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은 대부분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삼위일체를 공격하는 최종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론을 펴서 기독교의 핵심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으로 처음부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입증하는 말씀을 무기로 삼아 적의 급소를 공격해야 한다. 그들은 비진리를 무기로 삼는데 그것은 진리 앞에서 무력한 것이다. 진리의 말씀이라는 검으로 적의 급소를 정확하게 찔러 치명상을 입혀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진리의 검은 아주 강하면서도 아주 날카로워야 하고 무엇보다도 날렵해야 한다.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로 싸울 때 어떻게 하였는가를 통해서 우리는 영적 전투의 전술을 배울 필요가 있다(삼상 17:38~40). 다윗이 사울에게 불려 갔을 때 사울은 자기의 갑옷과 무기로 그를 무장시켜 보내려 하였다. 하지만 다윗이 그것들을 착용해 보니 자신을 너무 둔하게 하고 거추장스럽게 하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평소에 맹수들과 싸울 때 사용하던 무릿매와 (본딧말은 물매가 아니라 “무릿매”이다) 목자의 막대기(maqqel)만을 들고 평소의 복장으로 골리앗에게 나아갔다. 전투에서는 힘과 기동력이 제일 중요한데 무릿매는 다윗
탁월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히포(Hippo)의 감독으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바로 「고백록」(The Confessiones)을 집필했다(A. D. 397-401년). 그가 죽고 난 이후에도 「고백록」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읽히는 불후의 명저다. 고백록은 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많이, 널리 읽혀진 책으로서 철학자들, 문학가들, 심리학자들, 신학자들, 평신도들, 심지어는 비기독교인들 까지도 애독하는 책이기도 하다. 특별히 하나님을 떠나서는 진정한 안식이 존재할 수 없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인 그의 신앙 표현은 오랫동안 빛나고도 남을 흔적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신앙인의 진심어린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당대의 주요한 철학들을 통해 걸어온 자신의 지적이고 영적인 여정을 고백적인 문체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이 치열하게 전개했던 육체와의 투쟁으로부터 자신에게 참된 자유를 주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그의 깨달음을 기록하고 있다. 고백록에는 한 권의 책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고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 키케로(Cicero)가 쓴 「호르텐시우스
이러한 학자들은 갈라디아서의 전반부보다는 후반부를, 그리고 이신칭의보다는 성령론을 더 강조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신칭의’가 갈라디아서의 구원의전체가 아니라 시작이고 오히려 구원의 중심적인 부분은 성령의 사역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몸’(교회)으로 세워져서 완성되어지는 부분에 있다고 본다. 갈라디아서는 전반부보다는 후반부를 그리고 ‘이신칭의’보다는 성령론을 더 강조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2장의 이신칭의보다도 3장부터 6장에 이르는 성령으로 진리에 순종해 의의 소망을 이루는 삶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사역’은 구원론과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은 신론, 기독론, 성령론 모두 강조점을 두고 이해해야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전통주의나 새 관점의 단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 대안으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성부 하나님의 뜻(작정)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종말론적인 틀에서 살펴보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심이라는 관점에서 약속의 성취와 교회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관점에서 거듭남과 성화와 영화의 과정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구원 사역을
설교에 대해서 직 간접적으로 여러 번 글을 올린 바 있으나 설교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시시각각 반성과 교정의 필요성을 느낀다. 설교의 ‘말씀 說’ 자는 ‘말씀 言’ 변에 兄이 모자를 쓰고 서 있는 모양을 더한 글자이다. 옥편은 이 글자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단순히 사람이 서서 가르치는 모양이라고 하지만, ‘형제 兄’ 자 위에 놓인 모자를 모양대로 ‘여덟 팔’ 자로 풀이하면 설교는 형님 여덟 명 앞에서 말한다는 의미가 된다. 형님이 말을 하든지 형님 여덟 명 앞에서 말씀을 하든지 간에, 설교자는 청중(신자와 시청자)을 형님이라고 생각하고 말과 태도를 정중히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가르칠 敎’는 회초리 네 개와 ‘아들 子’와 ‘글월 文’ 자로 구성된 글자이다. 자녀교육은 학문과 삶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므로 엄해야 하며 필요 시 매를 들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설교학(homiletics)은 ‘따라 말한다’는 의미의 homily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서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을 dictate, 즉 받아 적어서 백성에게 예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모든 매스컴마다 동성애와 동성혼에 대해서 뜨겁게 소리를 높이고 있다. 