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5) 매일 새벽 2시부터 4시간씩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하여 회개 기도만을 늘 하며 지내고 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육신을 따르는 삶에서 영을 따르는 삶의 가치관으로 한 가지씩 고쳐가기를 힘썼습니다. 그리고 미숙한 인격과 추하고 더러운 그릇에서 성숙하고 깨끗한 그릇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죄의 습성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끊임없이 채워가는 식으로 수년 동안 제 자신을 빚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월삭(매월 첫날은 세상에서 하던 일을 다 내려놓고 기도원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내려오곤 했습니다)이었습니다. 그날 밤 성전에서 한참 동안 기도에 몰입하고 있는데 갑자기 “으악!”하며 큰 괴기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놀란 나머지 기도하던 것을 멈추고 눈을 떠서 쳐다봤더니, 전방 약 4m 정도 되는 11시 방향 상공에서 마귀가 아주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좌우로 휘저으며 마구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머리는 마치 사자처럼 사방으로 털이 수북했으며, 그의 얼굴은
“방탕한 선지자” 저자 팀 켈러는 “세상이 교회를 꾸짖는다”라는 휴 마틴의 설교를 인용해, 세상이라는 한배에서 이교도들과 함께 탄 거룩한 선지자 요나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 자신의 문제로 생긴 폭풍 속에서도 혼자 살겠다고 배 밑에서 잠을 자고 있던 요나를 향해 꾸짖듯 말하던 이교도 선장과 뱃사람들의 모습이다. 전남 진도에 내려온 지 이제 3년이 지나간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을 듣고 내려왔는데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사명이 흐려져 가고 지역의 한 사람이 돼 가고 있다. 만 3년이 지나가는 새해를 맞이하며 “너 무엇하느냐?”하시는 징조로 말씀하신 시간을 돌아본다. 그래서 다시 처음의 마음을 기억하며 일어나려 한다. 먼저 미국의 창조과학회를 만나 온전히 성경만을 고집하는 목회를 기도했던 마음을 위해 버거울 정도로 성경을 가까이하려 한다. 미국에 가기 전 15년 넘게 한국 목회를 나름으로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 후 미국에서 경험한 창조과학 탐사 여행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새롭게 볼 수 있게 하셨다. 그래서 바쁘다고 소홀히 했던 성경을 더 가까이했는데, 그 열정이 다시 한국에 돌아와 식어갔다. 두 번째는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남해 어느 마을에 하나님을 잘 섬기는 한 어부가 아들을 데리고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오후가 되면서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며 큰 파도가 세차게 몰려 왔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서 캄캄한 밤이 됐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을 분간할 수가 없어 표류하게 됐습니다. 어디로 뱃머리를 돌려야 할지 전혀 판단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배가 파선되어 부자가 한꺼번에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부자는 낙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부와 아들은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의 손길을 주시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로 그 때 저 멀리서 작은 불 빛 하나가 보이더니 점점 커져서 불기둥이 되어 솟아올랐습니다. 어부와 아들은 불기둥이 보이는 쪽이 육지라고 판단을 하고 사력을 다해 노를 저어 가까스로 육지에 닿아 살아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부인이 울먹이면서 “당신은 아들을 데리고 돈벌이를 하겠다고 바다로 나가 그 고생을 하면서 고기잡이를 하는데, 집에 있는 저는 제 실수로 우리집 창고에 불이 나서 곡식이 다 타버렸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자연이라는 것은 조금씩은 불필요한 것이며 더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먼지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새 며느리가 들어와 집 안 청소를 할 때 너무 털거나 닦으면 시어머니는 그것을 근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할 것이다. ‘애야,너무 그렇게 털면 복이 나간단다. 너무 그렇게 닦으면 애 복이 없어요.’