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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와 명품 번역성경(4)

시대를 읽는 지혜-11
임원주 목사
진리교회 협동

영어성경 가운데 아직까지 넘사벽인 성경으로 인정받는 것이 KJV이다. 그러나 그 탁월함을 절대적인 것 혹은 불변적으로 독보적인 것으로 간주해도 될 정도의 넘사벽이 아니며, 다른 모든 번역성경을 읽어볼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들었을 정도의 넘사벽이 아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NIV 성경이나 개역한글 성경을 보면 성경에 무지해진다거나 구원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걱정이 된다면,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라는 전염병에 접촉됐고 감염되기 시작했다고 의심해야 마땅하다. KJV 즉, Version이 아니라 KJB 즉, Bible이라고 표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걱정이 들어도 마찬가지다. 


말씀보존학회 이송오 쪽에서 생각한 것처럼,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성령의 특별한 영감을 받았고 그 결과물인 번역텍스트(KJV 본문)가 고귀한 영감이 서려있는 산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단으로 정죄받은 무리에 속하기 시작한 셈이다.


독립침례교회 정동수 쪽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개역한글 혹은 개역개정 성경이 로마 가톨릭의 라틴어성경(벌게이트)의 뿌리가 되는, 소위 ‘오염’된 사본의 영향을 받았고, 킹제임스 성경은 순수한 사본을 ‘단어 대 단어’로 정확하게 번역했기 때문에, 계시된 말씀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텍스트라는 취지의 ‘넘사벽’이라는 생각 또한 ‘번역스타일’을 절대화한, 잘못된 관념이다. KJV의 본문과 그 본문에 깃든 영어 구사력이 히브리어 (구약)성경이나 헬라어 (신약)성경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게 만들거나 중세시대 서방교회가 사용하던 벌게이트(라틴어 번역성경)를 사악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위력을 그 자체로 갖고 있지 않다.


로마 가톨릭 신학의 토대를 성경인 ‘벌게이트’가 조잡하게 보이는 것은 ‘벌게이트’ 즉, 성경을 번역한 라틴어가 A.D. 4세기 말~5세기 초 무렵의 통속적인 라틴어를 근간으로 한 것과, 초대교회 때 확정된 정경 66권 이외에 ‘외경들’을 끼워 넣은 것 때문이다.


