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은섭이는 미숙아로 태어났고 모든 것이 더디고 힘들었지만, 하나님께서 너무 이뻐하고 사랑하는 아들인 것을 항상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는 엄마의 임신중독증은 산모가 위험한 병이라는 의사의 이야기를 엄마 뱃 속에서 들었는지 다음날 이 땅에 태어났고, 7살쯤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7시간 가량의 ‘양쪽 고관절 수술’을 할 때도 의젓하게 잘 견뎌줬고, 8살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사시수술을 할 때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잘 버텨줬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수업을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학교에서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며 즐겁게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치료를 다니고 돌봄어린이집에 다니면서도 항상 밝게 웃는 ‘미소천사’였습니다. 그러던 중 엄마의 갑작스러운 뇌출혈은 어린 은섭이에게 충격이었지만, 매일 엄마가 깨어나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2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엄마를 보기 위해 병원에 갔습니다. 엄마와 함께 병원밥도 맛있게 먹었고, 엄마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했습니다. 12년이라는 엄마의 빈자리를 아빠 혼자서 채워 줬지만 아들은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고 오히려 엄마를 걱정하는 아주 착한 크리스천이
2014년 2월 16일, 저희 가족에게는 잊지 못할 아픈 기억이 존재합니다. 제법 알려진 대로, 동생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저희 곁을 떠난 날입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보통 저녁 9시 정도 됩니다. 그러면 저희 아래층에 계시는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2층으로 올라갑니다. 손 발을 씻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텔레비전을 틀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개그콘서트를 함께 보다가 잠이 들었고, 그제서야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뉴스를 보게 됐는데, 갑자기 속보 한 줄이 화면 아래에 굵게 자리하였습니다. 한국인 성지순례객이 이집트 타바 국경에서 폭탄테러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는데, 뉴스를 보다 속보라고 뜨는 내용이야 수도 없이 봐왔기 때문에 아내와 함께 다친 사람이 적었으면 좋겠단 이야기를 나눈 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통곡소리가 들려 누가 이렇게 울부짖냐 하니 아내가 1층에서 들리는 소리 같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뛰어 내려가니 아버지께서 저를 보시자마자 “우리 막둥이가 죽었다”고 큰 울부짖음으로 말씀하십니다. 깜짝 놀라 TV를 바라봤습니다. 아무리 확인을 해봐도 한국인 사망자 명단에 동생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당연
아내인 조은영은 1999년 대학원을 다닐 당시에 동기 전도사의 소개로 만나게 됐습니다. 모교회인 대흥교회 청년부를 출석하는 자매였습니다. 아내와 저는 비전과 꿈이 같았고 아내는 사회복지에 관한 일과 상담 관련 직장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하며 빠듯한 생활을 하면서 부푼 꿈을 꾸며 신학생으로 열심히 공부해 앞으로 유학을 가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런 저희는 2000년에 결혼해 가정을 이뤘고, 오랫동안 기도했던 아들을 주셔서 2001년 3월에 출산을 했습니다. 당시 아내가 사회복지 공무원으로 잦은 야근과 과다 업무로 인해 ‘임신중독증’이라는 산모에게 치명적인 병이 걸립니다. 산모와 태아가 모두 위험했는데 감사하게도 아들이 2개월 먼저 태어났고 둘 다 중환자실로 가게 됩니다. 아들 은섭이는 인큐베이터에서 1.73kg 미숙아로 태어나 한 달을 보냈습니다. 교회와 동기 전도사들의 간절한 기도로 퇴원했지만, 아들은 뇌가 심하게 손상돼 ‘백질연화증’으로 중증뇌병변장애아가 됐습니다. 충남대학교 재활의학과 교수는 아들이 이 땅에 살 동안은 평생 혼자 걷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판정을 내렸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힘이 들었지만
