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회나 총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지역교회의 대표가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참석하는 것이다. 개인자격으로 지방회나 총회에서 투표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곳들에서의 결정이 지역교회를 당연히 구속하지 않는다.한국침례교회의 경우 지방회나 총회 참석자를 “대의원”(Delegate)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명칭에는 “대표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지역교회의 자치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 남침례교에서는 “사신”(Messenger, 심부름꾼, 전달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역교회의 대표가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참석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지방회나 총회의 결정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지역교회의 결정이다. 지방회와 총회는 지역교회를 향해 군림하거나 명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역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관 관계자들과 책임자들은 명심할 필요가 있다. 평소에 필자는 지역교회들로 하여금 교회의 재산(건물과 대지 혹은 토지)을 총회에 가입하게 하고, 재산을 가입한 교회들의 목회자들에게만 피선거권 혹은 피임명권을 부여하고 있는 현행 침례교총회의 제도는 매우 침례교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역교회의 재산은 지역교회 회중의 것이며 성령님
동성애(homosexuality)는 동성 간의 애정 행위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 말에는 정신적으로 서로 의존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동성 간의 성관계(sex)를 의미한다. 남성간의 동성애자는 ‘호모섹슈얼리티’를 줄여서 ‘호모’(homo)라고 칭하고 여성 간의 동성애자는 ‘레즈비언’(lesbian)이라고 한다.‘레즈비언’은 그리스의 레스보스(Lesbos) 섬에 살던 여류 시인 사포(Sappho)가 동성애자였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성애자 뿐 아니라 짐승과의 변태적 성관계인 수간(獸姦) 까지 포함해서 광범위한 표현으로는 ‘소도미’(sodomy)가 사용된다. 알다시피 ‘소도미’는 구약성서시대 소돔[과 고모라]에서 성행하던 변태적이고 퇴폐적인 성관계를 통칭하는 말이다. 성(性)이란 부부 간에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인데 근래에는 이것이 공론화되어서 어떤 케이블 텔레비전에서는 미혼남녀들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앉아서 성행위를 대화의 주제로 삼아 서슴없이 이야기 하는 등 우리 사회가 너무 야(野)해 진 것 같다. 과거에는 동성애 등 부자연스러운 성관계는 감추거나 부인하고 부끄러워하던 것이 근래에는 ‘커밍아웃’(coming out)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하나님의 형상은 의와 진리와 거룩함(엡4:24)이고, 다른 동물들의 특성을 능가하는 모든 특성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영적 형상, 이성적 형상, 도덕적 형상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한 모세언약의 하나인 제6계명은 하나님이 살인을 금지시키고 있음을 명백히 한다. 살인은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멸시킨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어떤 경우에도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절대적 명령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 예로 민수기35:16-21에는 고의로 살인한 자들을 죽일 것을 명령하고 있다. 출애굽기 21:12-14, 레위기 24:17-21, 신명기 19:4-13은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이 지니는 의도와 한계를 보여준다. 구약시대의 히브리인들에게 우연한 살인, 정당한 살인, 전쟁에서의 살인, 그리고 사형은 살인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Peter Saunders는 “제6계명은 비합법적인 살인이나, 고의 또는 적으로 행해지는 살인을 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비합법적인 살인을 금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죄 없는 사람을 고의적으로 적의를 가지고 죽이는 것을 중요한 범죄로 보신다. “거짓 일을
