국의 세계적인 부흥사인 빌리 그레이엄의 모든 통역을 그가 맡으면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전해졌고 집회 5일 동안 320만 명, 마지막 날에는 110만 명이 모여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 81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악수하는 손은 강한 힘을 전달했고 여전히 새벽과 이른 아침 자신의 사역을 점검하며 직접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김장환 목사. 세월의 무성함
기관 기도 모임 통해 응답받고 교회 부흥의 초석 삼아29년간 영도교회와 함께 한 김신종 목사는 부산지역의 어려운 침례교회의 목회 현실을 복음과 말씀, 기도로 극복하며 교회를 성장시켰다. 김신종 목사가 가지고 있는 신념은 바로 믿음과 기도였다.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뤄내고 계획하고 극복해 나가며 성도들은 믿음의 공동체로 영도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현상유지만 했던 교회에 비전과 열정을 품다1976년 8월 목회자로서 교회를 개척하고 개척교회의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김신종 목사. 그가 지금까지 목양일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기도원에서의 금식기도와 자신의 신조로 여기고 마음에 새긴 마가복음 9장 23절(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의 말씀이었다.“방 두 칸에 마루 5평 정도의 작은 집을 얻고 어떤 성물도 없이 무작정 하나님께 찬양드리고 예배 드렸죠. 당시는 다 어렵고 힘든 시절이라 개척교회를 돌아볼 형편도 안됐죠. 국내선교부의 기금위원회에서 지원하는 지원금이 전부였어요. 사지 육신 멀쩡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건 오산리 기도원에서 기도하는 일이었죠. 서울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오산리 기도원을 찾았어요.
“우리는 지금 영적 위기의 시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드리워진 어두운 모습은 점점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고 하나님의 지상명령조차 수행할 수 없는 도전의 시기입니다. 저는 이를 한국교회의 흉년의 시기라 명하고 싶습니다.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부흥의 시기를 겪은 우리에게 이제는 영적인 흉년의 시기를 대비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그 대안은 바로 우리의 전반적인 신앙의 흐름과 삶에 영적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영적 갈급함을 채우며 세상을 향해, 민족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2010년 12월 거룩한 부르심으로 지구촌교회 담임목사로 사역을 시작한 진재혁 목사를 지난 12월 9일 오후에 분당성전 목양실에서 만났다. 인터뷰 내내 화기애애했으며 그의 부드럽고 차분한 어조에서 ‘교회가 희망’임을 깨닫는 자리였다. ‘민족 치유’와‘세상 변화’의 교회 비전을 계승하며 이동원 목사의 사역을 넘겨받은 진재혁 목사는 지난 5년 동안 급변하는 한국교회와 한국사회, 세계교회에 대해 위기 속의 교회를 향한 ‘희망과 경고’의 메시지를 차분하고 담대한 어조로 전했다.진재혁 목사는 분당성전을 비롯해, 수지성전, GMN채플, 경기 채플과 필그림, 구리지구촌채플 등에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