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차 총회 의장단 및 총무 후보의 본등록이 마무리됐다. 총회장 후보에는 대전중문교회 장경동 목사와 대전은포교회 이욥 목사가, 총무에는 현 총회 총무인 김일엽 목사가 접수를 마무리했다. 이제 후보들의 공약사항에 대해 교단의 미래를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매 회기 총회 의장단 선거는 뜨거운 감자였지만 이번 회기는 양 후보 간의 치열한 공방과 현안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는 점에서 대의원들의 현명한 판단이 필요한 때이다. 후보의 자질과 논란, 이에 대한 대의원들의 생각과 의견은 천양지차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비방과 비난이 난무하며 불법선거운동과 관련된 고소, 고발이 남발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보다 객관적으로 총회 의장단 후보를 검증하고 평가해야 할 때이다. 또한 총회 규약과 선거관리위원회 규정, 내규 등이 의장단 선거를 진행하며 모두에게 공평하고 공정한 잣대를 마련해줘야 하며 그동안 관행처럼 내려온 부분에 대해서는 보다 정확한 결의와 문서를 통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교단에 대한 여러 매체들의 소식은 교단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데 수많은 걸림돌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평양 김일성대학 운동장에 갔는데 약 1000명(?)이 모여있었다. 거기서 하룻밤 지내고 다음날 오전 급하게 부대 편성을 하는데 나는 몇 대대 중화기 소대 분대장에 임명됐다. 그 때 시간이 오전 11시쯤이었다. 잠시 후에 점심 먹고 군복이 나오면 입고 훈련장으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공습경고도 없이 갑자기 그 때 별칭 ‘호주쌕새기’ 미군 전투기 몇 대가 날아와 약1000명 모인 그 운동장에 무섭게 기총사격을 해댔다. 그러자 장교고 교관이고 없다. 모두 나 살려라 뿔뿔이 도망치고 흩어진다. 나도 물론 정신없이 도망쳤다. 한 참 달리다 보니 보통강 옆에 수수밭이 있다. 그 수수밭에 엎드려 전투기의 기총사격을 피했다. 물론 많은 청년들이 기관포에 맞아 죽었다. 몇 분 후 그 무서운 폭격은 지나가고 고요해졌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는데 이제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다시 그 운동장으로 가나 아니면 여기서 도망쳐 집으로 가나. 그런데 집으로 도망쳐 가고 싶은데 내가 그 부대 편성할 때 우리 집 주소를 그대로 적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 주소로 찾으러 오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다시 운동장으로 들어가야 하나 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바로 옆에 숨어 있던 청년이 나를
지난 7월 교단을 대표하는 지구촌교회 최성은 담임목사의 갑작스러운 사임 소식에 교단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도 적잖은 당혹스러움을 안겨줬다. 임시 사무처리회를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교회가 진행하고 있는 다음세대를 위한 느헤미야 프로젝트의 집행에 대한 리더십 문제 등으로 자진 사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과연 담임목회자 직의 사임까지 갈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유튜브 플랫폼에는 최 목사의 사임에 대한 다각적인 해석과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 내용들이 퍼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지구촌교회가 그동안 교단과 한국교회에서 선견자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들까지 정죄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무엇보다 전임 목사의 사임으로 교회가 설교를 비롯한 전임목사의 행적을 철저하게 비공개 처리한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이번 사임에 대해 최성은 목사의 입장을 직접 성도들 앞에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사임배경에 대한 왜곡된 루머의 확대, 재생산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침례교회는 회중주의를 원칙으로 교회의 정관과 규정을 통해 사역을 전개하고 있다. 담임목회자를 비롯해 개교
1933년 생, 나는 북한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시골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제시대를 살았고 공산치하에서도 살았다. 부모님은 완전 원시적인 농사꾼이었고 어머니는 일제시대부터 예수교장로회 평서노회 소속 반석교회 직심(북한 방언, 열심)있는 집사님이셨다. 아버지는 교회 출석 안하고 농사일에만 열중하셨다. 우리 집은 대농이었다. 일제시대 벼 100가마니를 공출하기도 했다. 1945년 8.15 해방 때, 나는 번석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1946년 3월 반석중학교에 입학했다. 북한에서는 해방 후 인민학교 5년제 학제 개편으로 1946년부터 소학교 6학년생은 중학교 2학년으로, 소학교 5학년생은 중학교 1학년으로 진학하게 됐는데 나는 2학년으로 진학했다. 당시 시골에서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여자 아이들은 소학교에도 안 가는 애들이 많았다. 나는 약 50호 되는 시골마을에서 유일한 중학생이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솔직히 말해서 불학무식한 농사꾼인데 나를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보내주셨다. 그 당시 학교 시험제도는 5점 만점제인데 전과목 5점이면 상급학교에 무시험 입학 특혜를 줬다. 나는 전과목 5점인데 북한 정부에
