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40대 이상의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연탄에 대한 추억하나쯤 없는 이는 없다. 가슴 아픈 아련한 추억이 몇 개는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연탄은 ‘부와 가난의 상징’이었다는 점이다. 우리 집은 그럴만한 형편이 못되어 그저 두세 장씩 새끼줄 꿰어 몇 묶음 사두는 게 고작인데, 누구네 집은 겨우내 쓰고도 남을 연탄을 수북이 쌓아둔 것을 보면 솔직히 너무 부럽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다. 연탄 한 번 갈라치면 코를 막고 얼굴 돌리던 일들, 그 22개 구멍 다 맞추느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다가 그만 가스까지 마셔 머리 핑 돌던 일들. 때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연탄불 다 꺼뜨려 번개탄 사다가 다시 지피던 일들, 그게 안되면 나중에 어머니 돌아오시면 혼날까봐 결국 옆집에라도 가서 급히 밑불 빌려 채워놓던 일도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밤에 잠들기 전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가스배출기 켜놓는 일. 방으로 통하는 부엌문은 닫고 밖으로 통하는 부엌문은 반드시 열어두는 일. 연탄구멍도 한두 개 정도만 열어두어야 한다. 연탄을 막 갈았을 때 열어둔 모든 구멍을 깜빡하고 못 닫으면 그날 밤은 타죽을 정도로 방만 뜨겁다. 그 불은 다음날 새벽까지 못 간다. 멀쩡한 장
누가는 엠마오 현현 사건을 통해 누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그들이 지금도 살아계신다고 믿고 있는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고 듣고 만날 수 있는가에 관하여 세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관한 예언의 말씀들을 마음에 믿어야 한다. 둘째는 모세의 율법과 모든 선지자들과 모든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에 대하여 부활의 주님께서 직접 설명해주시는 감동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셋째는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마음에 영접한 신자들이 개인적으로든지 혹은 공동체적으로든지(누가는 공동체적 체험을 강조) 그와 함께 떡을 떼며 교제하는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는 영적인 체험에 이르게 된다. 누가는 이와 같이 최초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 떡을 떼는 가운데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확인하고 나아가 부활하신 예수의 현존을 체험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부각시켰다.누가는 엠마로로 가던 두 제자의 개인적인 체험을 길게 제시한 후에,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서 부활의 예수께서 현현하신 사건을 제시한다(눅 24:36~43). 이 사건에서도 엠마오 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의 존재성을 다루는 누가의 부활신학이 독특하게 제
송나라 시인 도연명은: “소년은 쉬이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도다. 마당가 연못은 아직 봄꿈에서 깨어나지도 못했는데 댓돌 위에서는 벌써 낙엽 구르는 소리가 들리도다” 하며 세월의 덧없음을 노래했다영국의 시성 윌리엄 워즈워드는, 그의 시, 무지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는 명구를 남겼고, 동시대의 단명한 시인 쉘리는, 서풍에 부치는 노래에서, “겨울이 깊으면 봄이 멀지 않으리(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라는 시구로 세월의 무상함을 각각 노래했다. 이런 싯구(詩句)는 일견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인생은 쉬 늙어 그대도 곧 한 잎 낙엽 같이 떨어질 것이니 세월을 아끼라는 경고이다. 노인은 목회계획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오늘의 한국사회에는 급격히 증가한 노령 인구가 이미 사회적 문제로 부각 되어있다. 국가가 이 문제에 대해 노심초사하며 연이어 대책을 내놓는 반면에 교회는 비교적 무관심해 보인다. 거창한 교단적 대책을 내놓으려 하지 말고 목회자 각자가 자신의 목회계획 속에 노인 문제를 포함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노인과
목회자의 목회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위임하신 과업을 성취하도록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사역하는 것이다. 우리는 목회의 본질과 목회의 다섯 가지 주요한 목표에 대하여 알아봤다. 그러면 이러한 목회를 이루기 위한 목회자의 역할이 무엇인가? 1) 목회자의 책임목회자의 책임은 복음을 증거 하여 교회를 이루고,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에 전념하여 성도들로 봉사의 일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성장시키고, 교회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유지하게 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성장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목회자는 불신자를 찾아 복음을 증거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며, 기독교 진리를 가르치고, 회중예배를 준비하고 인도하고 침례, 주의 만찬, 등 의식을 집례하고, 사람들을 방문하고 상담하며, 교회의 행정적인 업무를 관장하고, 교회의 여러 기관들의 활동을 지휘 감독하며 교회의 대외적 활동을 담당한다. 2) 목회자의 상징적 역할목회자는 상징적인 역할의 사명을 띠고 있다.