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중세시대는 경제적으로는 토지를 중심으로 하는 봉건주의체제, 정치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에 의한 통치, 신학적으로는 스콜라주의 신학체계, 교회적으로는 교황을 정점으로 해서 유럽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가 되어 있던 안정된 사회였다. 그러나 두 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The Crusade, 1095~1291)을 겪으면서 유럽사회의 기저는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유럽의 지식인들이 희랍의 고전들을 재발견하고 접하면서 14~15세기에 르네상스(Renaissance, 문예부흥, 재생, 재창조)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유럽사회는 점차 중세 봉건사회의 틀을 깨뜨리고 근대사회로 변모하기 시작했다.16세기 유럽에서 전개되었던 종교개혁운동(Reformation)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로마가톨릭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중세적 안정(medieval stability)을 깨뜨린 사건이었고, 이단적이고 분리주의적이고 마귀적인 운동이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하나님께서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를 더 이상 방관하실 수 없어서,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던 개혁가들을 동원하여 당시의 교회를 개혁하셨던 사건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
오늘은 이렇게 인사하고 싶습니다! 꿀 모닝! 국적 불명의 언어로 인사하는 게 예의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요즘 따끈한 꿀 물 한 잔 대접하는 심정으로 그런 인사를 드려봅니다. 하루가 낮과 밤이 교차하고 서로 공존하듯이 삶에는 언제나 위기와 기회가 교차하고 씨줄과 날줄이 얽혀 있듯이 아픔과 기쁨이 어우러지고 서로 부대끼며 살아갑니다. 마치 한 잔의 커피 속에 쓴 맛과 떫은맛이 있는가 하면 그 속에도 나름대로 단 맛과 구수함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이 우리네 삶에는 고통과 절망만 있는 게 아닙니다. 사과 속에 씨가 들어 있듯이 시련 가운데에도 희망이 있고 뜻밖의 위로와 기쁨이 녹아 있습니다. 요즘 유난히 어깨가 무거워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꼭 한 가정을 책임진 가장이 아니더라도 젊은이들과 여인네들의 모습에서도 쉬이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따금씩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고 마음을 가라앉게 할 때, 그래서 일상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을 때, 상처 받은 작은 한 마리 새 같이 외롭고 답답할 때가 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떤 이는 여행을 떠나고 또 어떤 이들은 먹는 걸로 풀기도 합니다. 고상하게 클래식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술의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가진 경향성이나 사상을 흔히 ‘주의(主義)’라고 말한다. 인문학에서의 계몽주의, 인상주의, 또는 심미주의; 사회 경제학에서의 공산주의와 그에 맞선 자본주의, 그리고 신학에서 말하는 정통주의와 자유주의 등등이 바로 우리가 ‘주의’라고 일컫는 이데올로기이다.사람들은 대게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삶의 주인으로 믿으면서도 신앙이나 신학의 어떤 주의나 아류(亞流)에 소속 되려는 경향성을 가진 것 같다. 신학자들 간에도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상대방의 신앙과 신학까지 정통주의, 자유주의, 복음주의 등의 신학사조 범주에 한정해서 이해하고 평가 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실제로, 학자들은 때로 구원론에서는 칼뱅이나 아르미니우스의 견해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종말론에서는 천년왕국에 대한 여러 이론 중 하나에 속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을 느낀다. 그러나 그 어떤 주장이나 신학적 견해라고 할지라도 만인이 수용할 수 있는 온전한 이론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어떤 학파나 사조에 묶이는 것을 경계한다.그런 학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성경중심주의’라 하거나, 어떤 ‘주의자’가 아니라 단순히 복음을 중요시한다는 취지에서 스스
하나님의 사람 에녹의 아들로 태어난 므두셀라의 히브리식 이름은 “메투 셀라흐”입니다. 이는 “창 던지는 자”란 의미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성서강해자인 아더 핑크는 “그가 죽으면 마지막 (심판)이 온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매우 깊은 영적 비밀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리라”고 아모스 3장7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300년간을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에녹에게 하나님께서 장차 되어질 중요한 사건과 그에 따른 계획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 계획은 다름 아닌 세상을 쓸어버리시는 홍수심판의 계획입니다(창6:5~7). 하나님으로부터 그 놀라운 계획을 듣고 에녹은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므두셀라입니다. 그래서 에녹은 그 때부터 경건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남은 평생을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죽으면 마지막 심판의 때가 온다는 깊은 뜻으로 자기 아들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므두셀라가 아들인 라멕을 낳을 때가 187세였습니다. 라멕이 노아를(므두셀라의 손자)
우리 선조들이 침례파라는 조롱 섞인 이름으로 불리어진 아픈 이름을 무엇 때문에 자랑스러워했을까요? 한국에서 선교역사를 선점해서, 교육, 의료선교, 아니면 많은 인재를 배출했거나 사회참여 때문일까요? 이 질문에서 우리는 흔쾌하게 답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습니다. 몇 년 전 타 교단 지도자 한분으로부터 저녁식사를 초대를 받아 식사 후 산책 겸 카페를 찾으면서 서울 중심부에 있는 자기 교단 빌딩들을 소개하고 이어서 교육기관들과 병원들을 말하는 나도 모르게 ‘엄청나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교단의 자산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는 순간 비교할 수 없이 빈약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특별한 보물은 무엇일까요? 