이응찬의 도움으로 선교사 존 로스의 조선어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그러나 역관도 아니면서, 양인과 시종일관같이 지내는 이응찬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양인의 첩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했다. 결국 이응찬은 관아에 고발당했다. 이응찬을 관아에 고발한 사람들은 평소 이응찬에 대한 악감정을 갖고 있던 고려문의 무역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압록강에서 풍랑을 만나 쫄딱 망하게 된 이응찬의 불행을 고소해 했지만, 이후 양인을 만나 적당히 돈도 벌며, 행색이 좋아진 이응찬을 질투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속담이 있듯이, 남이 잘 되면 축하 및 격려해 줘도 모자랄 판인데, 남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그 무리들의 심성이 고약했던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속담이 한국에만 있는 줄 안다. 그래서 그만큼 한국인들은 이기적인 민족이라고 비논리적인 자국 혐오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우물 안 개구리’라는 다른 속담과 완벽하게 부합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기 때문에, 다른 국가, 다른 지역, 다른 민족 내에서도 이런 현상과 말은 자주 일어난다. 일본어에는 이런 심리를 가리키는 ‘메시 우마(メシ ウ
2024년은 침례신문이 창간한 지 69년이 되는 해이다. 1955년 한국전쟁 이후, 잿더미 속에서 침례교회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명감으로 창간한 침례신문은 그동안 교단의 주요 사안을 활자로 담으며 69년을 달려왔다. 한편으로 어려운 현실과 재정 악화로 폐간의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꾸준히 1532호의 신문을 발행하고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도하심이라 생각한다. 묵묵하게 이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침례신문 직원들과 이들과 함께 하는 이사회, 구독 후원자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교단지는 교단의 소식을 보다 정확하게 전달하며 교회 성장과 부흥을 위한 다양한 내용들을 담아내는 창구의 역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교단이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교단의 바른 신학사상과 목회 상황을 지면을 통해 알리고 교단이 추구하는 복음 사역을 각계 각층에 홍보하고 모든 기독교인들이 건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과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침례교회의 상황과 현실을 담아낸 침례회보(현 침례신문)는 문장 하나, 사진 하나가 산 역사적 산물로 남아 있다. 오늘날에 이르러 SNS를 비롯해 유튜브, 1인 미디어, 인터넷신문 활성화 등 다
2. 말콤 펜윅의 기독교적 애국활동 : 대한노래(1906) 지금까지 발견된 역사적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침례교 항일운동의 효시(嚆矢)가 서울에서 개최된 초교파적 위국 기도회에 서울의 침례교인들이 참여한 것에서 비롯됐다면, 침례교 항일운동의 사상적 토대는 “한국침례교의 아버지”라 일컫는 말콤 펜윅의 기독교적 애국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889년에 평신도로 내한했다가 1893년 귀국했고, 이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896년에 재차 내한했다. 원산에서 활동하던 펜윅은 일제의 내정 간섭으로 점차 그 힘을 잃어가는 대한제국을 바라보며 1906년 8월에 “My Country Tai Han”(내 나라 대한)이라는 애국적 사상이 담긴 가사의 노래를 발표했다. 가독성을 위해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필자가 현대어로 고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노래> (1절) 우리 대한나라 대한국을 위해 노래합세. 열성조 나신데 또 돌아가셨네. 모든 산 곁에서 노래합세. (2절) 우리 대한 이름 어찌 사랑할까? 우리 대한 그 산과 골이나 그 강과 수풀 다, 사랑하는 우리 노래합세. (3절)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 성자 믿세. 구주 믿는 백성 성경
