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가장 아름다운 특성은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일반적인 선언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신앙 간증인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선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기뻐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증명해 주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그 모범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살맛을 잃어버린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 건강, 자녀나 부모, 성취에 대한 좌절, 과로, 질병, 인관관계로부터 오는 스트레스 등 여러 가지로 기쁨을 잃고 살아갑니다. 현대인들의 이런 삶 속에서도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상황과 형편을 넘어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고통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기쁨이란? 그리스도인이 누려야할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가치이며 아름다운 보물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영적 재산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교제의 참 가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기쁨은 절대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이란 더불어 나누고 누릴 때 참 기쁨이 됩니다. 귀먹고, 말 못하고, 보지 못하는 세 가지 장애를 가졌던 위대한 여성 헬렌 켈러는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연구자는 설교의 다양한 방식들 가운데 네 가지 방식을 중심으로 논하면서 어느 장르에는 어느 방식만이 유일하다고 하기 보다는 가능한 방식들을 복수로 제시하였다. 1. 키워드 방식(Keyword Method) 키워드 방식은 일반적인 설교 작성 방식 가운데 가장 보편적이다. 도날드 해밀턴(Donald L. Hamilton)은, 키워드 방식을, 먼저 본문을 기계적(혹은 구문론적으로)으로 펼쳐서 중요 아이디어나 개념들을 파악하고 그것들이 본문의 주제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파악함으로써 하나의 주제를 위하여 주요 개념들이 설교 개요를 형성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키워드 방식을 위한 전개 과정을 12단계로 구분하면서 본문의 중심사상으로부터 주제, 명제, 키워드 확정, 개요, 나아가 설교의 제목에 이르는 설교작성 단계를 밝히고 있다. 특이한 것은 명제에서 키워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질문형식으로 명제를 제시하고 그에 대하여 키워드를 통하여 답변을 내림으로써 설교 작성은 키워드와 긴밀한 연관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키워드 방식에서 본문의 중심 사상은, 본문이 무엇에 관한 것이냐를 말한다면, 주제는 그 아이디어에 대하여 본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어릴 때 목회자로 소명을 받은 후에 저의 관심은 목사님들의 설교에 있었습니다. 목회자의 절대적인 사명이라면 설교가 될텐데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하는 목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저는 성장기에 이동원 목사님을 비롯해서 정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설교를 해주시는 담임목사님들을 만났기 때문에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물론 듣는 것과 실제로 하는 일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설교를 하는 일보다는 듣는 일이 많았던 시절에 적지 않은 교회들을 다녀보면서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를 가든지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는 참 중요하고 핵심적이고 복음적인 내용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느 교회는 부흥을 하고, 은혜를 받는가 하면, 어느 교회는 정말 복음적인 말씀이 선포되는 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은혜에 목말라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가만히 보니까, 그 말씀이 어떻게 들려지느냐와 관계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서 나온 예화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한 10여년 쯤 전에 그 교회에 서울대에 다니는 맹모 학생이 있었다고
마음에 슬픔, 좌절, 분노가 있다면 마음에 있어야 할 빛이 사라진 증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안, 불평, 불만, 억눌림과 쫓김의 감정에 자주 사로잡히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이일 뿐, 대부분이 겪는 고통의 감정입니다. 이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빛이 내 속에 거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찰스 스윈돌은 그의 내면이 빛으로 인도되는 사람을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주권(Sovereignty)에는 작은 단어가 하나 속해있다. 그것은 다스림(reign)”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빛의 세계에서 살지 못합니다. 빛이 떠난 인생 이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한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사건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절하고 인간 왕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한 사람을 택하시고 세워주신 이스라엘 제1대 왕 사울왕의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상 9장은 사울왕의 인물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인물인 ‘기스’의 아들이며 이름은 ‘사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준수’한 소년이었고 모든 이스라
첫째, 6절부터 9절까지 바울은 농사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감에 대하여 논하다가 10절에서 건축의 비유로 전환하면서 이 건축의 메타포(metaphor)는 이 문단의 끝까지 계속 나온다. 둘째, 이 두 가지 비유가 제시하는 강조는 모두 같다. 즉, 바울은 “심거나 기초를 닦거나”하며, 아볼로는 “물을 주거나 세우거나”하고, 고린도교회는 “밭이며 건축물” 로서 교회를 가리켜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것, 즉 교회를 소유하신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맥적 사고가 결여되면 잘못된 해석을 불러온다. 공을 들여 세워야 할 건물은 교회이며 개인의 인격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결과적 상황을 불같은 시험이라고 했기 때문에 개인의 도덕적 생활로 비약하기 쉬우나 문맥상 바울은 여기에서 교회만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세우려고”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은 교회이다. 오히려 바울이 암시하는 바는 교회지도자에 대한 경고이다. 십자가의 능력이 아닌 인간의 지혜와 말의 기교를 의지하는 것은 나무나 풀이나 집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부실한 지도자 일 것이기 때문이다. 2) 당시 상황과 환경 고려 많은 경우 서신서의 본문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내용이