이 분위기는 제가 선배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3학년 졸업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는데, 졸업을 하고 떠난 사람이라도 흑석동 건일이 형의 존재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러 3학년 수능시험을 몇 주 앞둔 어느 날 이었습니다. 위의 선배라는 사람을 한 명 데리고 건일이형이 학교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진혁아, 잘 지냈냐, 인사드려라 동석이(가명)형이다.” 덩치가 정말 어마어마했습니다. “우리 학교 선배님이시기도 하다.” “네.” “일단 어디로 가자.” 동석이형은 이미 술이 좀 취해 있었는데, 학교 앞 도로에서 제 교복을 벗어 달라더니 자기 바지까지 다 벗어서 저에게 던져줍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팬티 한 장 걸친 채 옷을 갈아입고, 형들이 안내하는 지하 술집으로 향했습니다. “야! 얌마!! 거기 교복 어디가!” 화장실 쪽에서 나오던 사장님이 우리를 불러 세웁니다. “사장님 저에요, 동석이” “동석이 왔는가? 이게 뭐여 깜짝 놀랐네.” 조그만 밀실 같은 곳으로 들어가니, 이미 술이고 뭐고 다 세팅이 되어 있고, 제 자리까지 마련되어 있습니다. “진혁이라고 했냐? 한 잔 받아라.” 옆에 있던 건일이 형이 양주잔을 하나 들어 저에게 주며 말을 잇습니다. “
“다시 한 번 불러봐라. 노래 죽이네!” “그래, 다시 한 번 해봐.” “알았어.”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녀석들이 저를 따라 한 소절 한 소절 같이 부르기 시작합니다. 한 열 번쯤은 반복했을까요, 영수가 뜻밖의 이야기를 합니다. “나 사실 교회 다녔었다.” 1992년 10월 28일 휴거설을 주장하던 단체를 기억하실 겁니다. 자신이 다니던 다가동 광O교회 여자 목사님이 어느 순간 갑자기 휴거를 말씀하시며 아이고 어른이고 매일 집회를 다녔는데, 자신도 그 때까지 가족과 함께 매일 교회에 나가 찬송하고 부르짖었답니다. 드디어 D-day, 학교도 가지 않고 교회에 모여 기도로 대기하던 중, 그 하루가 그냥 흘러가 버렸고, 당시 함께 했던 학생회 친구들이 거의 다 실망하며 교회를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교회로는 한 번도 걸음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 때 영수와 함께 교회를 빠져나온 제법 친한 친구 중에는 나중에 이름 있는 한류 여배우가 된 친구도 있었다는데 옆에서 가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 녀석이 영수의 이마를 한 대 쥐어박으며 헛소리 그만하고 다시 이 노래 좀 불러보자 합니다. 그 녀석이야말로 교회 근처도 가 본 적 없는 놈이었는데 이 노래
열일곱 나이에 집을 나섰습니다. 남들은 고등학교에 입학할 시기에 저는 집을 나갔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있어 봐야 고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자식이 자랑스러울 것도 없고, 교회의 수많은 눈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습니다. 관리집사 둘째 아들의 본격적인 방황이 시작됐습니다. 전라북도 전주, 지금은 한옥마을로 조성돼 있는 교동이라는 곳은 제법 오래된 집들이 즐비해 있는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외가 친척들이 아직 좀 계신다는 것이 부모님께서 저를 놓아주신 큰 이유기도 했던 곳입니다. 볼품없는 노목이 가득한 채 동네 어귀를 휘돌아 위치한 작은 언덕이 있고 군데군데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가 있어 밤이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한 달에 3만 원짜리 작은 방은 연탄창고를 치운 볼품없는 공간이었고, 식수를 비롯해 씻을 수 있는 물은 집 앞의 우물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끼니는, 시간이 아니라 배가 고프면 해결했습니다. 늦게까지 자고 일어나서 15분 정도 대로까지 걸어 내려가면 900원에 칼국수 한 그릇을 할 수 있었고, 돌아오는 길에 전주공업전문대학교에 들어가면 형들과 축구며 농구며 어울려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취방 살림이라곤 기타 한 대와 라디오 한 대뿐이었습니
은퇴하신 목사님 사모님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은목교회가 있는데 수요일 예배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점심식사를 대접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요예배에도 45명 정도의 목사님 사모님들이 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가까운 식당에서 식사하고 교제하면서 은퇴 후의 삶에 대한 이런저런 애환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원로 목사님으로 교회에서 예우를 받으시는 목사님이나 교단 연금을 받으시는 목사님들은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롭게 사시지만 원로 목사님이 아닌 은퇴 목사님은 경제적으로 좀 어렵게 생활하시는 목사님도 있고 배우자가 먼저 천국 가신 목사님이나 사모님은 집에 가도 대화할 사람도 없이 혼자라는 마음의 외로움도 크지만 정부에서 주는 기초연금과 자녀들의 도움으로 생활하는 분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시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은목교회를 찾아와서 말씀을 전해주고 식사 대접 해주어서 너무 고맙다고 하시며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도 다 은퇴할 날이 올 텐데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은퇴를 할 때까지 목회를 잘 마치신 목사님 사모님들은 행복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드는 안타까운 일들도 있습니다. 아직 한
