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도는 약속이나 한 듯 함성을 내었다. “쉬~~이젠 허리 펴고 살겠습니다.” 언제는 죽어있었나? 그 답은 내가 보류하련다. 성도들의 표정은 밝아졌다. 전보다 더 열심히 봉사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나는 그들 앞에 “제발 더 열심히 하겠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엉뚱한 듯 한 당부를 했다. 지금까지 규정에 의한 예배 참여, 억압에 의한 헌금생활, 전통에 의한 경건생활 등 모든 그리스도인 생활의 패턴을 잠시 뒤로 하고 새로운 것을 따르도록 했다. “봉사하고 싶거든 하세요”하니까 어떤 성도는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어쩌야 되느냐고 묻기에 “봉사할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더니 “그런가요?” 응답하기에 “그런거요.”하고 나는 일러줬다. 율법과 복음의 이별을 모르는 교회는 애매한 교회이고 결국 고름이 피 되지 않기에 고름이 그냥 머물다가 온몸이 상하게 됐다. 나는 문제 해결을 “복음”제시로 했다. 해결은 간단했다. 좋은 예가 되지 않지만 우리나라 입장에서 북한을 보자. 북한이 왜 저렇게 큰소리치느냐. 원자핵을 보유했다는 것이라 하지 않나. 교회는 복음이란 원자핵을 보유해야 세상 앞에 당당할 것이다. 또 복음의 핵 없는 교역자는 힘을 못 쓰게 되
7살 1학년 때 한상철, 전원술, 이종철 등 5학년 형들을 따라 울릉도 저동 내수정 바위 사이에 우럭을 잡으러 따라 갔다. 형들은 그날 평균 15마리 정도 잡았는데 나는 외삼촌이 미끼를 끼우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했더니, 평생 처음으로 무려 28마리 우럭을 잡아 줄에 고기의 아가미를 끼워 끌고 집에 돌아왔다. 엄마 아빠가 매우 놀랐고 대우가 달라져서 그 후 일요일이면 우럭을 잡아와서 가족들의 좋은 반찬이 됐다. 중·고등학생시절 교회에 다니면서 누가복음 5장 1~11절의 성경말씀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베드로는 제자가 되기 전에 갈릴리 호수를 뒤지며 고기잡이 어부로 뼈대가 자란 훌륭한 어부였는데, 그날 밤은 고기를 잡지 못하고 그물을 터덕터덕 씻고 있는데 어찌 나사렛 산골 동리에서 온 예수에게 배를 빌려주고 대낮에 시킨 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에 가득 찬 고기를 두 배에 가득해 채웠던가? 목수 양반이 무엇을 안다고 고기잡이 전문가인 그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던가?”(눅5:5) 이 기적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목회를 할수록 어릴 때 우럭잡이 경험으로 차츰 깨달아졌고 실천하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베드로의 과거 경험, 지식, 어부로서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10) 오늘날 ‘원망’이라는 이 죄가 하나님 앞에 멸망당할 만큼 큰 죄가 된다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위의 내용은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내용으로써, 고라가 다단과 온과 더불어 당을 지어 이스라엘의 지휘관 250명과 함께 일어나 모세를 거슬렀던 사건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교회의 중직들을 통해서 힘을 받아 주의 일들을 해나가도 뭐할 판인데 도리어 중직자들 때문에 신경 쓰이고, 힘들어 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대학원을 준비하며 여느 때와 같이 교회에서 제 아내와 함께 성가대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 성가대는 목사님 설교 강대상 뒤에 위치해 있어서 늘 성도들과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제 아내와 저는 매주 성가대석 앞, 뒤로 앉아 몇 년 동안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오전11시 예배 때 성가대원들이 먼저 올라가 앉아 11시에 맞춰 오실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 눈에 갑자기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께서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라고 물었던 것처럼, 설교자는 비유 안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비유를 설교하는 설교자에게 하나의 비유가 그 콘텍스트 안에서 무엇을 말하기 위해 기록됐는지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현대 청중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기를 원하는지를 진지하게 찾아 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비유를 해석하기 위한 세 번째 관점은 비유 현장의 감동을 재현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예수님의 비유를 들었던 청중에게 어떤 감동이 있었는지, 당시 현장에는 어떤 정황이 연출됐을까를 유추해 볼 필요가 있다. 즉 당시 청중을 연상하며 감정이입을 시도하는 것이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 비유,’ ‘포도원농장 일꾼의 비유,’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등과 같이 대부분의 예수님의 비유는 반전 포인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원 청중의 감정적인 반응과 당시 그들에게 다가왔던 도전적인 교훈을 파악하는 것은 설교자에게 중요한 과제가 된다. 물론 이것이 언제나 수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때와 지금의 상황 사이에는 시간적 차이만큼이나 문화적
