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과 모양- 책에 대한 어휘로는 책(冊) 전(典), 서(書), 본(本), 도서(圖書), 문헌(文獻) 등이 있고, 합성어로는 간책(簡冊), 죽책(竹冊), 엽책(葉冊), 서책(書冊), 첩책(帖冊), 보책(譜冊), 책자(冊子) 등 이 있다. 보는 바와 같이, ‘책(冊)’은 대나무 조각을 엮은 책(策)의 모양에 따라 만든 글자이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전(典)’ 자는 상 위에 놓여있는 책의 모양을 보고 만든 글자로서 합성어로는 전책(典?), 전적(典籍), 고전(古典), 원전(原典), 법전(法典), 경전(經典) 등이 있다. <설문 해자(說問解字)>. 책의 장정(裝幀) 장정은 크게는 동양서적을 제본하는 동장(東裝)과 서양서적을 제본하는 양장(洋裝)이 있다. 동장에는 두루마리 모양의 권자본(卷子本), 나비 날개처럼 접은 형태인데 종이 중간에 글을 쓰고 바깥을 접어서 풀로 붙인 절첩장(蝴蝶裝)과 호접장(蝴蝶裝), 풀을 사용하지 않고 종이를 접어 구멍을 뚫고 끈으로 묶은 포배장(包背裝), 쇠침으로 여섯 곳에 구멍을 뚫어 묶는 족보 류 제본방식의 선장(線裝)등이 있다. 양장으로는 천이나 두꺼운 종이 표지를 써서 장본(장서)을 만드는 양장제본, 제본
얼마 전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의 배다른 장남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테러를 당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줬던 이 사건으로 인해서 많이 회자된 말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스탠딩 오더(standing order)”이다. 스탠딩 오더란 명령권자가 특정 명령을 내린 후 또 다른 취소 명령을 거론하지 않는 이상 지속적으로 유효한 명령을 뜻한다. 과거 김정은은 김정남의 살해 숙청을 지시한 이후 따로 취소 명령을 내린 바 없기 때문에 수년간 북한 정보당국 등이 끊임없이 살해를 기도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고 권력자의 복심을 실천하며 성취하기 위해서 그의 부하들이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결과 이러한 테러사건으로 표출됐다고 한다. 흔히들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얻어 보다 높은 서열의 권력을 얻기 위해서 경쟁하는 것을 “충성경쟁”이라고 한다. 권력자나 권력기관에 자신을 어필해 개인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 김일성 동상에 쌓인 눈을 맨손으로 닦아내는 사람들, 관제데모에 참여한 실적에 따라 예산을 조정하겠다는 지침을 내렸다는 청와대 권력자들의 소문, 시진핑의 눈에 들기 위해서 사드보복의 일환으로 한국 기업들을 자발적으로 괴롭
8. 지역교회의 독립성과 자치권 에베소서를 비롯해 일부 서신서들에서 “우주적 교회”가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도행전과 대다수의 서신서들에 등장하는 신약성서적 교회는 “지역교회”를 가리킨다. 일정한 지역이나 도시에 세워진 예수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갈라디아교회들, 골로새교회, 고린도교회, 로마교회 등은 지상에 세워진 지역교회들이었다. 지역교회는 상호 독립적이었고 자치적이었다.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A Spiritual Body of Christ)이었다. 1,000명이 모이는 교회도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요 10명이 모이는 교회도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다. 사명과 책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교회의 본질에 있어서는 1,000명이 모이는 교회나 10명이 모이는 교회나 각각 하나의 독립된 교회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침례교인들은 각 지역교회는 상호 평등하다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못박혀 죽으신 십자가 형틀은 평평한 땅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들 간의 교제를 위해 그리고 하나의 지역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적인 선교나 교육 사역을 수행하기 위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본 갈라디아서의 구원론-9 (3)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루터는 바울의 말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어떤 구별을 하여야 한다고 한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의 일 때문에 저주가 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전적인 강조는 “우리를 위하여”라는 어법에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격에 관한한 무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무에 달리지 말아야 했을 분이시다. 그러나 율법에 의하면 모든 강도는 십자가에 달아야 하였으므로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야 하셨다. 그는 죄인과 강도를 짊어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는 이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가장 기쁜 위로이다. 그리스도는 못 박히셨을 뿐만 아니라 죽으셨다. 그러나 신적인 사랑으로 죄를 그에게 지웠다. 죄가 그에게 지워졌을 때 율법이 와서 말했다. “모든 죄인은 죽게 하라! 그러니 그리스도여, 만일 당신이