중세교회의 오류들 대부분은 야만적인 게르만족들의 서유럽 이주와 정착 과정에서 그 이전까지의 그리스-로마 문명을 철저하게 파괴한 탓이다. 그 파괴 속에서도 살아남은 것이 ‘기독교’ 특히, 라틴교회라는 서방교회 전통이다. 서방교회는 4세기 초에 확립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대변되는 ‘삼위일체론’, ‘그리스도의 양성론’, ‘성령의 이중발현’(혹은 이중발출설)인데, 이러한 교리들은 중세시대가 아닌, 초대교회 전통에 속한다. 게르만 족이 이러한 초대교회의 신학전통을 수용하고 익히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들이 발생하게 된 시대가 도래하였는데 그 시대가 중세시대이며, 그 오류들을 필연적으로 끌어안게 된 것이 중세교회다.중세시대는 게르만족이 대이동을 하면서 기존의 문명을 파괴하고 어떤 일정한 영토에 정착해 게르만 관습에 입각한 ‘나라’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것이기에, 중세시대를 연구한 학자들은 유럽 중세의 시작은 지역마다 다르다고 말한다. 가장 빠른 연대가 5세기이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멈춘 것을 10세기 무렵으로 보기도 한다. 이 때문에 교회사 연구에서도 초대교회를 7세기 무렵까지 길게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의 치명적인 오류들이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교황주의와 마리아 숭배라는 치명적인 독이 교회를 중독시켜 종교개혁을 필요로 했다는 논리라면 이 치명적인 독은 게르만 민족의 토속적 원리들이 교회에 침투한 결과로 야기된 것들이니 초대교회와도 상관이 없고, 제롬의 라틴어 성경(벌게이트) 번역과도 상관이 없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도 상관이 없고, 니케아 종교회의를 후원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도 상관이 없다. 교황주의 사상이 대두되고 콘클라베에서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제도가 마련된 것이 10세기 초의 클루니 수도원에서 시작된 개혁운동의 결과이고 이에 따라 교황제도가 운용되기 시작한 것이 11세기 중반이니, 이 또한 힙포의 아우구스티누스 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전혀 관련이 없는 사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 옹호자들은 비기독교적인 이분법, 이원론적 사고와 음모론에 찌든 이들이 ‘음모론적 허구’를 고상한 논리처럼 왜곡하여 소위 ‘(1611년)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를 천명한다. 영어라는 언어와 잉글랜드 역사에 대한 무지가 지독하게 큰 역할을 한다. ‘킹제임스 유일주의’라는 기괴한 주장이, 영어의 본바닥인 영국에는 결코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는 상식을 전적으로 간과한다.오늘날 우리가 ‘영국’이라고 통칭하는 개념에 해당하는 것은 United Kingdom인데 이는 ‘스코틀랜드 왕국’, ‘잉글랜드 왕국’, ‘웨일즈 공국’ 이 셋을 합한 ‘그레이트 브리튼’에 ‘북아일랜드’(혹은 얼스터)를 합친 ‘연합왕국’을 가리킨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영국’이라는 4개 연합왕국의 표준어가 영어 즉, English Language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런던 지역의 ‘영어’가 표준적인 영어로 대우받은 적이 없다. KJV이 만들어지던 17세기 초반의 영어는 잉글랜드 왕국의 언어이지만 잉글랜드 태생의 학자들도 낯설고 사용하기 힘든 낮은 수준의, 미발전의 여러 언어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영어의 문법 및 어법이 어느 정도 “표준화된” 언어라는 것은 우리 국어의 표준화 개념에 입각해서 영어도 그럴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며, 표준화된 영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영국이 아닌 미국의 현상이다. 따라서 영국에서는 ‘KJB 유일주의’라는 것이 발을 붙일 틈이 전혀 없고, 영어를 사용하면서도 영어의 역사와 성경번역의 변천사를 무시한 미국의 유사종교운동가들이 미국의 대중들에게 퍼뜨린 오류일 뿐이다.


‘킹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를 부르짖으며 1611년판 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단어 대 단어’로 대응시켜 한글로 번역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1611년판 인쇄본이 아니라 18세기까지 수정된 본문의 인쇄본을 놓고 번역한다. 그리고 한글로 번역할 때, 영어 텍스트는 한글 문법과 어휘 그리고 한글 구사력에 갇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한글번역자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닌 이상, 그 번역자가 안고 있는 한계에 의해 각종 오류와 오류가능성이 번역작업 결과물 즉, 한글성경에 끼어든다.


필자가 일차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 주장자는 독립침례교회 소속의 정동수라는 사람이다. 정동수는 말씀보존학회 이송오가 ‘킹제임스 성경 번역’도 영감받았다는 식으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보고, 자신은 그런 식의 유일주의를 주장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송오가 시작한 성경침례교회와는 다른 ‘독립침례교회’를 개척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이송오와 정동수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독립침례교회 소속의 사랑침례교회 담임목사 정동수는 정식으로 신학교육을 받았는지 대단히 의심스러운 이력의 소유자다. 정동수 이력의 중심은 ‘기계공학’ 전공자로서 박사학위 및 기계공학 교수로 재임하면서, 교회를 개척하고 담임하며, 킹제임스성경 흠정역(마제스타) 대표를 대표하는 번역자다. 하지만 그 언설에서 ‘신학’에 대한 정당한 통찰을 엿보기가 힘들고, 성경번역에 대한 훈련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 개역한글 성경의 오류라고 지적하는 정동수의 설명에서 어떤 전문성, 깊이, 탁월성을 감지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그 지식은 천박하다. 정동수의 이러한 문제를 잘 살펴보면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확인해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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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2024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3500침례교회와 목회 동역자. 성도들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회복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죄인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며 이제는 구원의 완성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사실을 믿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믿음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복음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