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제 이런 주제를 가지고도 글을 쓰다니 필시 젊은 나이는 아닌가 보다. 하기야 어느 새 나도 반백년 인생을 지나고 있으니 그도 그럴 게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가 있으랴.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을 수가 있으랴. 지난 주 유독 이 생각을 더 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런 얘기까지 꼭 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며칠 전인가 잠들기 전 몸을 씻고 발을 닦으려는데, 발 닦는 수건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어디선가 받은 기념 수건인데, 그 수건에 적힌 날짜가 눈에 들어온 게다. ‘1996년 12월 11일 경북함 단합대회 기념’. 순간 그것을 보고 발을 닦으며 그리 생각했다. ‘아~ 벌써 10년 전이네….’ 아마도 그때가 생생히 기억되어 그랬나 보다. ‘경북함’은 내가 해군의 12년 군목 시절 동안 잊지 못할 몇 군함들 중 하나이다. 그 어떤 배보다 자주 그 함정을 방문했었고, 자주 타기도 했으며, 심지어 해외 순항훈련까지도 그 군함을 타고서 3개월 간 세계의 바다를 누볐었다. 그러니 1996년 12월의 그날은 생생히 기억한다. 나 또한 그 단합대회에 참석하여 축하해주면서 수건 한 장도 선물로 받아왔던 일. 그러니 그 수건을 보자마자 ‘벌써 1
예수님과 유대인 랍비 니고데모와 대화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가지신 가장 중요한 관심은 그 사람이 “새롭게 태어났는가? 거듭났는가?”하는 것입니다. 21세기 한국교회도 가장 긴급하게 앉아 대화해야할 부분이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함께 앉아 대화한 그 자리에 함께 앉는 것입니다. 현대교회가 겪는 영적 공황상태의 원인은 “새로운 탄생, 거듭남”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전도자 빌리그래함 목사는 “우리 시대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상을 변화시킬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 원인은 우리 사회 곳곳에 영적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시대는 변화의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심 주제는 “새 생명의 탄생, 거듭남”입니다. 새 생명으로 거듭난 소수의 사람들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이교도 국가인 로마제국을 복음으로 정복했습니다. 돌맨 박사가 한 말은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근본적인 진리가 빠져버린 설교는 그리스도인을 위대한 삶으로 성장시키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이 경고의 말은 본질적 진리가 빠져버린 메시지로는 그 누구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일
								지금 한국교회는 위기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의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을 진단하신다면 어떠한 평가를 하시겠는가? 한국교회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반추하여야 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무엇에 이끌려야 하는가? 교회는 예수를 머리로 하는 몸이다(고전 12:27; 엡 1:22~23; 4:14~16; 골 2:19). 따라서 교회는 주님의 목적과 방법에 따라 이 땅에서 주님의 사명을 이루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마 28:19~20; 엡 4:12~13; 골 1:28). 한국 침례교회 또한 머리 되시는 주님의 뜻에 따라 이끌리고 움직이는 영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서 순종의 삶을 사셨다(마 26:39; 요 17:4; 롬 5:18~19).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사명을 어떻게 이루셨는가? 예수께서 이 땅의 공생애 기간 동안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한 사역 방법들과 전했던 메시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근대설교학(modern homiletics)의 기틀을 만드는 데 공헌했던 침례교 설교학자 존 브로더스(John Broadus)는 예수 그리스
얼마전 대통령의 탄핵이 국회에서 압도적인 표로 가결됐다는 것입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 가슴이 아프고 슬펐습니다. 우린 벌써 최근에 두 분의 대통령을 탄핵시킨 기록을 남기게 됐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사상 초유의 사건일 것입니다. 2004년에 이어 12년 만에 우리는 또 한 번 대통령을 끌어내린 셈입니다. 잘잘못을 떠나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명예로운 말은 이제 우리의 것이 아닌 듯 싶습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이 지경이 되도록 정치하는 사람들은 다 무엇을 했습니까? 국민의 혈세로 살아가면서 고작 그들이 한 것은 동네 아이들의 패싸움 같은 것만 일삼고서 이제 와서 동네북처럼 한 두 사람만 잡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쳐갑니다. 성숙하다는 것은 책임을 질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한 말과 행동에 자신의 인격과 양심을 걸고 책임을 지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볼 때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미숙한 성인 아이(Adult Child)같은 지도자들이 너무도 많음을 봅니다. 정치권은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미숙한 언행을 하는 사람들이 판을 치는 모습을 보
용은 봉황(鳳凰)과 더불어 상상 속의 동물이지만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는 신비한 영력을 가진 존재로 기림 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용과 관련된 어휘는 하나같이 길(吉)한 의미를 가졌다. 등용문(登龍門), 용왕(龍王), 용꿈, 용안(龍顔), 용상(龍床), 용포(龍袍)등이 있다. 용이, 이와 같이, 동양에서 추앙에 가까운 존중을 받는 것과는 달리, 서양에서는 고대로부터 악마의 상징으로 묘사됐다. 독일의 기사도 문학을 대표하는 대 서사시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저주에 걸린 반지를 가지고 악행을 일삼는 용을 죽이고 반지를 되찾은 영웅 지그프리트의 무용담과 그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며, 영국의 고전 서사시 베어울프( Beowulf)는 인간 희생제물을 요구하는 화룡(火龍)을 잡으려고 용의 동굴로 들어간 베어울프의 영웅적인 모험을 그린 이야기다. 필자가 용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최근 대통령을 탄핵이라는 막다른 골목까지 몰고 간 “최순실 게이트”와 용이 상관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공개된 미르·K스포츠 로고에는 하늘로 비상하듯 몸을 비튼 용의 형상이 있었다. ‘미르’가 우리 옛말로 용을 뜻하기 때