가이우스 카이사르(Gaius J. Caesar, 100~44BC)는 로마의 군인이요 정치가로서 국정운영 방식을 황제와 원로원이 협의하는 공화정(共和政)을 폐지하고 황제 중심의 재정(帝政)으로 바꾸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실현하려다가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됐다. 그의 부하 브루투스가 검을 빼 든 순간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도?” 하고 절규하며 칼을 맞았다. 청년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안수 받고 처음 전도여행을 떠날 때 함께 길을 떠났으나 위험하고 힘든 일정을 견디지 못하고 밤빌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 일이 있었다(행13:13). 그 후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려고 했으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우리를)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반대해서 결국은 두 사람이 갈라져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시리아와 길리기아로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다(행15:38~41). 바울에게는 마가가 책임감도 없고 철도 들지 않은 젊은이로 보였을 것이다. 이 일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의 인간관계도 끊어져 성경에는 이 일 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했다는 기록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전국 방방 곳곳에 주의 종들을 보내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대도시에도, 중·소도시에도 그리고 농·어촌과 여러 섬들 안에도, 사람이 거주하는 곳에는 대부분 교회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목적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한 번은 진도에서 2시간 정도 배를 타고 내병도라는 섬에 가 본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11세대만 살고 있었는데, 교회에 나오는 가정은 4가정만 나오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목회자부부가 두 자녀를 데리고 힘겹게 사역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으로 보내주신 사역지에서 제각기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힘써 살아갈 때 훗날 하나님께서 교회 규모를 떠나 우리들 각자에게 공평한 상급을 주실 줄 믿습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주어진 목양지에서 인내하며 꾸준히 사역하는 분이 있는 반면에, 어떤 분은 개척교회만 세우며 다니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가 병들고, 무너지고, 닫힌 교회만 찾아다니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데 한 평생을 보낸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부흥사로, 어떤 분은 기도원과 병원 원목, 교목, 군목, 선교사 등 특수사역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곳곳
더 이상 국가는 특정 종교와 끈끈한 유대를 가져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 다시 말하면 국가가 특정종교를 박해하거나 편애하지 않아야 한다거나 교회문제에 개입하거나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헌법적인 규정으로 처음 제정했던 것은 1791년에 공포된 미국의 제1차 수정헌법(The First Amendment)이었다. 연방헌법(Federal Constitution, 1789) 제6조에서는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 종교가 시험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두고 있었다: (미연방헌법 제6조), “미국 내에서 공직이나 공적인 재단에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 그 자격요건으로서 어떠한 종교적인 시험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공무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에까지는 아직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같은 정치인이 앞장서서 제1차 수정헌법을 제출하여 미국 연방의회에서 통과가 됐다: (제1차 수정헌법), “의회는 국교의 제정에 관해 그리고 자유스러운 종교적인 활동을 금지하기 위하여 어떠한 법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 때 미국의 침례교 지도자들을 비롯해서
루터는 1519년 판에서 율법과 복음은 다르고 율법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선포하고 율법은 죄의 지식이라 했다. 그러나 복음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은 이뤄졌으며 완성됐다는 것을 선포한다고 했다. (1) 서론(서신의 중심사상)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 맨 앞에 상당히 길게 서술한 “서신의 근본사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의 논점을 ‘그리스도의 의’와 ‘온갖 종류의 의’에 관해 완벽한 지식과 그 차이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바울이 믿음, 은혜, 죄사함, 그리스도의 의에 관한 가르침을 확립하고자 한다고 본다. 여러 종류의 의에 대해 ① 정치적(시민적)인 의: 황제, 제후, 철학자들과 법률가들이 다루는 의, ② 의식과 관련된 의: 행동거지들의 교정에 꼭 필요한 예법들과 이 세상 삶에 관한 관찰들, ③ 율법(십계명)의 의: 모세가 가르치는 의, ④ 하나님의 의(믿음의 의, 그리스도의 의): 모든 것들보다 뛰어난 의가 있는데 ④번의 하나님의 의는 ①-③번의 다른 의들과 상반되기 때문에 부지런히 구분해야 된다고 한다. 하나님은 ④번의 의를 행위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전가한다고 한다. 그래서 ④번의 의를