지금이 어떤 시대입니까? 두려움과 절망으로 사방에 둘러싸여 있다면 ‘평강하다’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읽은 책에 우리 현실을 직시한 목회자의 심정 고백이 나옵니다. 그분은 자신이 미국의 문화막시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번역하면서 느낀 안타까움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 다큐(=‘문화막시즘 미국의 타락’)를 번역하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문화를 통한 ‘긴 행진’이라는 사악한 전략이 그 모든 왜곡된 사회현상 밑에 잠복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이상이 오늘날 우리 한국의 명백한 현실인데도 국민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르게 지도해야 할 목회자들이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오태용, ‘문화막시즘 미국의 타락’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유대 사회는 ‘평강하다’ ‘평강하다’는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가 빈번히 선포되던 시대였습니다(렘 8:10~11).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외친 예레미야의 예언은 정반대로 ‘두려움과 재앙’이었습니다(렘 19:15). 그러자 여호와의 성전 총책임자인 바스훌은 분노하며 예레미야를 때리고 착고 씌워서 투옥시켰습니다. 다음날 예레미아가 착고를 벗고 옥에 나왔을 때 바스훌 앞에서 예언, 경고합니다. “여호와
침례교회는 장로교·감리교단 등 타 교단과는 사뭇 다른 행정 구조와 결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한국침례회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교회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며 교회의 크기, 규모에 편승해 교단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회원들의 충분한 토의와 논쟁, 그리고 결의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침례교회이다. 침례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를 통해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믿으며 세워진 성경적인 교단이다. 침례교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대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며 교회를 세우고 이를 뒷받침하는 총회와 기관의 협동으로 사역을 전개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침례교 이상과 주장을 존중하며 침례교회의 모든 회원들이 공동으로 결정한 규약과 정기총회에서 회원(대의원)들의 결의로 침례교회를 구성해나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최근 침례교단 내에 일련의 논쟁과 치열한 토론, 교단을 바라보는 시선과 정제되지 않은 수많은 말과 글은 우리가 쉽게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마치 적잖은 대의원들이 심판관이 되어 문제를 분석하고 판단하며 자신의 생각과 내용이 마치 진리인양 침례교회의 정신을 더욱 혼탁하게
조던 피터슨, 스티븐 힉스와 같은 학자들이 강조하듯이,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막시즘, 문화막시즘입니다. 자크 데리다, 미셀 푸코 등 대부분 포스트모던 철학자들과 근래에 젠더이데올기를 통한 양성해체와 성 정치의 기수 주디스 버틀러에 이르기까지 모두 급진적 문화혁명 전사, 네오막시스트입니다. 유럽과 미국은 신좌파가 선전하는 글로벌 성 혁명, 문화혁명에 무너져갔습니다. 이렇게 유럽에서 급속도로 번지는 공산 사회주의 운동과 문화막시즘의 위험성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경고음을 울린 학자들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레이몽 아롱은 ‘지식인의 아편’이란 책을 써서 프랑스 좌파 이데올로기에서 전염병처럼 번진 반미주의에 반대하면서 자유주의의 덕목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변증법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무산계급의 시대가 억압된 자들을 해방시킨다는 공산주의 이론은 사이비 종교와 같다.…진보라는 이름을 내세워 민중을 잘못된 길로 몰아세우는 좌파 지식인은 ‘막시즘’이라는 아편의 중독자다. 객관성, 보편성과 소통하지 못하는 사상으로 억지요, 고집일 뿐이다. 독일의 틸로 자라틴 박사는 그가 속했던 좌파와 68세대들의 노선으로부터 결별했습니다. 자라틴 막사는 제2차 세계대전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현대사회 속에서 교회 지도자의 역할과 책임은 어느 때보다 큰 관심사라 할 수 있다. 특히 최근 일부 목회자의 상식을 넘어선 반윤리적이며 비도덕적인 행태, 말씀보다는 돈과 재물을 추구하는 행위, 무엇보다 시대의 아픔을 보듬어주지 못하며 세대의 문제에 무관심으로 일관한 발언 등은 교회가 과연 다음 미래 세대의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상황이다. 초대교회는 복음과 함께 시대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 약자를 돌봐왔다. 전염병이 창궐할 시기에는 그들을 돌보고 치료하는데 힘을 쏟았으며 가난한 자와 어려움을 겪는 자들을 구제했다. 과부와 어린아이를 위해 교회는 항상 그들을 따뜻하게 품는 사랑의 공동체였다. 이 모든 것은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란 말씀을 기억하고 이를 지켜 행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회 문제와 시대적 아픔을 교회가 나서서 기도하고 위로하며 그 아픔을 함께 나눠야 한다. 세대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닌 복음으로 회복시키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목회자들이 먼저 변화해야 할 때이다. 성도들에게 믿음의 본보기가 돼야 함은 당연하다. 실체적인 삶에 있어서 실
