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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거부로 수난당한 침례교인(4)

일제강점기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14

신사참배 거부에 대한 교단의 결의가 확고하자 일제는 ‘우태호 사건’을 빌미로 원산총부에 들이닥쳤고, 원산의 헌병대도 1942년 6월 10일 이종근 감목(총회장)을 전격적으로 체포했다. 일제는 그에게서 자신들이 얻고자 했던 답을 얻지 못하자 다음날 강원도 울진에 있던 김영관 목사도 체포했다. 이는 그를 통해 교단탄압의 원인을 찾고자 했던 것으로, 김 목사는 이미 1938년 웅기교회 달편지 발각사건으로 3년 집행유예를 받은 상태였다. 이종근 감목처럼 김영관 목사도 일제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으므로 인해 고달픈 감옥살이가 시작됐다. 당시 김영관 목사는 이미 체포된 다른 분들에 비해 비교적 젊은 46세의 나이었으나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42년 6월 11일에 체포된 이래 원산 헌병대 유치장에서 겨울을 보냈고, 이듬해인 1943년 5월 1일 함흥 교도소로 이감됐다. 15일간의 재판 결과 검속된 32명 중 김영관 목사를 비롯한 이종근·노재천·전치규·백남조·장석천·박기양·신성균·박성도 등 9명의 교단 지도자는 일본의 검사에 의해 예심에 회부되어 재차 투옥됐고, 다른 23명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1943년 5월 15일에 석방됐다.


김영관 목사는 조선총독부 검사 와타나베 레이노스케에 의해 1943년 5월 28일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 예심이 청구됐는데, ‘예심청구서’에는 그의 범죄 사실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3 피고인 김영관은 어렸을 때 서당에서 수년간 한문을 배운 후 농업에 종사하던 중 동아기독교회의 교리 신조를 따라 타이쇼(大正) 2년(1913년)경 침례를 받고 교인이 됐고, 동 12년(1923년) 교사가 되었고, 다음 해(1924년) 목사가 되었고, 쇼와(昭和) 9년(1934년) 감목으로 순서를 따라 승급했고, 쇼와(昭和) 13년(1938년) 3월 사임함과 동시에 원로 겸 명예 목사가 되고, 현재에 이른 자이다. 첫째, 쇼와(昭和) 16년(1941년) 8월 중, 감목인 피고인 이종근의 소집에 응하여 전게 제1의 첫째 기재 내용의 협의를 했다. 둘째, 감목인 피고인 이종근의 강력 요청에 의해서 같은 해 7월 중 만주국 간도성 OOO대파교회 외 한 교회에서 4회에 걸쳐서 김순철 외 120명 정도(OOOO인)에게 전기와 같은 설교했다(앞서 이종근 목사의 범죄 사실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및 천년왕국의 출현을 기원한 내용의 설교”를 말함).”

 

혹독한 감옥생활로 인해 점차 건강을 잃어 더 이상 수감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일제는 1944년 2월 15일 다른 6인(노재천·백남조·장석천·박기양·신성균·박성도)과 함께 김영관 목사를 병보석으로 임시 출옥시켰다.


출옥 후 그는 원산 반도의원의 차형은 원장(감리교 장로)의 호의로 병원에 입원해 여러 날 간호를 받았다. 점차 건강을 회복하던 차인 같은 해 5월 10일 함흥재판소는 동아기독교회에 교단 해체령을 공표했다. 그리고 임시 출옥했던 김영관 목사는 1944년 8월 8일 일제에 의해 재수감 돼 공판이 계속됐고, 9월 7일에 이르러 재판이 종결됐는데, 집행유예 5년으로 석방됐다. 그는 일제의 교단 해체로 흩어진 신자들을 돌보는 가운데 해방을 맞았다. 1946년 10월 김영관 목사는 북한의 나진으로 이사했고, 비슷한 시기에 박형순 목사(김영국 감로 둘째 사위)도 나진으로 왔으며, 이종근 목사는 종성동으로 이주했다. 그밖에 최성업 목사는 청진으로, 최헌 교사(전도사)는 종관진교회로 왔다. 이들 지도자를 중심으로 1947년 초 나진교회에서 교단 재건과 수습을 위한 총회가 개최됐는데, 이때 김영관 목사는 고문으로 추대됐다. 이후 문헌에서는 그의 행적을 찾을 수 없으며, 김장배 목사는 공산당에 의해 김영관 목사가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가 2017년 9월 중국 현지에서 김영익 감로(김영관 목사 셋째 형)의 장손과 인터뷰한 바에 의하면, 김영관 목사는 순교한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한다.


이는 다른 후손의 증언과도 일치하며, 실제로 김영익 감로의 차손이 북한의 김영관 목사와 서신을 교환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심지어 김영익 감로 차손 부부가 1985년에 북한을 방문해 구순에 가까운 김영관 목사를 만났고, 1986년 2월에도 재차 방문했다. 이때 김영관 목사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동아기독교의 후손들이다. 동아기독교를 잊지 말고 하나님을 잘 섬겨라”라고 반복해서 강조했다고 한다. 몇 해 후 북한을 다녀온 다른 친척들을 통해 김영관 목사가 1986년 2월 14일 향년 90세에 소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로 보건대, 해방 이후 김영관 목사가 순교했다는 한국침례교회 내 정보는 시정돼야 한다.


김영관 목사를 포함한 4형제 후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영국 감로는 슬하에 1남 2녀, 김영진 목사는 2남 1녀, 김영익 장로는 2남 2녀, 김영관 목사는 2남 3녀, 여동생 김명선은 딸 하나를 두었다.


김영관 목사의 자녀들은 북한의 함흥과 라선시에 거주하고 있기에 그 행방을 알 수 없고, 다른 형제들의 자녀들은 지금까지 중국에 거주하고 있다. 중국 현지의 사정으로 그 이름을 밝힐 수는 없는 것이 매우 유감이나, 후손들은 선친의 신앙을 본받아 중국 공산당의 박해에도 신앙을 지켰으며, 더러는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고, 더러는 평신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다만 순교한 김영진 목사의 차남인 김기준 목사는 남한으로 내려와 슬하에 2남을 뒀는데, 장남 김중혁 목사는 경상남도 구미의 예사랑교회에서 목회하고 있고, 차남 김중식 목사는 경상북도 포항의 포항중앙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오지원 목사
한국침례교회사연구소 소장
(사)침례교 역사신학회 이사
ohjw794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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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3500여 침례교회 동역자 여러분! 무더운 여름의 끝자락에서 불철주야 목회의 사명을 감당하고 계시는 동역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114차 총회는 115차 정기총회를 준비하며 교단의 현안을 제대로 바라보고 우리의 문제와 위기를 직시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총회를 비롯해 한국침례신학대학교 관련 현안에 대해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로 왜곡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확대 해석되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어, 총회장으로서 이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침신대가 ‘평가 인증 유예’에 대해 대의원들이 알아야 할까요? 지난 2025년 6월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평가에서 한국침신대가 ‘인증 유예’ 결과를 받게 됐습니다. ‘인증 유예’라는 생소한 단어 때문에 한국침신대를 사랑하는 모든 침례교 목회자들은 의구심과 혼란에 빠졌습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왜곡된 정보, 제한된 정보, 진영에 입각한 해석에 근거한 정보가 인터넷 언론과 SNS 등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유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침례교단은 과거 왜곡된 정보와 제한된 정보, 진영에 입각한 해석에 근거한 정보로 교단의 자랑이었던 침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