이사야서 55:3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세우시면서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을 지나치시리만치 사랑하셨던 하나님은 다윗에게 “확실한 은혜”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한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게 확실하시답니다. 사람들도 보면 매사에 확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확실하게 합니다. 두 번 잔소리 할 필요가 없게 깔끔하게 일처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시원해서 좋습니다. 지켜보는 사람들마저 덩달아서 신이 나게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찜찜합니다. 확실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게 일어나 돈 관계를 처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은 대개의 경우, 모든 일을 그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모든 일을 확실하게 하는 스타일입니까? 정확하게 분명합니까? 좀 표현이 지나쳤습니까? 칼 메닝거의 표현을 빌리면 “사실보다 중요한 게 태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대강 주시지 않습니다. 기왕에 주실 것이라면 분명하고 확실하게 주
침례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 그리고 신자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옛 사람이 죽고 장사지낸 바 되고 새 사람으로 부활한 것을 가장 잘 상징해 주는 침수례의 방식으로 뱁티즘을 베푼다. 만약 미래의 어느 날 재림하신 예수님이 한국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유아세례와 세례를 보신다면 의아해 하지 않으시겠는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뱁티즘의 방식을 보시고 신기해 하지 않으실까? 침례교인들은 주의 만찬도 상징적인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의미로 베풀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신앙고백에 근거한 신자의 뱁티즘을 받은 신자들에게 주의 만찬의 떡과 잔이 베풀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루터교회에서는 “공재설의 입장에서 떡과 포도주에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임재해 있다고 믿는다. 개혁교회(장로교회)에서는 ”영적 임재설“의 입장에서 실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해 계신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임재한 떡과 포도주는 거룩해져 있다고 생각해서 주의 만찬을 거룩할 성(聖) 자를 써서 성만찬이라고 부른다. 성만찬 후 남은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영이 임했
중세의 스콜라 신학의 실재론은 보편개념의 강조를 가져오고 개체의 종속성은 교황중심체제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당했다. 플라톤적인 신학체계에서는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더 우월하기에 제후나 황제보다도 주교나 교황이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또한 스콜라 신학은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는 특징이 있기에 하나님의 존재와 말씀을 의심하는 부작용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로 행동을 선택할 수 있고 선행을 하여 공덕을 쌓아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함으로 오히려 인간을 율법 아래 매이게 하고 인간의 공덕을 통한 구원의식을 가지도록 조장했다. 결국 이러한 중세의 가톨릭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를 배제시킨 비성경적인 인본주의 구원론으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교황을 앉히고 성령님을 마리아로 대체시킨 사탄적인 바벨론 종교집단으로 전락하게 됨으로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게 했다. 가톨릭의 구원관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나오 는 공로(합일치공로, 신인협력설 채택)교리와 오직 성서만으로의 신앙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칭의’를 받으려면 믿음과 함께 선행이 필수적이며 이 믿음