창세기 50장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요셉의 생애는 실로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머나먼 외국 땅에 종으로 팔려 와서 눈물어린 삶을 견디고 하나님의 섭리로 총리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던 요셉. 그가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53년간을 애굽에서 살다가 110세에 죽었습니다(22절, 26절). 주님을 닮은 삶을 살았던 요셉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막을 내리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의 위대한 족장들의 시대도 마무리 됩니다. 위대한 신앙의 영웅들로 가득 찬 창세기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살아내며 보여주었던 요셉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납니다. 그의 마지막은 아버지 야곱처럼 성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장례는 소박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이 그에게 마지막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했습니다. 미이라형태로 처리되어 관에 모셔진 그의 유해는 그의 간곡한 유언대로 훗날 출애굽할 때 함께 떠나서 그가 언약을 받고 늘 바라보았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올라가게 됩니다(24~25절). 요셉은 비록 애굽에
조로아스터교는 페르시아의 예언자 조로아스터(b.660?BC)가 창설한 고대 종교의 하나로서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숭배한다. 조로아스터교를 배화교(拜火敎)라고 하는 것은 불을 숭배하기 때문이 아니라, 제물(祭物)에 불꽃과 냄새를 피우는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1. 창시자와 교세 조로아스터의 본명은 자라투스트라(Spitama Zarathustra)이며, ‘조로아스터’는 그리스식 발음이다. 그의 출생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동부 국경의 옥수스 강 유역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으나 전승에 따르면 그는 열두 살에 집을 떠나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신화 속의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의 천사장과 다섯 천사로부터 8년 동안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77세에 자연사했다. 조로아스터교는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시대(Sasanian Empire, 224-651)에는 잠시 국교가 되기도 했으나 중동 지역에 이슬람교가 들어가면서 교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오늘날은 인도의 뭄바이, 이란, 아제르바이잔 등지에 15만여 신도가 남아 있다고 한다. 2. 주요 교리 사산 왕조 때 만들어진 경전 아베스타(Avesta)에는 유일신 사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르고 애굽으로 돌아온 요셉의 형제들은 불안하고 두려워했습니다(창50:14). 그것은 40년 전에 자기들이 요셉에게 저지를 악한 일에 대해(창37:18~28) 요셉이 복수를 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들먹이며 용서해달라고 엎드려 빌었습니다(창50:16~18). 그런데 형들의 기우와는 달리 요셉은 형들에게 놀라운 관용을 베풀고 용서를 했습니다(창50:19~21). 요셉도 인간인데 왜 형들의 한 짓이 밉지 않았겠습니까? 40년 전에 요셉을 죽이려고 깊은 웅덩이에 빠뜨릴 때 요셉이 매달리며 살려달라고 애걸을 했건만 몰인정하게 죽음의 구덩이에 빠뜨렸던 형들이 아닙니까?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는 그 날을 생각할 때마다 치가 떨리는 사건인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섭리였음을 깨달으면서 형들을 도구로 쓰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임을 알고(창45:5)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관용을 베풀 수가 있었습니다. 혹시 지금 우리도 어떤 일이나 사건으로 말미암아 가슴에 박힌 상처와 고통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아픔
우연히 눈에 들어온 ‘품’이라는 단어가 참 재밌다. 특별히 ‘품’자로 끝나는 말들 몇 개를 연결시켜보니 복음의 핵심들도 발견된다. 생각해보자. 사실 우리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그분의 ‘작품’이 아니던가? 이 우주의 그 어떤 피조물보다 완벽하게 디자인되어 창조된 ‘작품’이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심히도 좋아하셨다. 그래서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다스리라 정복하라” 맘껏 축복도 해주셨고, 그에 맞는 지혜도 듬뿍 주셨다. 하지만 인간은 그 은혜를 망각하고 사탄의 꾐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면서 ‘폐품’이 되었다. 위대한 ‘작품’에서 쓸모없는 ‘폐품’으로 전락했다. 하나님 주신 소중한 권세들도 다 잃어버렸다. 세상을 다스리긴 커녕 세상에 굴복하며 사는 존재, 예배할 줄도, 순종할 줄도 모르는 연약하고 무능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자 인간은 자구노력(自救勞力)을 시작했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끌어올리려 애쓰기 시작했다. 인간의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문명을 발전시켰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상품’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고매한 지식을 더더 함양하고, 멋진 외모를 더더 추구하며, 기술과 능력을 더더 개발함으로써 자신의 효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기반을 든든히 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난 받을 일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부한 자(Rich)”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한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富)라는 용어는 성경적 의미와 세속적 의미를 달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 부를 복의 기준으로 이해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부유함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경고의 말씀은 디모데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물질이 가진 부정적 측면을 끊임없이 경고해 주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누구나 “부”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많이 가지든 아니면 적게 가지든 물질을 소유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유한 물질로 무엇을 위해 사용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한 그 물질은 결산의 날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재물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물질을 사용했는지 그 결과로 영원한 세계를 위한 터를 쌓는 일이 됨을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