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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는 영혼을 향해-1

조봉제 목사
좋은이웃침례교회

우리는 언제나 밖을 본다. 그리고 멀리 있어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갈망한다. 타인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외부의 기준을 살피느라 늘 분주하다. 그렇게 우리의 시선이 밖을 향해 있는 동안 우리는 자신을 잃어버린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자기에 대해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잃어버렸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끼리 만나 서로를 알아가려 하는 모습은 그래서 애처롭고 불안하다. 스스로를 모르는데 타인에게 나에 대한 무엇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뿌리와 토대를 모르는데 무엇을 쌓을 수 있단 말인가. 알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사람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 혼자 상대방을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대의 입을 통해 그 사람에 대해 듣는 것, 이 두 가지 방식으로 가능하다.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 좋다. 그런 사람들은 귀하다. 수가 적어서 귀하고 가치가 있기에 귀하다. 그런 귀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은 더욱 귀하다.


당신의 가면은 무엇인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겹 혹은 여러 겹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복장이나 화장처럼, 우리는 가면을 그렇게 한 겹씩은 뒤집어쓰고 세상과 만난다. 홀로 고립되어 살 것이 아니라면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모르는 사람을 포함해서 가족 같은 가까운 몇 빼고는 대놓고 민낯을 보여 주기에는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TV프로그램 중 ‘복면가왕’이 있다. 특이한 가면과 복장으로 얼굴과 신체를 숨겨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로 노래를 부른다. 결국은 경연의 일종이지만 선입견과 편견을 배제하고 노래로만 평가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누구인지 추측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예상 과는 다른 사람임을 알았을 때 우리가 발견하는 자아와 타인의 관점 차 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 보편적이고 획일화된 지식의 불완전성 등에 대해 놀라움이 더 큰 것 같다.


가면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했다. 두려움 앞에 심리적 방어기제와 자기 보호를 위해서, 자신의 힘과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가면 뒤에 숨어 해방감과 자유를 누리는 데 필요한 도구였다. 실체의 가면만이 꼭 가면은 아니다. 말과 행동, 생각과 표정이 다른 것도 일종의 가면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내’가 다르다. 나의 말과 행동에 가끔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돌아보기보다 엉뚱하게 상대방에게서 그 원인을 찾으려고만 급급했다. 나의 의도와 상대방의 인식이 달랐던 만큼 내가 수많은 가면을 쓰고 있었거나, 나 자신이 나의 진짜 얼굴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수많은 가면을 만들어 내고 그 속에서 숨어 산다. 그래서 가면이 어떤 때는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무의식 속에 또 다른 나를 표현해 내는 위선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중국의 경극 배우처럼 새로운 가면으로 시시각각 바꾸어 가며 현실에 부합하고 타협하기도 하고, 주위 환경에 순응하며 위장하기도 한다. 용기라는 가면을 쓰고 사랑 고백도 할 수 있지만, 불특정 다수라는 가면을 쓰고 무질서한 군중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마저 속일 수는 없는 일이다. 싫은 것은 싫다고, 안 되는 것은 안된다고 당당하지 못하며 속으로는 성공한 친구를 질투하고 시기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마음 없는 박수와 경탄을 내지르며 아쉬운 속내를 감췄는지도 모른다.


한때는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항시 쓰고 살았다. 마스크가 곧 가면 같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편한 측면도 있다. 내 정체성을 마스크 뒤에 숨기고 사는 재미에 빠졌기 때문이다. 얼굴과 표정이 드러나지 않고 분위기나 감정이 실종되어 버렸다. 입을 삐죽거리는지,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나도 너를 모르고 너도 나를 모른다. 감추고 산다는 게, 투명 인간이 된다는 게 사뭇 편하기도 한 것 같다. 웃고 싶으면 웃고, 화나면 화내고 살면 좋겠지만 그것을 숨기고 살아야 한다는 우리 현실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얼굴’이란 우리말의 의미는 얼은 영혼, 굴은 통로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마치 영혼이 들락거리는 것처럼 사람의 얼굴은 마음 상태에 따라 천태만상 달라진다. 가면은 ‘진정한 나와는 다른 나’의 얼굴이다. 때로는 은폐 속의 자유로움을 주지만 언젠가는 벗어야 할 가짜 얼굴이다. 어쩌면 죽음 뒤에야 비로소 가면을 벗을지도 모른다. 벗었을 때 진짜 얼굴이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면 뒤의 내면 아이
타인과 함께 있을 때 가면을 쓰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바깥에서는 사교적이고 명랑하며 적극적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돌아서 혼자가 되면 가면을 쓰느라 소진한 에너지 때문에 우울하고 외로워진다. 습관적으로 적극적인 모습을 가장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에도 발벗고 나서지만, 정작 자신이 겪는 어려움에는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천천히 삭힐 뿐이다. 타인의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를 받곤 하지만 누군가에게 그런 모습을 들킬까 봐 애써 태연한 척 표정을 관리한다. 내향적인 자신의 본 모습을 이해해 주는 친구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본능적으로 도망쳐 버린다. 적극적인 척, 대범한 척, 상처를 받지 않은 척, 괜찮은 척, 좋은 척 가장하는 속마음에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버린 내면의 아이가 숨어 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지만 지금의 50~60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어린 시절 개인의 집안 형편에 따라 부모가 낳은 자녀들을 본인이 직접 양육하지 못하고 부모를 떠나 할아버지 할머니 집이나 혹은 큰아버지 집에서 성장한 자녀들을 상담하면서 발견할 수 있었던 사례와 유형들을 살펴보면 이런 분들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성격의 유형들이 있다. 첫째는 굉장히 독특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의 존재를 남에게 굉장히 드러내 놓으려 하는 생활 패턴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셋째는 현재의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부류가 여기에 속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온전하지 못한 자신의 어린 시절 부모와의 헤어짐으로 생긴 분리불안과 채워지지 않는 굶주린 사랑 결핍의 영향은 성장하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 내면 아이의 고통이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결혼 후 가정생활을 하면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 부부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심할 경우 서로 이별하는 이혼의 아픔을 경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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