이 세상에는 반드시 먼지와 때가 있게 마련이다.” 이어령 저(著) ‘ 소지향의 일본인’문학사상, 18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먼지 없는 자연이 없고, 흠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아픔이 없는 아름다움, 고통 없는 무구(無垢)함은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의 가장 뚜렷한 차이는, 살아 있는 것들은 대개 쓸모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화분이라면 필요 없는 누런 이파리나, 그게 꽃이라면 시들거나 모양이 이상한 꽃 잎들을 달고 있습니다. 반대로 죽어 있는 것들, 그러니까 모조품들은 완벽하게 싱싱하고, 완벽하게 꽃이라고 생각되는 모양들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늘 상처를 당합니다. 깔끔하지 않고 지저분하기까지 합니다. 그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완벽한 것은 인형 밖에 없습니다
필자는 지난 4번의 글을 통해 침례교 정체성을 이루는 성경중심주의, 신자의 침례, 중생자 회원, 엄격한 치리, 상징주의 성례신학, 회중주의, 개교회주의 등을 소개하였다. 이번 호에는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주의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침례교회는 태동할 당시 다른 개신교단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두 가지 믿음과 행습이 있었는데, 첫째는 신자의 침례요, 둘째는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였다.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와 성서의 사적 해석권을 주장했고, 그러한 사상은 종교의 자유를 내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국교회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가교회 체제에서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것은 반역죄로 여겨졌다. 침례교회가 태동할 당시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침례교인들은 순교와 박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영국에서 최초로 침례교회를 세운 토마스 헬위스는 ‘불법의 신비에 관한 짧은 선언문’이란 소책자에서, 침례교인들은 결코 반역자들이 아니며 단지 종교와 세속의 영역을 구별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앙은 양심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세속 권력이
원산총부와 교단의 지도자들 II. 동아기독교의 북한 교회개척과 북방선교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는 해방 전·후로 나뉜다. 전자는 동아기독교의 북방선교가 성공한 때이고, 후자는 북한이 공산화가 되면서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가 쇠락하여 소멸한 때이다. 그렇다면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가 북방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어떻게 감당했는지 살펴보자. 1. 해방 전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 성장 1) 교세 해방 전 남북한, 만주, 시베리아 전역에 동아기독교의 교세는 약 250개 교회에 1만 명 성도를 지닌 규모였다. 이는 장일수가 “(1944년 5월 10일 동아기독교)폐교 당시 전 동아기독교회 수는 250여 처였고, 침례교인이 만 명이었다”라고 술회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김용해와 이정수도 1940년 동아기독교회의 교회가 250개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이는 장일수가 언급한 것과 동일하다. 그런데 김용해와 이정수는 한반도 전역에 24개 구역에 100개의 교회가 있음을 밝혔는데, 이에 따라 남북한 동아기독교회의 교세가 어떠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6년 2월 9일 칠산교회에서 교단 재건회의가 있은 후 “(동아기독교)교회의 분포는 남한보다 북한이 훨씬 우세했고 교단의 시련으로 이 교단
