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지혜와 계시의 성령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을 아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 의한 계시를 강조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소식인 복음은 근본적으로 만세 전에 감추어졌던 비밀이기 때문에, 그 비밀은 오직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알려진다는 것이다. 이 복음의 비밀은 이전 세대들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택하신 종들(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셨다(엡 3:5). 뿐만 아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하나님이 그의 택함 받은 백성들에게 성령의 계시를 통해 알려주셨다(골 1:26). 사도 바울은 이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알며 그 생명과 권능을 풍성하게 누리고 나아가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절대적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이러한 성령을 통한 계시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이러한 계시의 은혜를 받도록 기도하고 있다. 그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기도제목을 말하면서 먼저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받도록
세상가운데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평균적으로 몇 가지의 공통적인 힘이 있음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머리에는 이해력이, 눈에는 분별력이, 입에는 논리정연한 구사력과, 손에는 휘어잡는 장악력이, 일할 때는 강한 추진력과, 태도에는 단호한 결단력이 있고 인격에는 감화력과 영혼에는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지도자일수록 위에 말한 여러 좋은 점들을 갖고 있으나 모두 다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개는 몇 가지씩은 소유하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어떤 점들을 갖고 있습니까? 여리고의 아모리족 여인 기생 라합은 비록 신분은 낮았고 직업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녀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점들이 있음을 성경에 나타난 내용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점들을 사모해야 합니다. 라합은 분별력이 있었습니다(수2:9~10). 그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한 눈에 알아봤습니다. 그녀에겐 결단력도 있었습니다(2:4~5, 히11:31). 자기네 집으로 숨어 들어 온 두 정탐꾼을 대범하게 숨겨줬습니다 그녀에게는 논리정연한 언어구사력도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2:11~13). 그래서 정탐꾼들도 그녀의 말을 듣게 됐습니다. 라합은 여인이었지만 신속한
“부위인자자 출필고반필면”(夫爲人子者 出必告反必面)이라는 옛 교훈이 있다. 자식은 집을 나갈 때는 반드시 부모에게 고하고 돌아와서는 대면하고 인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사람은 출입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교수 시절, 어느 여름 방학에 총장실에서 대학원 소속 교수 한 사람을 찾는다는 급한 전갈이 있었다. 대학원 조교들까지 동원해서 여기저기 수소문한 결과 뜻밖에도 그 교수는 해외에 나가 있었다. 교수들에게는 방학 동안에도 보충수업과 성적확인 기간이 있고 각종 위원회와 논문지도, 학생모집 등의 부가업무가 있어서 장기간 해외 채류는 불가능하며, 또 교직원은 해외에 나갈 때는 반드시 절차를 거쳐 대학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그가 무단 출국한 것은 대학과 학생들에게 불편을 주었을 뿐 아니라, 좋지 못한 선례까지 남기게 되었다. ‘출필고’ 하지 않은 불상사이다. 한 번은, 목회하는 친구가 선교지에 가야할 일이 생겼다면서 한 주간 동안 세 번의 설교를 부탁하기에 기꺼이 수락하고 친구의 교회에 가서 예배를 인도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돌아온 후에도 전화 한 번 하지 않았다. “우리 교회 와서 수고 많았어. 덕분에 잘 다녀왔네” 해야 마땅한 일 아닌가. ‘반필
죄 짐에 눌려 저주아래 소망 없이 살던 인생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천국을 소망하며 예수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90세 되시는 할머니 집사님이 60대 후반에 따님의 권유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해서 처음에는 신앙생활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럭저럭 다니다가 말씀 듣는 귀가 열리면서 말씀에 은혜를 받고 저녁 기도회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나오시면서 이런 고백을 했다. “목사님 내가 예수님 믿지 않았다면 노년에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싶습니다. 내 성격에 경로당에도 안다니고 방안에만 들어앉아 있다가 치매라도 걸렸을지 모를 텐데 예수님 믿고 우리 목사님 만나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오늘은 무슨 말씀을 전하실까 궁금해서 교회 안 올수가 없어요. 힘들어도 오면 은혜 받고 힘이 나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즐겁고 행복합니다.”라고 했다. 할머니처럼 신앙생활은 기쁘고 행복해야한다. 노인도 젊은이도 예수 믿으면 즐겁고 행복해야하는 것은 복음은 기쁜 소식이기이기 때문이다. 성도들 중에는 행복하려고 시작한 신앙생활이 또 하나의 짐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내 힘으로 선을 행하여 의로워지려고 노력을 하면 할수록 힘이 들고 무거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어느 성도님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불신자인 남편이 자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교회 다니면서 헌금이나 갖다 내고, 봉사도 하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데 도대체 얻은 것이 뭐가 있소? 뭐 때문에 교회 다니는거요?”라고 하더랍니다. 도대체 열심히 교회 다니며 신앙생활 하면서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돈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일이라면 하나님 모르는 불신자들도 돈 많이 벌어 부자로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이라면 불신자들도 무병장수하여 오래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출세와 성공의 길이 열려서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 구하고, 고속 승진 하는 것이라면 불신자들 속에서도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핵심적인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다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고난을 통해서 크고, 강하게 자라 갑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낸 후 홍해에서 침례식을 거행하신 다음, 그 후 부