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예수님을 기억나게 하는 자로서, 성령님의 도구로서, 개 교회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하나님께서 근심하신다’ 하는 표현은 조금 우리들에게 어색하게 다가올 수 있는 말씀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슬픈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구절들이 꽤 많이 있다. 인간과 유사한 감정적인 느낌을 공유하신다는 점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도 기쁨과 슬픔과 노여움과 아픔을 포함한 희로애락의 감정을 직접 느끼신다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밝히고 있다.창세기6:6에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는 구절이 나온다. 원죄와 함께 태어난 사람들은 날 때부터 악하여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들까지도 악한 것뿐이었다. 하나님께서 근심하시며 탄식하실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사람을 창조한 사실 자체를 후회하시며 탄식하셨다. 창세기 6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근심’은 대 홍수의 심판을 야기했던 무서운 근심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그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이제 다시는 무서운 심판을 받지 아니 할 온전한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
사역자란 사역하는 사람이다. 사역이란 말 그대로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고, 일할 일꾼을 찾고 계시며, 일하러 내 보내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리고 때가 됐을 때 제자들을 일하도록 내보내셨다. 주님에 의해 일하도록 보냄을 받은 일꾼을 사도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일꾼들의 하는 일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역자, 즉 사도적 일꾼(apostolic worker)으로 세워져야 한다. 사역자는 예를 들면 삶의 목적과 의미를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맞춰 사는 사람이다. 목회자들이 대표적인 사역자이고, 안수집사, 교회학교 교사, 각 기관의 핵심적 임원진, 목장사역의 목자 등을 일컫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감동하심 가운데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쓰면서 육신에 속한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신자가 많았던 고린도교회를 일깨우며 일으켜 세우고자 했던 자신과 아볼로 같은 일꾼들을 세 가지 명칭으로 불렀다. 1) 사역자(고전 3:5). 사도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 같은 일꾼을 사역자라고 했다. 사역자는 주님께서 주로 말씀 사역을 위하여 세우신 일꾼이다. 복음을 전하고, 새신자를 양육하고, 신앙
“컬처(문화)”라는 말을 재미있게 사용하는 한 선배가 있다. 그는 어색한 경우에 맞닥뜨릴 때는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하지 않고, “컬처가 달라서” 하고 말해서 경직된 분위기를 풀고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 알다시피 현대인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여러 대륙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육자, 또는 넓은 의미에서 문화인 또는 교양인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거나 주장을 세우기에 앞서 반드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필자는 해외에 머무른 몇 년 동안 종종 인도인 가정에 식사 초대를 받은 일이 있었다. 음식은 대게 쌀밥과 닭고기에 커리를 끼얹어 먹는 것이었다. 그들은, 수저를 사용하지 않고 오른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다. 그 집 주부는 자신들이 손으로 음식 먹는 것을 약간 미안해하며 변명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수저를 사용하거나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거나 또는 손을 사용하는 것은 음식을 먹는 방법일 뿐이다. 나는, 그 집 주부에게, 우리나라에서도 삶은 감자나 옥수수, 쌈, 수박, 과자, 오징어, 떡 등 손으로 먹는 음식이 많다고 설명해 줬다. 또한 그들이 살고 있는 미국 역시 그들이
목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교회를 통하여 계속 해나가는 과정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부르시어 제자로 삼으시고 그들을 준비시켜 사도로 파송하셨다. 사도란 주어진 사명을 위해 보냄을 받는 사람이다. 즉 맡겨진 일을 위해 나가는 일꾼인 것이다. 목회는 일꾼을 세우는 과업이다. 모든 성도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이 있고(요 17:4),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다(행 20:24). 목회자는 각 성도들이 제자로 훈련된 후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해 움직이는 사도적 그리스도인(missionary Christian)이 되게 해야 한다. 교회는 일꾼 공동체인 셈이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니라 구명선 또는 전투선이다. 즉 교인 중 누구도 아무런 책임 없이 그냥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교인들을 일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1) 일꾼의 의미를 이해하라. 일꾼이란 자신의 은사를 계발하여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속에서 사도적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교회생활을 중요시 하는 침례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교회적 합의에 의해 살아야 하고 일꾼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므