목사는 교인들을 자신의 양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양무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목사는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니, 하나님의 양들을 말씀으로 먹이고 사랑으로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요 21:15-17). 2. 교회회원 개념한국교회와 한국침례교회에서는 교회회원 개념이 거의 없거나 희박한데, 민주적인 회중주의 정치가 교회 내에서 제대로 실천되기 위해서는 “교회회원”(Church Membership) 개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결코 교회당이 아니다. 교회당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예전에 참여하고 교제를 나눈다고 해서 참석자들 모두가 교회는 아니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에 대한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침례받은 신자들, 다시 말해서 중생한 자들을 교회회원으로 인정하는 원칙(Regenerate Church Membership)이 침례교회에서 세워져야 한다.교회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신앙고백에 근거한 침례를 받아야 한다(By Believer’s Baptism). 이미 다른 침례교회에서 그러한
나비 /손동연 시인 봄이찍어낸우표랍니다 꽃에게만 붙이는 우표랍니다 감자꽃 /권태웅 시인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파보나마나 하얀 감자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새 봄 /김지하 시인 벚꽃 지는 걸보니푸른 솔이 좋아푸른 솔 좋아하다보니벚꽃마저 좋아 그 꽃 /고은 시인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것이 내 인생에 던진 의미는 뭘까? 얼마큼의 가치일까? 고난주간과 부활을 맞아 그 십자가를 다시 묵상해본다. 우선 내게 십자가는 확실히 ‘더하기’였다. 생긴 모양처럼 실제로도 그랬다. 내 어릴 적 삶의 곤고와 빈궁과 핍절함이 십자가를 만나면서 참 많이 더해졌다. 참 많이 풍성해졌다. 부요해지고 넉넉해졌다. 아무 것도 없던 내 어린 시절에 활기를 불어넣은 건 십자가였다. 내 마이너스 인생을 플러스 인생으로, 적자인생을 흑자인생으로 바꿔놓았다. 십자가를 몰랐다면 결단코 지금의 내 삶은 만나지 못했으리. 또 십자가는 ‘품’이었다. 지치고 화나고 억울하고 외롭고 좌절했던 나의 고3시절, 내 모(母)교회 지하기도실에 들어가 앉아 홀로 강단의 십자가를 바라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그 십자가는 정말 넉넉한 품이었다. 나를 충분히 안으시고도 남음이 있을만큼의 두 팔이셨다. 그날 안긴 그 십자가 품은 참으로 따뜻했다. 그 후로도 십자가의 자세는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열중쉬어가 없었다. 차렷도 없었다. 두 손을 소매 속에 마주 넣고 근엄하게 팔짱낀 모습 역시 없었다. 언제나 두 팔을 벌린 그 모습 그대로셨다. 또 십자가는 ‘다리’였다. ‘Rel
3. 한국적인 상황장로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 상황에서, 장로교회의 직분과 교회행정의 관행이 침례교회를 비롯하여 여타 교단들의 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에는 직분에 있어서 엄청난 인플레이션 현상을 빚고 있다. 신약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직분들이 교단헌법에 규정되어 있고 또한 교회에서 공공연히 시용되고 있다. 성경에서 집사는 안수집사만을 의미하는 직분인데 서리집사 제도가 한국교회 전체에 만연하고 있다. 이는 목회와 교회행정에 있어서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인 목사들부터 성경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있지 않는 관행이다. 성경에도 없는 “서리집사”는 원칙적으로 1년 임기의 임시직분인데, 한번 서리집사로 임명받으면 그 직분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평생 따라 붙게 된다. 또한 “권사”라는 직분도 서리집사 활동을 오랫 동안 한 여성도들에게 담임목사의 임명에 따라 부여하는 직분이다. 목회서신들에는 권사라는 직분이 언급된 적이 없다. 이렇게 목사-장로-안수집사-집사-성도, 권사-집사-성도 등의 직분명칭이 생기면서, 한국교회에서는 직분이 마치 계급과 명예의 상징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성경이 말하는 직분은 어디
막달라 마리아의 경험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를 대면하는 경험 곧 부활현현의 경험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다시 보게 하고 또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부활현현의 경험은 그들의 신앙과 사상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정도로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복음서 기자들은 각각 자신의 입장에서 부활현현 사건들을 제시한다. 요한은 이것의 중요성을 더 크게 인식하고 제자들의 이 경험을 세 번에 걸친 사건으로 전달한다. 마리아의 경험이 개인적 사건인 반면, 제자들은 그들이 함께 모여 있는 가운데서 공동체적으로 부활현현을 경험한다.예수의 첫 번째 부활현현에 관한 요한의 보고는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서 일어난 것으로 제시된다. 요한은 먼저 제자들이 부활현현을 경험하던 때와 장소를 설명한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20:19). “이 날”은 예수의 부활의 빛이 죄와 죽음의 어두움을 물리치기 시작한 “그 날”이라는 종말론적 함축을 갖는다. “안식 후 첫 날”이라는