“심은 대로 거두는데서 봄에 심어야 가을에 거두듯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9:6) 아무래도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게 된다. 넓은 밭 혹은 넓은 등에다가 많이 심어야만 가을에 많이 거둘 수 있다. ‘수풀이 있어야 도깨비가 나온다’는 옛말이 옳다. 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다. 그런데 심지도 않고 거두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금 심으면 조금 거두는데도 불구하고 많이 거두려고 하는 사기꾼과 포학한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의 삼밭에 들어가서 밤사이에 삼을 전부 캐어서 도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나 다른 사람이 양육한 염소 모두를 도둑질해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40여년 한미전도대회에 통역해온 중에 미국 텍사스주의 아말리로에서 온 농부 성도는 비행기로 씨앗을 뿌리는데 가을의 밀 수확은 작은 산봉우리를 이룬다고 간증했다. 많이 나눠주면 많이 받고 오그라진 손은 줘도 받을 수가 없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는데 어떻게 여러 날 후에 도로 찾는가? 그것이 씨앗이 되어 많은 열매를 거둬 드리게 한다는 것이다. 많이 전도하고 많이 선교하는 교회도 역시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게
지난 부활주일은 더함교회가 5년째 맞는 부활 주일이었습니다. 여전히 전교인의 50%이상인 70대 이상 어르신들은 1:1로 메시지를 전해도 그 입으로 “예수님이 나의 주인 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란 소리는 쉽게 하는데 이상할 만큼 “예수님”만 말하면 딴 소리하는 현실입니다. 주입식 교육으로 따라하기 10번을 해야 앵무새처럼 영혼없이 1번 간신히 하실까 말까 합니다. 이것을 보면, 정말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 만으로도 굉장한 능력이 있음을 봅니다. 그럼에도 이번 부활절 예배시간에 스승님이신 박영철 교수님께서 개척 전 전수해주셨던 알찬 복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저희는 1년에 두 번은 주일 오전예배시간에 복음을 전하는데, 이 때 기존 교인들에게도 함께 전합니다. 교회 안에 교인 중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회심한 사람은 아직 20%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번 부활주일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늘 별로 관심없는 표정으로 들으시는 충청도 우리 어르신들에게 마지막에는 강경모드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제발 이제 오늘 내일 준비하셔야 할 어르신들, 앞집 할머니, 옆집 할아버지 돌아가셔도, 내 이야긴 아닐 것 같은 착각 버리셔요! 영원하지 않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경험했을 이야기다. 운전에 필수가 되어버린 네비게이션에 출발하기 전 도착할 장소를 입력하면 도착예정시간을 알려준다. 운전하다 잠시 휴게소에 들렸다 나오면 시간은 훌쩍 넘어가버려, 조급한 마음에 늘어난 도착 시간을 다시 줄이기 위해 속력을 내도 흘러간 시간을 줄이기란 쉽지 않다. 얼마 전 가까이에서 함께 목회하시던 분이 젊은 나이에 아직 가족에게나 주위 사람들에게 남겨진 일이 많이 있음에도 우리 곁을 떠나셨다. 진도에 내려와 만난 지 1여년의 시간에 건강하셨던 모습이 금방 무너져 버렸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했다. 시간을 조금만이라도 늘릴 수 있다면…. 분명 성도로서 천국을 소망하지만 아직 이 땅에 살면서 해야 할 일이 생각나 죽음 앞에서 시간을 조금만이라도 더 늘리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일평생을 주님께 헌신하며 살아도 돌아보면 부족한 것뿐이고 아쉬운 마음뿐이다. 늦게나마 깨닫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한 몸부림을 쳐도 주어진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끼며 시간을 늘리려고 애를 써본다. 그렇지만 무엇이 그리 바쁜지 시간을 늘리기가 쉽지 않다. 기도의 시간,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 맡
우리 신앙의 모든 기초는 하나님의 목적과 본성에 있으며, 주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한 줄만 남은 비파의 이야기가 있다. “왈츠”라는 사람의 “소망”에 대한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둥근 지붕 위에 어떤 젊은 여인이 외롭게 앉아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눈은 수건으로 싸 매여져 있다. 그래서 앞을 보지 못한다. 그 가슴에는 비파를 안고 있는데, 비파 줄은 다 끊어지고 오직 한 줄만 남아 있다. 뒤에는 희미한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앞이 안 보여도 비파 줄이 하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켤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소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또 여러 가지 줄이 끊어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하기도 하고, 믿었던 줄이 끊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소망의 줄만 있다면 능히 모든 것을 이기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두 사람이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히게 됐다. 이 두 사람은 같은 감방에 있으면서 철창을 붙들고 밖을 내다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은 언제나 하늘을 쳐다보며 시 창작에 몰두했다.