어제‘어’느덧 오산침례교회 부임 만9년. ‘제’비의 날개짓처럼 세월은 참 빠르게도 흘렀다.‘어’그러졌던 나의 처음 모습, ‘제’대로 사역이나 해낼 수 있을까? ‘어’린 아이 같은 믿음만 갖고서 ‘제’값이나 할 수 있을까?‘어’눌한 말솜씨에, ‘제’멋만 믿고 버텨온 인생.‘어’떻게 이 큰 목회 감당할까 싶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아 너무 감사하다. ‘어’느새 나도 어엿한 중년 목회자. ‘제’일 고마운 건 우리 성도들이다. ‘어’김없이 날 끝까지 믿어주고 ‘제’대로 섬겨준 성도들 덕분이다. ‘어’디 ‘제’실력만 갖고 사는 이가 있나? 첫째는 주의 은혜, 둘째는 사람의 도움. ‘어’느 누구보다도 귀한 우리 성도. 모두들 다 잘되셨으면 좋겠다. ‘제’발…. ‘어’렴풋이 창문너머 옛 생각이 날 때가 올 것이다. ‘제’날짜 제시간이 되면, 주님 앞에 갈 날이 되면...‘어’물쩡대기만 하다가 ‘제’대로 살지 못했던 어제의 모든 일들이.‘어’느 것 하나 주의 은혜 아닌 것이 없음에도 ‘제’능력인 양 여기며 살았던 모든 일들이.‘어’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스스로 ‘제’동 걸지 못했던 내 삶이. ‘어’두운 밤, 더 이상 일할 수 없고 사
그리고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도 이 새로운 규약과 함께 등장한다. 마태공동체가 유대교의 율법뿐만 아니라 전통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고 적용함으로, 마태공동체 구성원이 된 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기를 원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마태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으로 전향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또한 마태는 하나님의 뜻이 이제는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나타난다고 묘사함으로, 마태공동체가 하나님과 맺은 새로운 규약의 중요성을 더욱 강화시켰다.이러한 관점에서 산상수훈의 중심인 팔복도 마태 기독교 공동체의 새로운 규약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팔복의 첫 번째 복과 마지막 복은 산상수훈의 수신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될 것임을 약속한다(마 5:3, 10). 팔복 가운데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소유하게 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을 대신해 마태공동체에 새로운 규약을 전달한 것이다. 이것은 마태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 취해야 할 믿음의 유형들과 공동체 생활에 대한 규율을 말한 것이다. 즉 산상수훈의 수신자인 마태공동체는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을 새로운 규약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교 사상이
교회목회의 기준과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목회를 하셨고 부활승천하시면서 그 사역을 교회와 사도들에게 위임하셨다. 예수님의 목회를 요약하면 복음을 전하시고, 진리를 가르치시고, 약한 자를 고치셨고; 그 사역을 계속하도록 제자를 훈련하시고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을 목회의 중요한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제자로 훈련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생활을 훈련하며 교회의 건전한 교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성도로 양육하는 것을 의미한다. 침례교회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침례를 받음으로 교회의 회원으로 등록한 모든 성도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알고 그들을 행한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제자훈련은 신앙적인 생활 훈련이므로 일정기간 동안 정해진 커리큘럼을 수료하면 수료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제자훈련은 교회의 회원이 된 이후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일생 동안 지속적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1) 제자의 일반적 정의 제자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상을 배우고 따르는 사람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감동되고 그 가르침이 좋아