이러한 좌파적 신념의 역사로 시작된 프랑스혁명은 그 후 연속되는 무신론적 인본주의 혁명의 뿌리가 됩니다. 하나님을 인간 이성으로 대체하고 새로운 인간 종교를 창시하기 위한 무신론적 인본주의의 혁명입니다. 진보세력의 공모자들 스스로 ‘하나님 없는 인간’(l’HSD, l’homme sans Dieu)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소설 ‘1984’의 작가로 유명한 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반(反기)독교적 사상에서 비롯된 혁명의 정신을 파리 자유의 여신상처럼 우상시합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혁명은 또 역사적으로 반복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혁명은 신좌파(neo-Marxist) 혁명세력에 의해서 또 한 번 인본주의 이데올로기로 중무장하고 온 세계로 포문을 열게 됩니다. 바로 1968년에 일어난 프랑스 68혁명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이 68문화혁명은 현대주의로부터 엄청난 파급·파괴력을 지닌 포스트모더니즘시대로 옮아가는 혁명을 알리는 불꽃 신호탄과도 같습니다. 2. 프랑스68혁명은 앞선 혁명과 ‘부전자전’ 프랑스혁명 이후 인본주의 모더니즘 시대는 프랑스68혁명을 거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전환됩니
113차 총회가 법적인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114차 총회 의장단 및 총무를 선출하기 위한 입후보자의 예비등록일이 7월 9일 예정돼 있다. 대의원들은 현재 교단에 산적해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금 교단의 위상을 세울 수 있는 의장단과 5년 임기의 총회 행정을 감당할 차기 총무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 만큼 현재 파행을 겪고 있는 총회와 내홍을 겪고 있는 기관의 현안을 보다 행정적으로 냉정하게 처리할 교단 안팎의 지명도 있는 화합형 청지기가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때다. 최근 몇 년간 계속된 진영논리와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과정이 반복된 것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교단을 위한 정책이나 방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바라보기보다 특정 후보의 지지 성향에 의존해 지도자를 선출해왔다. 물론 근래 단독으로 입후보하면서 이러한 문제들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임원을 선임하거나 각 기관에 이사를 파송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교단 안팎에서 침례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만은 않다. 그동안 교단에서 간과했던 문제들이었으며 관심을 가지고 교단이 하나되고 협력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면 침례교회 관련 문
셋째로, 과일 재배법을 한국인에게 전수해 조선의 농업기술 진흥에 기여했다. 펜윅이 과일 재배와 농사법을 전수한 첫 번째 제자가 윤병수(尹秉秀, 1867-1944)이다. 사실 윤병수는 펜윅의 농장 견습생이 되기 이전 1885년 10월 25일에 원산항(元山港) 장무관(掌務官)으로 임명받아 약 2년 6개월간 벼슬아치로 일했다. 공무원이었던 윤병수는 원래 묘목 재배에 관심이 많았는데 펜윅을 만난 이후부터 새로운 인생길을 걸으며 과수 재배 전문가로 성장하게 됐다. 그렇다면 윤병수가 펜윅의 과수원 제자가 맞는지, 언제부터 견습생이 됐는지, 학농원(學農圓)을 세워 언제쯤 자립했는지, 그리고 개화기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하다. 이에 관해 여러 자료가 있는데 연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밝히고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겠다. 1) 1909년 3월 14일자 황성신문 기사 첫째가 1909년 3월 14일자 황성신문의 기사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원산거(元山居) 윤병수씨(尹秉秀氏)는 원래(元來) 종식업(種植業)에 유지(有志)ᄒᆞ야 거(去) 광무(光武) 팔년(八年)붓터 당지(當地)에 주거(住居)ᄒᆞᄂᆞᆫ 영국(英國) 목사(牧師) 편위익씨(片爲益氏)에게 종예술(種藝
“미국 혁명의 원리와 프랑스 혁명의 원리가 닮았다는 것은 정숙한 청교도 가정의 어머니와 추문을 다루는 프랑스 소설의 부정한 여인이 똑같이 닮았다는 것과 같다. …참으로 19세기에 프랑스보다 더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는 없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강연’ 중> 유럽 역사에서 비극의 역사로 기억되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은 현시대의 기독교의 위기 측면에서 볼 때도, 치명적 위기를 불러온 중차대한 사건입니다.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는 이 때를 두 번째 타락이 있었던 때라고 강조합니다. 첫 번째 타락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입니다. 두 번째 타락은 프랑스 혁명 시기로, 서구사상사와 문화사에서 도로 메꿀 수 없는 깊은 틈이 이때 생겨났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역사는 근대 프리모던(Premodern)에서 현대 모던(Modern)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현대모던에서 포스트모던(Postmodern)으로 넘어갈 때도 또 한번 공포의 혁명이 프랑스에서 재발합니다. 앞에서 첫 번째는 1789년의 급진적인 정치적 혁명이고, 그 다음 두 번째는 1968년의 문화혁명입니다. 이렇게 프리모던에서 모던으로 포스트모던으로 운명의 역사를 결정하는 배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