하루를 지내다보면 가장 많이 오는 메일이 스팸메일이고 다음이 여행안내 메일입니다. 그것은 현대인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연휴가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쉼’을 위해 국내외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OECD국가 중에서 11년 연속 자살률이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루 평균 40명이 자살하고 매 30분마다 한명씩 삶을 포기한다는 통계는 인간 스스로의 ‘쉼’의 한계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에서 최우선적인 주님의 부르심은 “와서 쉬라”는 초청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주님위해 일하다가 지치고 때로는 병까지 얻기도 하며 낙심하고 불평하며 심지어 주님 곁을 떠나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은 “참된 평안과 쉼”을 위해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만이 어떤 경우와 처지에서도 결코 고갈되지 않는 무궁무진하신 참된 인격을 소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삶에 지친 우리에게 평안과 쉼을 제공하시기 위해서 때와
Ⅰ. 들어가는 말 기독교 신앙은 실천적 특성을 가지며, 신앙과 실천은 상호 보완적 관계를 갖는다. 즉 신앙에 근거하지 않은 실천은 타당성과 일관성 그리고 지속성을 부여받지 못하며, 실천 없는 신앙은 관념적이고 무기력하며 그 진정성에 손상을 받는다. 한국 교회를 비롯하여 현대의 기독교는 실천성의 약화로 인해 영향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사회적 부담과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물론 그동안 기독교가 실천을 몰랐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앙의 실천성을 재확인하고 강조함으로 활력을 회복하고 능력과 영향력을 재정립해야 한다. 현대교회는 점점 전도적 열정과 동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 같다. 이에 한국침례교회는 지난 역사적 경험 속에 깃들어 있는 실천적 신앙의 유산들을 일깨워 새로운 부흥과 성장의 전환점을 마련해야 한다. 유재성은 바람직한 미래를 제시하면서 현재의 문제를 극복하도록 돕는 라이프웨이 상담법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으로 직접 역사하기도 하시지만,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크신 일을 이루신다.”고 언급하면서, 과거에서부터 역사해 오셨던 하나님의 흔적인 은혜의 사건들을 찾아내어 미래를 전망함으로 그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게 하기
내 인생 반백년에 과연 필요치 않은 경험이 하나라도 있었을까? 문득 생각해보았다. 몇몇 성공했던 경험들을 포함하여, 실패한 경험, 상처 받은 경험, 너무나 억울해 주저앉고 싶었던 경험들과 하나님과 나 자신과 가족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했던 경험들까지도 모두 합해서…. 결론은 아니었다. 그 모든 경험들은 다 내게 필요하였다. 성공한 경험들은 나를 자신감 있게 만들었고 당당하게 만들었다. 그 쌓여진 경험들로 인해 더 큰 것을 추진할 용기도 가질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내 존재감을 알리는 일에도 기여하였다. 참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실패 경험들 역시도 필요하였다.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나의 한계도 깨닫는 소중한 기회들이었다. 하나님을 더 의지할 수 있었고, 나를 진지하게 돌아보게도 해주었다. 다른 사람의 입장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님도 깨닫게 해주었다. 경청과 배려, 양보와 이해, 수용과 용서를 학습하게 되었고, 기다림과 내려놓음, 생각의 정돈과 인격의 다듬어짐도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일부는 진행형이지만…. 그렇다면 내 일생에 만나는 사람들 역시도 그러하리라. 우리의 만남에 어찌 우연이 있으랴. 필요하니 만나게 하신
그래서 전혀 새롭게 출발해야 했다. “의로운 해”(righteous Sun, 말 4:2)가 떠올라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 했다.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신 것이다. 태양이 중천에 떠오르면 밤의 어둠을 밝히던 야등들은 빛을 잃어 버린다. 구약의 야등들은 신약의 태양,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더 이상 빛을 발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유산으로 그리고 성령님의 강림하심으로, 이 지상에 교회가 비로소 출현한 것이다. 교회가 신약의 산물이라고 할 때, 구약성서보다는 신약성서에 우선적인 권위를 두고 교회론(ecclesiology)을 정립해야 신학적인 오류를 피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성서를 통하지 않고 곧바로 구약성서를 해석하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적인 이단들이 발생하고 있다. 기독교는 기독(基督), 즉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이다. 그리스도는 구약성서에는 암시적으로 비유적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신약성서와 복음서들에는 이 땅에 성육신하신 그 분의 삶과 가르침이 생생하게 소개되고 있다.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Magisterial Reformers, 주류종교개혁가들, Mainstream
정말 가을이 왔습니다. 우리 앞에 어느새 성큼 다가와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과 마음까지 시원케 해주는 해맑은 바람이 우리의 고단했던 여름을 씻어줍니다. 어느새 자연도 사람도 모두 약속한 듯 옷을 갈아입고 우리를 맞이하고 손짓합니다. 가을은 영혼까지 넉넉하게 해주는 어머니의 가슴 같습니다. 가을은 말만 들어도 우리를 들뜨게 하고 부요케 해줍니다. 가르은 왠지 남자를 닮아서 크고 넓은 느낌을 줍니다.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니 영적 추수를 하는 농부가 되고 싶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절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노래하고 그의 이름 앞에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시인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들이 있다”고 했듯이 우리도 자신에게 물어보겠습니까?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우리는 얼마나 보람있는 땀을 흘렸는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얼마나 사랑하고 감사했는지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볼 때 얼마나 사랑스러운 자국을 남겼으며 행복했노라고 그래고 고맙다고 춤추며 찬양드릴 수 있겠습니까? 가을을 사랑하는 어느 시인이 “이 가을에는 따뜻한 눈물을 배우고 빈 가슴을 소유하며 풋풋하 그리움 하나 품게 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