엠마오 현현 사건에서 부활의 주님께서 두 제자의 가리워진 눈을 열어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게 할 뿐 아니라 그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믿는 부활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 세 번째 하신 일은 그들과 함께 교제하며 음식을 잡수신 일이었다. 두 제자가 그들이 가려는 마을에 가까이 왔을 때, 부활의 주님 자신은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셨다(24:28). 여기서 부활의 주님 자신은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셨다”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 두 제자가 가려는 목적지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그들이 주님을 초청하지 않으면 이제 그들과 주님이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셨다”라는 말은 그들이 주님을 초청하여 영접하지 않으면 주님은 여전이 그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이 자기 자신의 일을 하시는 제 삼자로 머물러 계신 것을 가리킨다. 누가는 이 구절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과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는 우리가 그 분을 초청하여 영접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제시한다. 이러한 교훈은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보았을 때 달려나가 영접하며 자기를 떠나 그냥 기자나기 마시고 쉬어 가시도록 초청한 사건에서도 제시된다(창 18:1~5).두 제자는 부활의 주님께서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편2편중에)”사사 드보라, 바락, 기드온에 이어, 사사 돌라와 야일의 통치가 있었던 45년간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히브리백성들은 또 다시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18년 동안이나 블레셋과 암몬에게 압제당하는 식민지의 고달픈 인생을 살아간다. 18년이나 지속된 이민족의 압제를 통하여 만시지탄 히브리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서서히 깨닫게 된다. 아마도 압제를 받았던 처음 몇 년 동안은 자신들이 왜 이민족의 압제를 받는 식민지가 되었는지를 몰랐을 것이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로 36년간이나 치욕을 당한 이유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민족의 굴욕과 아픔이 상당 기간 지속되자 목이 곧은 목석과 같은 히브리백성들도 자신들의 고난의 근본적인 이유
둘째, 유대교에서 분리된 새로운 종파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 유대교에서 분리되어 나온 새로운 종파가 그들이 속했던 공동체 지도자들의 지도력을 비판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산상수훈에 묘사된 마태공동체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대립한 이유는 아마도 율법 해석에 대한 차이로 보인다.마태공동체는 예수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보다 율법을 더욱 잘 해석한다고 주장함으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대립각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종파로서 마태공동체는 이미 핍박 가운데 있었다(마 5:10). 마태공동체 구성원들은 언어와 물리적 박해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해를 의미하는 헬라어 dediwgmevnoi는 분사 완료 수동태로 과거와 현재의 박해 상황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이 구절은 마태공동체의 박해 상황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는데, 마태공동체는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이 동네 저 동네로 다니면서 핍박을 피하라는 구절을 통하여 더욱 분명해진다(마 10:23). 또한 산상수훈에는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도 나타난다(마 5:44). 산상수훈에서 예수가 마태공동체 구성원에게 자신들을 박해한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목회의 두 번째 목표는 구원받은 신자들을 교회 공동체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다. 교회로 인도한다는 것은 신자들을 책임성 있는 교회회원이 되도록 인도하는 과정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대로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충만히 임하시고 사도들의 전도의 열매로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졌다. 사도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고 교회회원으로 더하게 했다(행 2장). 결신자들을 믿음 안에서 굳게 하며 그들을 교회로 모으는 것이 신약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전도자들의 목표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임하신 사업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실천하는 주체이며 통로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당연히 교회에 등록해 교회회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교회로 인도한다는 것은 교회에 회원으로 등록시키는 것을 말한다. 교회회원으로 등록하는 데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침례, 이적, 그리고 신앙 진술이다. (1) 침례에 의한 방법은 가장 기본적이고 바람직한 것이다. 성도들과 교회는 가능한 방법으로 불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