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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침례요한 문상(問喪) 기록이 없어요

하늘붓 가는대로 –181


 

침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육신의 모친 마리아는 친족 관계였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 문안했었다. 침례요한과 예수는 육신적으로 가까운 친족으로 모친들의 뱃속에 인사하고 즐겨 뛰노셨다(1). 마침대 6개월 먼저 출생한 침례요한은 예수를 위로 모시고 자기를 낮추는 임무의 온전한 수행자였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1:7)

요한이 그에 대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5~18).

 

요한은 예수 증거하러 세상에 보냄을 받아왔다.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마저 예수에게로 돌리고 폭탄선언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30).

 

그런데 침례 요한의 초라한(?) 죽음을 보라. 요한은 헤롯이 자기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것이 잘못됐다고 직언했었다(6:18). 요한은 분명한 율법에 의존해서 직언 했을 것이다. “너는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18:16).

 

구세주를 소개하고 증언하러 왔던 마지막 예언자 요한이 그까짓 권세를 잡은 자의 불륜사건을 고발하다가 참수를 당했으니 혹자는 정의를 부르짖다 돌아간 위인이다. 하지만 예수의 온 인류를 위한 십자가의 보혈 사건에 비해 오히려 스스로 초라하게 죽어갔을 것이다. 권세 잡은 자의 불륜 해결과 온 인류의 죄사함의 사건이 비교가 되랴. 그런데 출생시에 태중부터 들뜬 분위기가 요한의 쓸쓸한 죽음에서는 초라하고도 썰렁했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요한의 장례식을 보라. “그 머리를 소반에 얹었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6:28~29)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14:12)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와서 요한의 장례를 알렸겠다. 이 지금 예수의 행적을 보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14:13). 예수는 요한의 장례소식을 들으셨다.

 

물론 장례현장에 없으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록은 없다. 단지 배를 타고 빈들로 가셨다고 했다. 이게 전부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장례에 작은 의미를 두신 것 같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라”(8:21~22).

 

여기 죽은 자들은 복음을 모르고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고 죽은 자라 실제로 사망한 사람을 가르킨다. 이런 상황은 사자(死者)의 사적이 생자(生者)의 생적에 비교할 수 없다는 바 사람들은 죽음공존과 죽음정리에 바쁘지만 예수님은 삶의 환희와 삶의 진행에 눈을 두라는 생생한 드라마였다. 쓸쓸히 죽어가고 초라하게 장례를 치른 요한인들 서러워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떠나보내고 생명 사역을 하시는 예수님도 구세주로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일각의 허비도 없이 수행하신 것이다.

 

권혁봉 목사 / 한우리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