교회를 옮기는 일은 절대 쉽거나 간단한 일은 아니다. 자신이 속한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는데 따르는 상실감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직장이나 다른 일로 그 지역 교회를 멀리 떠날 때는 그나마 아쉬움이 깊다. 그러나 한 지역에 계속 살면서 교회를 옮긴다는 이야기는 그 상실감을 상쇄할 만큼의 실망, 상처, 갈등이 얼룩진 선택이기 마련이다. 상처받아서 떠나고, 또 그만큼 상처를 남기고, 상처를 준 후에 떠난다. 긴 싸움 끝에 마치 이혼을 선택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는 일은 가족을 바꾸는 일처럼, 가는 사람, 남는 사람, 모두에게 힘이 든다. 다른 교회에서 오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 교회는 사람들이 차가워요.” “그 목사님은 사랑이 없어요.” “말씀이 은혜가 안돼요.” “심방을 안 해요.” “장로님이 다 맘대로에요.” “신앙에 본이 될만한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새로운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요. 친구가 안돼요.” “찬송가를 안 해요. 찬양이 은혜가 안돼요.” “교인들이 너무 무례해요.” 그런데 바로 똑같은 그 이유 때문에 또 교회를 떠나간다. 믿음의 공동체에 자신은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올 때나 떠날 때나 들을 수
얼마 전 서울 명동의 유서 깊은 한 장로교회 청년부 특강을 갔다. 주제는 “기독교 세계관과 이성교제”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창조의 질서 안에서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 통로로 결혼을 예비하셨다. 하나님은 처음에 아담만 먼저 창조하셨으나 독처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서 여자를 만드시고 이끌어 오시니 아담에게 이러한 감정이 일어났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이것이 바로 연애상대를 만났을 때 도파민, 옥시토신, 노르에피네프린 같은 호르몬이 활성화되는 현상이다. 인간에게 이성교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짝을 만나서 “합하여 둘이 한 몸”(창 2:24)을 이루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정을 세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 1:28)는 사명에 순종하게 하신다.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가정과 가문을 세운다. 따라서 성경은 이성교제와 결혼이 구분된 것이 아니라 이어진 한 세트의 사건이며, 선택이 아니라 사명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세워진 가정은 그 자체가 하나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그 나라를
둘째, 독립적인 내용을 주목하는 것이다. 한 복음서의 저자가 다른 책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독특한 이야기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때, 설교자는 그 저자의 의도와 목적을 그의 저술 관점과 목적에 연관하여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례로, 선교 명령을 담고 있는 마태복음(10:5~6, 15:24)은 그 범위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이점은 마태의 주 독자들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선한사마리아인 비유’(눅 10:30~37)와 치유 받은 후 유일하게 사례한 ‘사마리아 나병환자’(눅 17:11~19) 이야기는 누가의 저술 의도와 그의 신학이 마태의 경우와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설교자는 복음서를 해석할 때 저자의 관점만이 아니라 예수의 관점을 동시에 고려하는 수직적 사고의 안목이 필요하다. 이는 어떤 특정 구절의 의미를 먼저(원래적 상황으로서) 예수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고 그 후 저자의 관점에서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상훈은 일례로, ‘포도원 일꾼’의 이야기를 제시한다. 수평적으로 볼 때 마태복음은 관련된 다른 기사들과 함께 마가복음을
