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큰 딸이 두 번째 유학길에 오른 지도 4개월. 미국에서의 고교 졸업 후 대학까지 진학했었지만, 학비와 향수병 등의 이유로 결국엔 돌아와 여기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도 다니던 중, 다시 또 한 번의 도전장을 내민 연유다. ‘그냥 있는 곳에서 편하게 다니다 신랑도 만났으면….’하는 아비 마음이야 왜 없겠냐마는 기도하며 결정했다 해서 또 한 번 더 뒷바라지 하게 됐다. 물론 꿈꾸던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건 기쁘다. 아는 분들은 참 좋은 학교란다. 하지만 그래도 또 2년간 얼굴 못보고 살아야 하는 부모는 여전히 허전하다. 그래서 좋기도 하지만 섭섭하기도 한, 나의 두 마음. 얼마 전 한 성도가,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도 다섯 명도 안 되는 개척교회를 섬기겠다고 기어이 떠났다. 그렇게 어려우면 교회 차원에서라도 돕겠다 했지만, 그 뜻한 바는 꺾지 못했다. 참 많은 관심과 기도를 베풀었는데, 그 또한 우리 교회를 좋아했는데, 우리 교회에도 필요한 일꾼인데, 혹 그러다 다른 상처나 입지 않을까 염려도 되지만, 이미 그렇게 결정해버렸다 하니 어찌나 섭섭하던지. 물론 언젠간 돌아오리라 믿고, 교적도 안지우고 기다리겠다며 나름 쿨하게 응했지만 그래도 섭섭한 이 마음은
고린도 전서 10 : 7~10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주시기 위해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셨을 때 밑에서 모세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디 내려오는 모세를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던 사건입니다. 그때 시내 산에서 내려온 모세를 보고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왔지만 3천여 명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치 않고 우상 숭배하는 것을 고집했습니다.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멸망시키셨던 것입니다. 왜 이들이 하나님께 멸망을 당했습니까? 이들 3000여 명은 끝까지 마귀를 기쁘게 하는 쪽으로 가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한번 받은 구원을 영원히 잃지 않는다”면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 미혹되어 빠져서 신앙생활 하다가 죽어도 천국을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천국 가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이단에 빠졌다 하더라도 잘못됨을
성서 해석자가 성서 문학 장르의 특성을 따라 그 안에 계시된 말씀을 해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말씀을 기록한 저자의 목적과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함이다. 다행스럽게도 현대설교는 성서의 구속사적 이해라든가 본문 중심의 성서적 설교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는 현상이 엿보이지만, 여전히 성서의 문학적 이해는 부족해 보인다. 성서의 문학 장르 이해 부족 현상은 설교자 자신의 고정된 설교 방법론의 문제와 연관된다. 본문에서 설교까지의 여정에서 일반적으로 설교자의 관심은 이미 정해진 자신의 설교 구성의 틀에 내용을 적절히 배열시켰는가에 집중되는 반면 본문의 문학 장르적 특징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토마스 롱(Thomas Long)은 설교자가 성서의 문학 형식과 역동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성서적 설교의 회복을 위해 매우 중요한 사안임을 강조하면서, 성서적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들이 여전히 설교의 언어와 형식 나아가 효율적인 전달 방식에 매여 성서의 문학 양식을 간과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상이라고 간파했다. 성서의 문학 양식 가운데 복음서 장르는 독특하며 내러티브, 비유, 예수님의 가르침, 기적 사화 등 다양한 세부 장르(형식)를 포함한다. 많은