인권과 자유라는 미명으로 들어온 성소수자 권리에 전세계가 움직이는 듯하다. 그러나 성경의 소리는 분명 아니다. 비단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세상 곳곳에 성경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할 뿐 아니라, 성경을 거짓의 이야기로 만드는 일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스스로 기독교 천문학자라고 주장하는 우 모 교수는 “창조가 약 1만년 전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젊은 지구론자들이 있다”며 “창세기와 성경을 글자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분명 교회에 타협 이론으로 성경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다. 미국 생활에서 잊을 수 없었던 경험 가운데 하나는 두 번의 그랜드캐년을 중심으로 창조과학탐사를 한 것이다. 광활한 계곡 속에서 창조의 현장과 노아 홍수 사건으로 인해 생겨난 장면을 발로 밟으며 눈으로 확인하는 시간은 성경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며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미주 창조과학선교회 안내로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는 동안 선교회 회장인 이재만 선교사의 강의를 듣게 된다. 참석하는 대부분 사람들이 지금까지 학교에서 세뇌교육처럼 들어온 과학
“꿈을 품어라. 꿈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생명력도 없는 인형과 같다.”(그라시안)는 말이 있듯이 꿈을 꾼다는 것은 중요하다. 꿈은 삶의 의미요 삶의 목적이요 힘든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삶의 추진력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꿈을 꾸며 살아야한다. 어릴 때는 어린아이의 꿈을, 청소년 때는 청소년의 꿈을, 성인이 되어서는 성인의 꿈을 꾸며 살아야하고, 노년이 되어서도 꿈을 꾸며 살아야한다. 꿈을 꾸는 사람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닥치는 어려움도 극복하고 낙심하지 않고 노력하기 때문에 발전하게 되고 삶도 행복하게 된다. 그러나 꿈도 없고 되는대로 사는 사람은 어려움이 닥치면 낙심하고 발전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윌슨은 “비록 현실이 어렵고 고통스러울 지라도 꿈을 간직하고 꿈이 실현될 것을 굳게 믿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꿈을 꽃피울 봄날이 올 것이다”고했다. 현실적으로 어렵고 당장 이뤄 지지 않기 때문에 꿈을 안고 사는 것이다. 꿈을 꾸는 사람들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간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쪽 다리에 장애가 있어서 목발을 짚고 다니며 자주 교회에 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할아버지께 물어 봤다. 무료급식소에서
따라서 성경만큼 보편적이고 영원한 책은 없다. 성경의 진리는 기록된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살아서 역사한다. 아울러 성경은 삶의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광범위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써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며, 영원한 진리이며, 인류 구원의 유일한 지침이며, 인간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생명의 양식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성령님의 감동하심 가운데 성경을 기록했고, 그 기록된 것을 받은 독자들이 기록된 성경을 읽을 때에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엡 3:1-4). 성경은 읽혀져야 하고, 그 뜻이 깨달아져야 하며, 그 교훈이 개인과 교회에 의해서 실천돼야 한다. 그것은 성경만큼 뛰어난 힘과 영향력, 그리고 감화를 주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일을 하거나 또는 중요한 일에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특히 독서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더 확실하게 목적을 되새기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냐하면 목적의식을 갖고 독서하는 목회자와 목적의식 없이 독서하는 목회자는 관심이나 흥미, 책임감이나 집중력 그리고 이해하는 관점에서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는 일단 양적으로 몇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중심성이 구원의 역사, 하나님의 약속들의 성취와 밀접하게 연결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슈나이더는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조직신학 및 후대의 삼위일체신학으로 빠져드는 것이라는 반대가 있을 수 있으나 오히려 신약성경 자체를 귀납적으로 연구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신약신학의 토대이자 중심이라는 것이 드러난다고 한다. 