2019년은 말콤 C. 펜윅(Malcolm C. Fenwick) 한국선교 130주년이 되는 축복과 감사의 해이다. 놀라운 것은 펜윅의 46년 선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가 ‘북방선교’라는 사실이다. 펜윅은 한반도의 북쪽 끝자락에 있는 세 곳의 ‘변방 지역’인 북한의 함경북도, 중국의 만주, 러시아의 시베리아(연해주)가 서로 만나는 곳에서 ‘변방선교’의 꽃을 피웠다. 그는 ‘함경도-만주-시베리아’라는 삼각편대의 북방선교를 동아기독교(침례교)의 선교정책으로 삼아 후원교회도 없이 단신의 몸으로 동아기독교회 가운데 약 80%의 교회를 북방선교에 투입했고, 이러한 과감한 추진의 결과는 놀라운 결실을 가져왔다. 이 때문에 그를 ‘북방선교의 대가’라 부르게 됐다. 1940년대 동아기독교의 교세를 보면 한반도에 100개(남한 40개, 북한 60개), 만주에 100개, 시베리아에 47개, 내몽고에 최소한 3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북방선교(함경도-만주-시베리아)에 가담한 교회는 무려 78%나 되었다. 무엇보다 동아기독교의 북방선교는 ‘3C’ 전략을 통해 성공했는데 ‘3C’란 헌신(commitment), 순회전도(circuit evangelism), 교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일명 탕자의 비유의 주인공은 작은 아들도 큰 아들도 아닌 아버지이다. 자식을 향한 애절한 아버지의 모습은 백지에 도장처럼 선명하게 찍힌 하나님의 심정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보면 또한 보고 만질 수 없는 하늘 아버지의 모습(형상)이 투영되어 있음을 보고, 아버지의 성품을 통해 인간의 생각과 경험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기막힌 사랑이 우리에게 스며들어 온다. 그럼에도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 상은 우리가 원하는 아버지 상과는 사뭇 다르다. 어린 자녀가 원하는 아버지는 위기의 순간마다 구출해 주는 힘센 슈퍼맨(Superman)이나 언제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멕가이버(MacGyver)이다. 그러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우리의 예상을 빗겨간다. 그는 초인적 영웅도 권위적인 아버지도 그저 평범한 아버지도 아닌 무력하고 나약하고 무능한 한 아버지에 불과하다.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 아버지 상과는 더욱 멀어 보이는 듯하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물려받을 수 있는 유산을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재산을 분배해 줬다. 작은 아들은 몇 날이 안 되어 아버지의 재산을 현금화하여 도주
“무시무시한 것이 많다 해도 인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 소포클레스 저(著) 천병희 역(譯) ‘소포클레스 비극’(단국대학교출판부, 10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김지하 시인은 ‘두타산’에서 인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 / 산이 산을 그리워하던가 / 된장이 된장을 그리워하던가 / 양파가 양파를 그리워하던가 / 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 / 이것은 절대 지상 철학이다.” 이 시를 듣자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은 이렇게 화답했다고 합니다. “산이 산을 무서워하던가 / 된장이 된장을 무서워하던가 / 양파가 양파를 무서워하던가 / 사람만이 사람을 무서워한다…” 옛 어른들의 이야기입니다. “옛날부터 밤길을 가다가 짐승을 만나면 훈기(薰氣)가 있는데, 사람을 만나면 한기(寒氣)가 느껴진다.” 참 무서운 건 짐승도 귀신도 아니라 사람이라는 겁니다. 너무나 아이러니합니다. 사람만큼 그리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또 사람만큼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 제일 아름다운 것도 인간이고, 제일 무서운 것도 인간입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면 두 가지 사실에 놀랍니다. 첫째는, 이렇게 멋진 사람이 있다니. 둘째는, 이런 괴물이 있다니. 하나님이 인간과
“꽃피는 날들, 우린 기쁨을 탕진해 버렸다. 그러하니 꽃 지는 이 날에, 그 기쁜 흔적들 남겨 쓸쓸함에 보험 들어야 함을 잊었다. 꽃피고 꽃 지는 일, 모두 한 가지에 달린 작은 떨림들인 것을 어찌 해마다 이리도 속아 버리는가.” 이상국 저(著) ‘옛 시 속에 숨은 인문학’(슬로래비, 20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속아도 좋아 저 꽃을 보면은” “속아도 좋아 내 자식을 보면” “친구의 사랑은 믿어 주는 것이고, 부모의 사랑은 속아 주는 사랑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식들의 말에 부모님처럼 잘 속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식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그대로 믿는 사람이 부모님입니다. 자식에 대한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류영모 저(著) ‘은혜의 영성으로 살다’(와웸버플, 68쪽)에 보면 어머니를 멋지게(?) 속인 사건이 나옵니다. “아마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어머니를 멋지게 속였다. 용돈이 필요해서 ‘영어 사전’을 산다고 돈을 받았다. 그 다음 날에는 ‘Dictionary’를 산다고 돈을 받았다. 또 다음 날에는 ‘Concise’를 산다고 돈을 받았다. 책 한권을 사면서 세 번씩이나 어머니의 주머니를 긁어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