(3) 고린도전서 10:1~12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1) 이 글은 신자에 대한 내용입니까, 불신자에 대한 내용입니까? *신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2)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를 다른 말로 표현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면 안 된다 이것만은 반드시 꼭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고등학교 3학년 반에 수학 선생님이 들어와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얘기 합니다. “얘들아 이건 너희가 모르면 안돼.” “무슨 말 입니까?” “수학 책에 나오는 것이 모두 중요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은 반드시 알아야 된다” 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성경 전체에서 나오는 내용들이 모두 중요하지만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모르면 안 되는 아주 중요한 내용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3. 다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애굽에
나이 50이 넘었지만 청년대학생 사역을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졸업시즌을 맞이하면 종종 대학 캠퍼스에서 섬기던 여러 영혼들로부터 선물을 받는다. 즉 공부를 다 마치고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캠퍼스를 떠나는 자들로부터 받은 감사의 메시지들을 읽는 축복이다. 올 해는 약 4년 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처음 만났으나, 사역하던 대학교회에서 세례를 직접주고, 여러 번 성경공부 과정을 섬기고, 결혼 주례까지 섰던 한 형제로부터 그 선물을 받았다. 졸업식을 수일 앞두고 그 형제의 아내가 남편의 박사논문에 실린 감사의 글 일부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주례를 서 주신 석종준 목사님 내외분께서 아직도 저희 멘토로 있으시고 때로는 직접 찾아와 주시고 심방으로 섬겨주시니 감사합니다. … 서울대학교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인생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했습니다. 대학생활 동안 많은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했습니다. 석종준 목사님의 성경공부 및 기도 주말 목장모임을 통해 신앙이 튼튼해졌습니다.” 형제는 몇 차례 함께 성경공부과정을 마치고 부목자로 섬기던 중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어느 교회 목자였던 옆 연구실의 한 신실한 자매와 교제를 시작했다. 나는
설교화 과정에서는 적용된 성경진리의 목적(영혼구원 또는 영적성숙-예배, 교리, 윤리, 격려, 경고 등)을 분명히 하여 설교를 작성할 때 자료사용에 있어서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한다. 넷째, 적용된 성경진리의 감성(The Emotion of Applied Biblical Truth)이다. 본 단계에서는 본문에서 느껴지는 감정적 요소(비평적, 중립적, 따스함, 열정적)를 현대의 특정한 청중에게도 전달될 수 있도록 돕는 단계이다. 예화 사용 시에도 본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감정적인 정서가 고려되고 구체적으로 설교에 적용이 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형식인 장르(이야기, 예언, 지혜, 시, 복음서, 서신서, 묵시)가 설교화되어 현대의 구체적인 청중에게도 성경형식의 현대화된 역동성(The Contemporized Dynamic of Biblical Form)을 찾아 성경의 장르와 형식을 통하여 다양한 형식의 설교를 작성할 수 있다. 위의 세 과정을 종합하여 본다면 위의 도표와 같이 본문이 이끄는 설교를 작성하기 위해서 각각의 학문 영역에 따라 단계별로 변화된다. 필자는 본문이 이끄는 설교를 만드는 3단계(주해, 원리화, 설교)의 각각의 특성을 설명했다. 위의 세
교회가 속한 인포리 마을회관에 간식을 나눠드리러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자마자 마을 할머니 몇 분의 감정이 굉장히 격앙되어 있었습니다. 몇몇 분은 울고 계셨습니다. 모여있는 분들은 모두 교회를 나오지 않는 할머니들이신데 더함교회가 이전한다는 소문을 듣고 서운해 하시며 회관에 모일 때 마다 오직 더함교회 이야기만 나누고 계셨습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 바로 앞집 할머니는 교회당을 건축할 때 자기 집 흙담벼락에 반대 현수막을 걸고 작업하는 포크레인 기사를 끌어내리며 반대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목사님, 나 일주일째 심란해서 뒤척이느라 한숨도 못 잤어. 안돼!” 교회가 이전하기로 한 그 이후부터 마을에서는 비상대책회의가 생겼습니다. 인포리 할머니 중 한 분은 자신의 막내아들이 가지고 있는 남는 밭 중에 더함교회에 싸게 팔 수 있도록 알아본다고 난리입니다. 3년 전 교회당을 건축할 때, 난리를 치며 교회당 마당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시던 분들이 이렇게 변화된 것을 보니 올해 무조건 떠나는 것은 조금 보류해야 하나, 어찌 하는 것이 좋을지 머리 속이 멍합니다. 