담배는 마야인들이 종교의식에서 사용하던 것을 남아메리카를 발견한(1492년) 콜럼부스가 선물로 받아 가서 스페인에 보급되었고, 다음 세기(16)에는 영국을 통해 유럽에 보급되면서 한 때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때(1590년) 보급되었고, 전 후 광해군이 일본에서 담배씨를 구입해서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1602년). 담배의 형태는, 잎을 말아서 제조하는 여송연(呂宋煙, cigar)과 파이프에 넣어 피우는 ‘토바코’ (tobacco)와 우리가 ‘담배’라고 부르는 ‘궐련’(cigarette)이 주종이다. 담배의 해악1970년대에 발표된 한 통계에 의하면 미국 청소년의 절반이 18세까지 거의 습관적으로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2013년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흡연자는 인구비례로 남성이 42.1%, 여성이 6.2%로 다른 나라에 비해 흡연율이 매우 높은 편이다. 담배 속의 니코틴은 폐를 통해 혈액으로 흡수되어서 뇌의 도파민 계 신경을 자극해서 한시적으로 쾌감을 느끼게 하거나 각성을 촉진해서 불안감과 긴장을 이완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효과는 일시적 느낌일 뿐이며 흡연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에 빠져
‘엔하위키미러’에 실린 설명이다. 과거에 어린이들이 많이 사용하던 ‘동무’라는 단어는 ‘친구’의 의미로서 본래 한국 전역에서 쓰이던 말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공산혁명을 위하여 함께 싸우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의미변형을 시켰기 때문에 강한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해왔던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동무라는 단어가 거의 죽은 말이 되다시피 하였고, 이 단어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춘천 파출소장 딸 살인사건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오랜 세월 옥살이를 했던 정원섭 목사에 따르면, 1964년 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 교회 전도사로서 ‘모여라 동무야 여름성경학교로’라는 현수막을 교회 앞에 내걸었다가, ‘동무’라는 말을 썼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온종일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적인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70년대에 제주도에 살던 고교교사 한 사람이 술에 취해 동무라는 말을 내뱉었다가 전기고문까지 당해서 정신병자가 된 사례가 있다고 한다. 남한에서는 동무가 ‘친구’로 대체되었다. 순 한국말로 대체하고 싶을 때는 ‘벗’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다만 ‘어깨동무’, ‘길동무’, ‘말동무’ 등과 같이 합성어로서는 자주 사용되고 있다. 문제 청소년이나
안락사의 분류는 그 생명체의 의사에 따라, 시행자의 행위 방법에 따라, 또 윤리적인 관점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생명체의 의사에 따라(1) 자의적 안락사(Voluntary Euthanasia) : 생명 주체의 자발적 의사에 따르는 안락사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다시 두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어떤 생명 주체의 명령, 의뢰 또는 신청 등의 적극적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의뢰적 안락사라고 한다. 둘째, 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나 안락사를 승낙하여 이루어지는 경우, 즉 적극적인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소극적인 의사에 의한 경우를 승인적 안락사라고 한다. 극심한 고통의 해결을 위해 의사에게 죽여 달라고 환자 스스로 요청한 후 이것을 의사가 받아들여 치사량의 주사약을 주입하여 죽게 하는 것으로 네덜란드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것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네델란드의 안락사 지침은 ‘당할 수 없을 만큼의 심한 통증이 있는 환자의 자발적 요청이 있고 죽음을 지속적으로 원할 때 주치의사가 동료의사들과 상의한 후 의학적 혹은 약리학적으로 정당한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2) 비자의적 안락사(Non-voluntary Eut