루터가 출생한지 6년 후인 1489년에 독일 남부 하르츠 산맥의 산간 마을 스톨베르크에서 토마스 뮌처(Thomas Muenzer, 1489-1525)라는 한 비범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수도생활을 하는 중에 루터의 95개 조항을 읽고 감명을 받아 바로 비텐베르크로 가서 루터를 만났다. 두 사람이 얼마 간 대화를 나눈 후 루터가 뮌처에게 준 첫 번째 충고는 종교개혁을 정치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뮌처는 1509년 라이프치히에서 벌어진 루터와 요한 엑크 간의 공개토론회에 참석하고, 이듬해에는 츠비카우로 가서 “츠비카우의 예언자들”이라고 불린 일단의 신령주의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성경보다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존중하고 시한부 재림을 주장하는 공동체로서 멜란히톤과 루터에게는 “광신자들”이라고 비난 받은 무리였다. 뮌처는 여기서도 오래 견디지 못하고 보헤미아의 프라하로 가서 과격 혁신파로 알려진 타보르파(Taborties)와 손을 잡고 “프라하 선언문”(Prague Manifesto)을 만들어 사회운동을 폈다. 그러나 주민들로부터 냉담한 반응이 되돌아오자 바로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봉건 제후들을 대상으로 투쟁했다. 그는 이전에도
온 국민이 그렇게도 외치고 기다리던 세월호가 3년의 숨었던 시간을 이기듯 바다에서 올라왔다. 그리고 진도 해변을 떠나 목포 신항 부둣가로 옮겨졌다. 목포역을 향해 지나다 보면 덩그러니 엉덩이만 내밀고 누워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눈물과 통곡을 주고도 “몰라요” “생각 안나요” 요사이 유행어처럼 나오는 말을 하는 듯 누워있다. 그 모습을 보려고 수 많은 인파가 모여 들고 있다. 차창으로 보이는 모습만 봐도 괘씸하고 분통이 터져 쫓아가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다. 직접적인 세월호 사건으로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과 함께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진도 안에도 알게 모르게 많은 상처를 가지고 지금도 아파하는 가족들이 있다. 늦게 진도 사람이 되어 그 아픔을 다 알 수 없지만, 함께 아파했던 사람들은 진도항(팽목항)에 분향소를 설치해 놓고 정작 배가 올라 왔다는 뉴스를 접하고도 “배 보기도 힘겹다”며 고개를 돌린다. 진도 어디든 필요한 곳이면 마을 회관이나 공공장소를 이용해 숙박을 하도록 배려하고 함께 아픔을 나누었다. 온 힘으로 봉사하고 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인은 모르지만 사고 후부터 바닷가 양식 수확이
남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제국과 바벨론제국에 의해 멸망당할 당시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들이 외적들의 침략에 의한 하나님의 징계를 예언했다. 특히 이사야는 외부로부터 오는 징계 외에 내부로부터 촉발되는 징계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이사야 29장에 기록된 ‘봉한 책’과 ‘사람의 계명’은 패역한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내적인 징계의 기이한 방식이었다(사29:14). ‘사람의 계명’으로 인한 징계는,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 만들어진 율법에 의해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이 가려지게 함으로써, 영적인 지혜와 총명이 사라지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영적 암흑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탄생 전까지 약 400여년간에 걸쳐 진행된 이른 바 ‘영적 암흑기’와, 지금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바라보지 못하는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아둔함의 징계 속에 이 예언의 말씀은 성취되고 있다. ‘사람의 계명’은 마태복음 15장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직접 인용하심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사야 29:13에 기록된 ‘사람의 계명’이 마태복음 15:2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의해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말로
“장차 택함받을 자들”과 “장차 믿게 될 자들”도 (비가시적) 교회로 간주한다는 말인데, 그들은 아직도 여전히 예수 믿지 않는 자들, 즉 불신자들이고 교회방문자들이고 교회의 손님들이고, 그래서 전도대상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교회당 안에 들어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함께 교제에 참여하고 함께 기독교적인 활동에 열심을 낸다고 할지라도 아직은 교회가 아닌 것이다. 교회는 회개하고 예수 믿어 영적인 출생(거듭남)을 경험한 자들의 공동체라는 것이 침례교인들의 교회관이다. 4. 우주적 교회와 지역교회 침례교인들은 교회에는 우주적 교회와 지역교회가 있다고 믿는다. 지역교회란 지상에서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모이는 예수 믿는 신자들의 교제요 공동체를 말한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죄사함받고 구원받고 영생을 얻은 신자가 신앙고백에 근거한 침례를 받아 들어가는 공동체가 지역교회다. 지역교회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터전이다. 중생과 칭의는 예수 믿은 신자가 개인적으로 얻는 것이지만, 성화는 교회라고 하는 신앙공동체 속에서 신자들이 서로 교제하며 서로 격려해 공동체적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다. 지역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너희(신자들)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