처음에 이 동네에 들어올 때, 계속되는 갈등 끝에 포교활동 금지, 예배소음금지 등의 조건으로 들어왔는데,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적 존재성을 헬라어 ‘로고스’를 통해 표현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첫 구절(요 1:1)에 포함된 세 개의 소절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영원성과 공동체성과 신성(신적인 존재성)을 선언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 이전부터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존재이고,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의 관계로 함께 계시는 존재이며, 또한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성을 가진 신성의 존재이시다. 요한이 이 구절의 첫 단어인 “태초에”를 사용함에 있어서 창세기의 첫 구절을 염두에 둔 것은 분명하다. ‘태초’라는 단어는 우주론적인 국면에서는 물론 존재론적인 국면에서 만유와 존재의 시작과 관계된 중요한 단어이며 그래서 이 단어는 우주의 시작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요한은 이 구절을 통해 만유의 시작과 기원에 대한 헬라 철학자들의 오래되고 끊임없는 질문에 대답한다. 요한은 이 구절을 통해 태초에 지혜가 있었다든지 혹은 토라가 있었다는 유대교적 인식을 교정한다. 천지가 존재하기 시작하던 때에 “그 로고스” 곧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말씀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요한이 여기서 우주의 기원에 관한 어떤 이론을
결론 책의 사람으로 사역해야 할 목회자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건강하고 건전한 사고를 갖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대적으로 불합리하고, 불건전하고, 불쾌한 일들이 너무 많이 발생하여 목회자를 당황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긴박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목회자가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삶과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시대의 흐름을 자세히 관찰하며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성경 말씀에 비추어 안목을 길러야 하고, 삶에 있어서는 믿음으로 행동하는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목회자가 책의 사람이라면 책을 읽어 지성과 영성을 갖추는 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됨을 바르게 가르쳐주는 책,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는 책, 믿음과 신앙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책, 목회자로서 목회관을 제시하는 책 등등을 읽어야 한다. 책은 현재와 과거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엿보게 하는 각 시대의 물줄기 역할을 수행한다. 관심만 기울인다면 시대의 흐름과 문화를 읽을 수 있고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에 대한 지혜도 배울 수 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선과 악을 가르쳐주고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이런 얘기까지 이런데다 쓴다는 게 창피하고 부끄럽다만, 공감할 분도 있으리라 여겨져 써본다. 며칠 전 일인데, 새벽 1시를 넘어서까지 아내랑 딸이랑 이런저런 얘기로 늦게 잠들어서인지 다음날 몹시 피곤한 가운데 잠에서 깨었다. 그리곤 화장실에서 세면을 하려는데, 그만 사건(?) 하나가 벌어졌다. 글쎄 내가 오른손엔 면도기를 들고, 왼손엔 치약을 들고는 그 면도기에 치약을 짜려하고 있는 게 아닌가?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던지 그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무리 전날의 피곤이 가시지 않았다지만, 아무리 잠도 덜 깼다지만 그 사건은 용납이 안된다. 물론 이게 처음은 아니다. 1년 전에도 그랬다. 하지만 그때는 오른손엔 면도기를, 왼손엔 치약을 딱 들기만 한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엔 그 치약을 꾹 누르기까지 했으니 한 단계 더 나아간 셈이다. 그렇게 해서 그날 아침 주둥이로 튀어나온 그 치약을 다시 집어넣으려는데 왜 그리 슬프던지…. 이러다 내년쯤엔 정말 면도기에 치약 바르는 일이 생길 터. 아무튼 그날 그 일은 너무 당황스러워 가족들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다. 몇 주 전에는 교회 로비에서 내 책 사인(sign)을 갑자기 해달라는 성도님이 계셔서 해드리려는데, 도무지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