1. 영적인 지도자 직분과 평신도 지도자 직분침례교인들은 회중주의 정체를 실천한다고 해도 신약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교회의 공적인 직분들을 부인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목회자를 의미하는 영적인 지도자 직분과, 목회자가 말씀준비와 선포 그리고 기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봉사 구제 행정 재정관리 등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목회자를 돕는 평신도 지도자 직분이다. 신약성경에는 영적인 지도자를 목사, 장로, 감독이라고 부르고 있다(행 20:28, 빌 1:1, 벧전 5:1~2). 사실 신약성경에서 “목사”(poimen)라는 명칭은 오늘날 사용되는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담임목사(Pastor)라는 개념과는 약간 달랐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양을 치며 보살피는 자,” 즉 “목자”(Shepherd)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된 말이었다(에베소서 4:11, “어떤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목회서신들에 의하면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 명칭은 장로와 감독이다. 장로는 유대적 배경이 강한 지역(팔레스타인, 알렉산드리아, 수리아, 소아시아 등)에서 사용된 영적인 지도자 명칭이었고, 감독은 희랍적인 배경이 강한 지역(빌립보, 데살로니가, 로마, 카르타고 등)에서 사용
신라 문화 유적의 명승지인 경주 관광지도에는 아흔 아홉 칸짜리 고택(古宅)이 한 채 들어 있다. 알다시피 그 집은 12대 400년 동안 만석꾼의 부를 이은 최 부자 가문의 사저(私邸)이다. 최씨 일가는 재산 뿐 아니라 사회적 기여 면에서도 모범을 보인 명문가로 알려졌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와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 있는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최 부자는 만석을 추수했으나 3천석만 곡간에 들이고 3천석은 구제에 쓰고 나머지 3천여 석은 나그네 접대에 사용했다고 한다.최씨 일가는 백리 안에 양식이 없어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한다는 가훈을 세울 만큼 사회적 책임감을 중시했으며, 흉년에는 땅이나 전답을 사지 않았고, 시집온 며느리들에게는 삼년 동안은 무명옷을 입고 살게 했으며, 찾아오는 나그네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독상을 차려주며 정성껏 접대했다.마지막까지 부를 지킨 것으로 알려진 최준 옹은 돈이나 양식을 꾸어주고 담보로 잡은 문서를 채무자들에게 돌려준 것으로도 잘 알려졌으며, 일본의 한반도 무단통치기간 동안은 만주의 독립군에게 꾸준히 자금을 조달했고 남은 재산은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계림대학] 설립에 헌납하고 스스로 “부자”의 짐을 내려놓은 인물
필자는 부활의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마지막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했다”와 “내가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고 있다”는 말씀은 예수의 올리우심에 관한 요한의 독특한 신학을 반영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신학의 출발점과 중심점으로 삼았던 사도 바울은 부활과 올리우심을 구분하지 않았다. 예수의 부활은 곧 하나님의 영광에로의 올리우심이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서 2:9에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관한 언급 후에 바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은 곧 그의 올리우심이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 부활 신학이 발전함에 따라, 부활과 올리우심(승귀 혹은 승천)을 구분하는 경향이 새로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누가는 그런 신학의 대변자였다. 누가에 따르면, 부활의 예수는 승천하기 전 사십 일 동안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활동한 후에(행 1:3), 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한 것으로 제시된다(행 1:9; cf. 눅 24:51).요한은 이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부활과 승천을 구분한 누가의 신학을 존중하면서도 그보다 한
한 주간을 시작하는 아침, 어김없이 이번 주도 내 스마트폰에 입력된 ‘해야 할 일 목록’(To Do List)들이 나를 채근한다. 교회 목회에서 꼭 해야 할 설교와 심방, 상담과 회의는 물론이고, 외부 설교와 강의 스케줄까지 내 마음을 분주히 일으키고 있다.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언제부터 내가 이런 해야 할 일들에만 나를 맞춰놓고 나를 끊임없이 몰아붙이게 되었을까? 바쁘다는 것이 자랑인가? 바쁘다는 게 유세(遊說)인가? 그래야만 내 존재감이 확인되는가? 그래서 오늘은 잠시나마 그 모든 것들 앞에서 내 걸음을 멈춰본다. 물론 해야 할 일 많고, 가야할 곳 많고, 부르는 곳도 많은 목회자. 기쁘고 행복한 일이다. 날 알아주는 이들 앞에 서는 일에는 묘한 희열과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그걸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날 흥분시키는 매력적인 것들, 그것이 날 넘어지게 하는 유혹도 될 수 있음을 왜 난 자꾸 잊는지 모르겠다. 어느덧 하나님 만나는 시간보다 사람 만나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져버린 목회자.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보다 사람 앞에 서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져버린 목회자. 내공을 쌓는(In-Put) 시간보다 밖으로 토해내는(Out-Put)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