저는 누구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사랑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여행자로서 로마에서 추방당한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행색은 초라했으며,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고린도인들의 문화, 지적욕구, 그리고 철학의 수준에서 볼 때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 무지한 말들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도시에 가져간 것은 매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이 이름이 부연되지 않고 등장한다고 해도 이는 동일한 인격성을 가진 존재의 현존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그러나 J. A. Zisler는, ‘이름’은 단지 예수의 부재를 극복하거나 또는 예수를 대체하는 수단이 아니라 복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8:12; 9:15, 16). 이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이 지속되기 때문에 승천하신 예수를 대체하는 수단으로 ‘이름’은 적절한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J. A. Zisler, “The Name of Jesus in the Acts of the Apostles,”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vol. 4 (1979): 28-41.. Joseph A. Fitzmyer는 ‘이름’이란 용어의 사용은 구약의 전통(삼상 25:25)을 반향(echoes)하는 것이며 예수를 지칭하는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표상(real and effective representation)이라고 하며Fitzmyer, The Acts of the Apostles, The Anchor Yale Bible, 266., H. Douglas Buckwalter는 구약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그의 인격과
우리는 부흥이란 개념을 너무 좁은 의미에서만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짙습니다. 다시 말하면 개교회의 규모가 커지고 신자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만을 부흥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네 교회만 채우려는 유혹을 받게 되고 자연스럽게 수평이동을 눈감아 주고 애써 합리화 시키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좀 더 넓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차원에서 부흥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교회만 아닌 모든 교회가 함께 성장하고 영혼구원 자체에 목적을 두고 서로 간에 경쟁하지 않으며 사랑으로 섬기는 부흥 말입니다. 숫자와 크기 등의 외연 확장 차원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돌리고 불신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기쁨과 열매를 진정한 부흥으로 삼게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기독교인이 아무리 많게 봐준다고 해도 채 20%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80% 이상의 사람들이 전도 대상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복음을 전함으로 인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영혼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부흥으로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성장의 속도가 느린 것 같고
내비게이션은 운전자에게 큰 도움이 되지만 동시에 잘못된 문장과 발음이 많아 우리말 보존에 염려되는 바도 없지 않다. 사례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1. “약 300미터 전방에 어린이 보호구역입니다.”‘전방’[후방]은 전쟁 때 사용하던 옛말이므로 ‘앞에’로 고쳐 말해야 하며, 어린이에는 강세가 첫 글자 ‘어’에 있으므로 ‘이린이’라고 해서는 안 되며 ‘어’에 힘을 주어 ‘어린이’로 발음해야 하며, “전방에 … 입니다”라는 문장은 구조가 잘못되었다. “약 300미터 앞에 어린이 보호구역이 있습니다.” 해야 한다.2. “전방에 교통사고 다발지역이 있습니다.”‘다발지역’ 역시 ‘전방에’처럼 어색한 옛말이므로 ‘잦은 곳’으로 고쳐서 “여기는 교통사고가 잦은 곳이니 주의 하세요[하시기 바랍니다]” 하면 좋을 것이다. 3. “왼쪽 방향 지하도로 진입하여 주십시요.”방향은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말인데 지하도는 좌회전해서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진행 방향 앞쪽에 있으므로 ‘왼쪽 방향’이라 해서는 안 된다. ‘왼쪽 방향’은 삭제해야 한다. 또 “진입하여 주십시요” 하고 부탁할 것이 아니라 ‘진입 하세요’ 해야 한다.4. “약 1킬로미터 앞에서 오른쪽 방향입니다.”도로가 오른 쪽
이 땅에 태어난 사람에겐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첫째는 반드시 죽어서 천국에 가야지 절대 지옥에 가면 안 됩니다. 둘째는 천국 가는 것으로만 만족해선 안 되고 천국에서 하나님께 큰 상을 받아 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래 전에 어느 연로한 남자 집사님 가정에서 가족들을 한자리에 다 모아놓고 유언하는 자리에 저도 불러 동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유언의 내용은, 집사님이 죽으면 현재 가지고 있는 재산을 자식들에게 어떻게 분배할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고, 마지막에는 교회 사택 구입 시 은행 대출 받은 5천만 원 빚을 갚기 위해 헌금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그 집사님은 2년 후에 돌아가셨고 그 분의 유언대로 5천만 원을 헌금하여 사택 빚을 갚은 적이 있습니다. 그 집사님은 지금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 분을 통해 받은 신앙의 교훈은 지금도 여전히 저의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자녀들에게 분배한 재산은 천국에서 상급이 안 될지라도 하나님께 헌금한 물질은 천국에서 상급으로 돌아갔을 거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구원의 확신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구원 받았으면 이 한 목숨 사라질 때까지 천국에서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실 상급에 눈을 떠야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심판’의 개념은 현재의 결단에 종속된다. 이 시대가 종말의 시작이라는 내용을 포함하면서도, 그 종말의 결과에 대한 강조는 부분적이다. 즉, 베드로의 요엘서 인용(2:16~21)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새로운 시대는 궁극적으로 종말을 지향하면서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설교이다. 요엘의 예언 성취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는 성령의 강림에 따른 선포와 더불어 성령의 영원성과도 관련되며, 이 영원성을 가진 성령시대가 이미 시작된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심판’은 현재를 위한 결단의 촉구 의미를 내포한다. 장차 도래할 종말의 시대를 전제로 하는 성령시대는 종국적인 심판의 서곡이다. 이에 따라 바울은 “의, 절제, 장차 올 심판을 강론”한다(24:25)고넬료의 사건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재판장’이란 표현 속에 내포한다(“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이 표현도 현재적인 구원의 견인과 관련된다.. 심판은 종말을 전제로 현재적인 구원에 대한 선포로 기능하는 것이다. IV. 예수: 구원의 본질구원의 본질은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