의심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반신반의하던 기드온이 결정적으로 변화된 계기가 바로 사사기 7장14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적군인 미디안의 군사에게 꾸게 했던 보리떡 한 덩이 얘기 때문에 되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확신을 갖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300명의 용사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외칩니다.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15절) 기드온은 15절을 전후로 해서 전혀 딴판이 됐습니다. 그의 신앙과 삶에 분수령이자 놀라운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 사람이 급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전적으로 변화된 확신의 경험이 있습니까?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들을 세 대로 나눕니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으로 배치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각자에게 무기를 들려주는데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무기였습니다. 바로 “빈 항아리”와 “횃불”, “나팔”입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아마도 이렇게 특별한 무기는 여기 밖에 없을 것입니다. 칼이나 창과 활이 아니라 횃불과 나팔이었습니다. 이상한 무기에다 이상한 전
어떤 선교 단체가 복음전파를 소홀히 여기며, 어떤 선교사가 복음을 위해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랴만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도들의 경건하고 헌신적인 삶과 희생적 선교는 비교할 데가 없다. 이 공동체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도와 선교에 대한 열정이었던 것 같다. 1. 기도 1722년 90명의 신도들이 모라비아를 떠나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진젠도르프의 영지(領地)인 헤른후트로 이주해서 정착했고, 4년 후인 1726년에는 그 수가 300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1727년부터 24명으로 구성된 기도 모임(들)을 만들어서 남여 두 사람이 짝을 지어 자정부터 한 팀이 한 시간씩 24 시간 연도(連禱)를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이 기도가 그로부터 백년 이상 지속됐으며, 기도를 시작한 때로부터 2백년 동안 모든 대륙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사실이다. 2. 선교 모라비안 교회는 1732년에 서인도제도에 선교사를 파송한 것을 시작으로 1735년에는 그린란드와 수리남, 1737년에는 아프리카, 1740년에는 아메리카 인디언과 실론, 1742년에는 중국, 1747년에는 페르시아, 1754년에는 자메이카, 1756년에는 안티구아(Antigua)에까지 선교사
재침례교도들은 제자도를 신앙 정신의 가장 근간에 두었는데, 그들은 제자도를 첫째 그리고 근본이 되는 기독교의 핵심으로 삼았고, 제자도를 신자 개인과 공동체가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 본을 보이신 것을 따라 삶을 바꿔야만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재침례교도들은 교회 타락의 원인이 제자도의 상실에 있으며 당시 교회들이 초대교회 사도들이 보여주었던 제자도의 첫 사랑의 열정을 잃어버렸다고 보면서 제자도 회복을 추구하였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제자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동료들과 그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 가족, 친구, 직장 등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빛을 발하는 것이다. 모든 선한 행위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나아가고, 선교 운동에 참여하고, 사람들의 필요들을 충족시키며 상처를 싸매주는 사랑을 실천한다. 제자도란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목적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길을 실천하는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공동체적 제자도를 실천한다. 멀린스가 말하는 “영혼의 역량” 개념은 인간 개인에게 하나님과 인격적인
몇 해 전에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개최된 유럽지역 선교사대회에 참석하는 동안 모라비안 교도들의 유적지 헤른후트(Herrnhut)를 방문해서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는 모라비안 교회와 수 백기에 이르는 신도들의 묘역을 탐방할 기회를 가졌다. 모라비안 운동의 지도자 진젠도르프(Nikolaus L. von Zinzendorf, 1700-60)는 작센 지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신앙심이 돈독했던 외조모 헨리에타(Henriette Gersdorf)에게 경건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열 살 때 할레대학(Univ. of Halle)에 입학해서, 후에 스페너(Philipp J. Spener, 1635-1705)의 뒤를 이어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선구자가 된 프랑케(August H. Franke, 1663-1727)와 우정을 쌓았고, 재학 중에는 다섯 명의 친구들이 “겨자씨 모임”(The Order of the Grain of Mustard)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신앙상담을 하며 선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젊은 귀족 진젠도르프는 1719년, 유럽 여행 중에 뒤셀도르프에서 “내 너를 위여 몸 주건만 너 나를 위해 무엇 주느냐”라는 각명(刻銘)이 붙은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8: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며, 저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선 먼저 애굽에서 구원 받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희 장인어른과 장모님께서 살아생전에 감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사시는 집에 감나무 한 그루를 심으셨습니다. 그 후 매년 가을이 되면 두 분께선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것을 따서 드시기도 하면서 곶감도 만들어 자녀들이 사는 집들을 방문하셔서 곶감을 나눠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턴가 이 감나무가 병이 들기 시작하면서 감들이 익기 전에 하나 둘씩 마당에 떨어지면서 여간 마당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열심히 약도 치고, 거름도 주면서 최대한 살려 보려고 노력 했지만 매년 이러한 현상이 되풀이 되는 것을 참다못해 끝내는 감나무를 톱으로 잘라버리셨습니다. 감을 먹기 위해서는 일단은 감나무를 심어야 되고, 심은 감나무는 계속적으로 감을 실하게 잘 맺혀줘야 되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선 일단 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