천안교도소에 근무할 때 일이다. 이곳은 소년 수용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들은 죄를 짓고 들어온 젊은이들이지만 어떤 수용자는 탤런트처럼 외모가 준수하고 예의도 바른 젊은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아들처럼 정감이 가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한번은 상담 요청이 들어와 한 수용자를 만난 적이 있다. 이유를 알아보니 다른 수용자가 왕따를 시킨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수용자는 자기밖에 모르는 극히 이기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밥을 먹을때도, 잠을 잘 때도, 청소를 할 때도, 항상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아이였다. 나는 이미 그런 그가 기독교신자이며 기독교 집회도 나오는 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너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야단을 쳐보기도 하고 때론 잘 권면하기도 해 보고 두손을 잡고 기도도 해주곤 했다. 그럼에도 막무가내다.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꽉 막혀있는 이 수용자에게 성가대에 들어와 하나님을 찬양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의외로 고개를 끄덕인다. 성가대가 조직된 지 불과 몇 달도 채, 되지 않았고 성가대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전 세계가 기후 위기에 공감하고 탄소중립을 향하고 있다. 이전의 글로벌 탄소 감축 목표였던 파리협약이나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가 선언적이고 자발적인 목표였다면, 탄소중립은 국가별 순 탄소 배출량을 0으로 설정하는 명확한 목표와 함께 다소의 강제성을 띠는, 실제적 목표라 할 수 있다. 2022년 11월 기준으로 전 세계 탄소의 90%를 배출하는 140여 개 국가가 2050년 전후의 탄소중립을 선언했으며, 특히 탄소배출 1위 중국과 2위 미국이 참여하여 국제적 공조가 기대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지난 6월 22일 ‘2050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제4차 전체 회의 심의를 거쳐 관계부처 합동 ‘제3차 국가 기후 위기 적응 강화대책’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이번 ‘제3차 국가 기후 위기 적응 강화대책’에는 △기후 감시예측 시스템 과학화 및 대국민 적응정보 접근성 제고 △미래 기후위험을 반영한 사회 인프라 개선 △기후재난 사전 예·경보 강화 및 취약계층에 대한 피해 최소화 △모든 주체가 함께하는 기후 적응 추진 등의 과제가 담겼다. 한화진 환경부 장관은 “심화하는 기후변화에 관한 과학적 예측을 기반으로 미래 기후위험을 선제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사회
어찌됐건 한 번은 선생님을 면담을 해야 하기에 아버지와 함께 학교로 갔습니다. “아버님, 진혁이는 이렇게 해서 어디도 갈 수 없습니다. 어디 시골에 미달인 실업 고등학교 같은 데라면 모를까….” 그대로 아버지와 학교를 나와 당산역으로 말없이 걸었습니다. 집이 있는 사당역까지 2호선을 타고 11개 역이면 되는데, 아버지는 건너편으로 저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바람 좀 쐬고 들어가자.” “예.” 그렇게 2호선 순환선을 타고 거꾸로 30여 개 넘는 역을 지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그 날도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집이 마치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차라리 때리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 중압감을 못 이겨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아빠, 나 전주 내려갈게요. 집에 있기가 싫어요.” “그래, 삼촌들도 그 쪽에 있으니 그게 낫겠다.” 1초도 생각 않으시고 집을 나가겠다는 제 말에 바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아, 아버지가 나를 포기하셨구나. 이제 나는 내놓은 자식이 되는구나. 차라리 잘 됐다. 내 맘대로 살아야겠다.’ 속 시원하긴 해도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길로 짐을 싸서 전주로 내려와 3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