20여년전 정상적인 양념 통닭을 먹는 것이 소원인 때가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통닭을 먹는 날은 피아노 학원 강사로 다니시던 어머니의 월급날이었는데, 쥐꼬리만한 월급에 매달 나가는 빚과 이자, 빼고 남는 돈은 몇 천원…. 그래서 유일하게 먹을 수 있던 치킨은 2,800원짜리(아직도 가격이 정확이 기억합니다.) 노점상 옛날 통닭이었습니다. 매번 어머니가 힘들게 사온 통닭이었는데, 저는 부끄럽게도 매번 친구들이 먹던 멕시칸 치킨을 찾으며 투정하며 거의 먹지 않았었습니다. 속상해 하던 어머니 얼굴이 생생합니다. 그랬던 저희 가계가 그나마 풀칠 안하고 먹고 살만 하게 된 10여년 전부터는 일 년에 10번 정도는 아무거나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어릴 때 꿈꾸는 그런 치킨을 거의 매주 먹고 있습니다. 옥천에서 함께 교제하는 목사님의 장모님 시누이가 우리교회 옆 동네 현리라는 마을에 계시는데 전도를 위해 계속 기도중입니다. 그 전도대상자 할머니가 구멍가게와 치킨집을 하고 계셔서 벌써 8마리째 치킨을 구매하고 있습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원리를 믿기에 치킨을 사며 도리어 순대 및 간식을 가지고 만나고 있습니다만, 이제 저에 대한 경계 태세는 다 무너졌습니
수난주간 중에 3월 26일 제35회 침례교 교도소 선교회 연차 총회가 교도선교회 회장인 천안 서머나교회 최만준 목사의 초청은 작년 서울 천호교회 이동춘 총무 목사 초청으로 더 많은 회원이 모였고 “죄인의 좋은 친구”모임이 됐다. 실무위원으로 천안교도소에 최만준 목사를 위시해 서울남부 이유진, 원주 곽도희, 제주 한태희, 안양 박수정, 대구 박윤하, 대전 임헌태, 영월 고병기, 공주치료 이승혁, 청주 이용규 목사 및 청송 엄현숙 사모로 11곳이며, 여의도교회 국명호 , 강남중앙교회 피영민, 영통영락 고흥식, 디딤돌 박문수, 광정 정희량, 새소망 박종철, 반석제일 한유기, 화평교회 조천업, 세종누림 이원열 및 예사랑 한명국 목사 등으로 후원교회 10명 회원들로 함께 모였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11:19, 눅7:34)로 오신 나사렛 목수 예수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잡수셨고”(마9:10~11)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소망은 인류가 갖는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이다. 성경에는 소망이라는 말이 많이 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소망’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위한 선물 언어이다. 소망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종교의 우열(優劣)은 그것이 제공하는 소망의 많고 적음과 낮음으로 정해진다. 성경에 소망이라는 문자가 많은 것은 확실히 그것이 가장 으뜸 되는 종교라는 증거의 하나이다. 목회자는 늘 이 소망을 품고 강단에 서고 소망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소망은 다음의 세 가지 일을 행한다. 첫째로, 소망은 우리에게 장차 큰 기쁨과 행복이 주어지리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둘째로, 소망은 우리에게 그 기쁨과 행복의 실상을 드러내 준다. 셋째로,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그것들을 기다리게 하며 그것들을 위하여 모든 고난을 견뎌 내게 해 준다. 유명한 강철왕인 ‘앤드류 카네기’는 세일즈맨으로 가정을 방문하면서 물건을 팔러 다녔다. 어느 날 한 노인 댁을 방문해 그 집에 들어섰을 때 카네기를 완전히 압도해버린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 집의 거실 벽에 걸린 그림이었다. 그림은 황량하고 쓸쓸한 해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적 존재성을 다루는 로고스 찬미가 첫 단락에서 그는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로고스(말씀)로서 하나님과의 특별한 연합의 관계를 가진 신성의 존재라는 것과 그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한 권위와 능력의 존재라는 것을 제시했다. 요한은 특히 그 로고스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빛이 된다는 것을 통해 그의 복음서 전체를 통해 제시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유일한 실행자라는 것을 부각시켰다. 요한은 ‘생명’이란 단어를 하나님의 존재(요 5:26)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요 5:26; 11:25; 14:26)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목적을 나타내며(요 3:16; 8:12; 10:10; 17:3) 또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사용했다(요 20:31).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이 있으며(요 5:26),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며(요 10:10), 또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요 20:31). 요한은 이런 맥락에서 성육신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