슈라이너는 신약신학이 하나님께 집중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신학이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역은 구원역사의 시간표를 따라 진행한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약속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성취됐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되는 토대임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들을 성취하기 시작하셨다는 중요한 표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구약을 통합해 이해하는 구약학자 브레바드 차일즈(Brevard S. Childs)는 「구약과 신약의 성경신학」에서 구약과 신약 사이의 연속 또는 불연속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어떤 접근도 거부한다고 하면서 신구약을 통합하여 이해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갈 때 이드로(르우엘)의 아들이자 자신의 처남인 호밥에게 그들과 동행해서 길을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모세가…르우엘[이드로]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 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그리하면 선대하리라.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민10:29~32). 그런데 성경에는 모세의 장인 르우엘을 호밥이라고 기록한 곳이 있다(삿4:11). 그것은 아마 호밥이 그의 아버지 르우엘의 대리인과 같은 신분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호밥은 이드로의 아들이자 모세의 처남이다. 아름다운 관계 호밥은 모세의 청을 듣고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후에 마음을 바꾸어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면서 위험한 광야생활의 길잡이가 되어줬고 가나안 복지까지 함께 들어갔다. 성경은 호밥이 속한 겐 족속이 아랏 남쪽 유다 광야에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해서 사울 왕과 다윗 왕이 통치할 때까지도 그 지역에 살았다고 말한다: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의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주하니라”(삿1:16).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드렸던 기도문입니다. 유일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기도문이기에 진귀한 자료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중요한 내용을 기도하셨지만 기도의 핵심은 “하나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연합의 중요성을 기도를 통해 알려주셨으니 너무도 감사합니다. 주님의 관심은 믿는 성도들이 하나로 연합하는데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 당시보다도 지금 우리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기도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하나되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같은 교회 성도들끼리 하나되지 못하고 다투고 한 교단 안에서 분열된 모습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교단과 교단 사이의 벽은 교도소 담벼락만큼이나 높고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백안시하고 교제가 전혀 없는게 한국교회의 처한 현실입니다. 툭하면 분열하고 서로 대립하는 광경을 보고 세간의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까? 주님께서 간절히 드리셨던 기도는 우리가 하나되게 해달라는 것인데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은 역행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되기를 기도하고 열심히 설교하지만 정작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권위와 리더십이 상
오늘도 심방을 다녀보니 여기저기 넘어진 이들이 있다. 미끄러운 빙판길의 겨울도 아닌데, 마음의 겨울을 보내는 이들이 이 작렬하는 여름에도 있더라. 그래서 목회자는 오늘도 위로와 격려와 기도로 그들을 찾아 일으킨다. 물론 스스로 훌훌 털고 일어나는 이도 있어 감사는 하다만, 우리 삶에 이런 넘어질 일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목회도 그렇다. 사실 세상에 단 한 번도 넘어져보지 않은 목회자가 어디 있으랴. 넘어졌었지만 다시 일어났으니 오늘을 살지. 그러니 혹 이런저런 이유로 넘어진 이가 계시다면 다시 일어서시기를 바란다. 모름지기 목회자는 넘어질 땐 누구에 의해 넘어져도, 일어날 땐 스스로일 수밖에 없음을 일찍부터 깨달아 온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가? 첫째, 은혜를 다시 기억하고 회복할 때이다(단 10:19). 그렇게 믿음 좋았던 다니엘도 한 때는 힘도 없어지고 호흡마저 남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천사가 들려준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란 그 말 한마디에 다시 일어섰다. 그만큼 은혜 채우는 일은 중요하다. 어쩌면 목회자의 넘어짐도 은혜가 마르고, 은혜를 잊어서일 수 있다. 이럴 땐 은혜부터 회복하고 채우는 게 급선무다. 더더욱
웨슬리에게는 매일이 의미 있는 날이었으며 매순간이 “하나님의 순간”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매일을 기도와 성서연구와 경건을 위한 영적 훈련으로 보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은밀하게 준비된 일꾼 중에 자기의 백성들이 자기를 잊어버린 동안 하나님의 광야학교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낸 모세가 바로 그렇게 쓰인 일꾼이었고, 다윗과 침례 요한과 바울이 또한 그러하였다. 그리고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가 또한 그렇게 쓰인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든지 이렇게 일꾼들을 들어 쓰셨다. 웨슬리는 영국에서 신앙부흥운동을 시작해 현재의 감리교회 토대를 이룬 창시자이다. 영국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는 책이 가진 힘과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웨슬리 자신이 많은 글을 쓴 작가였으며, 수많은 책을 저술한 저자이기도 했다. 또한 웨슬리 자신도 열성적인 독서가였다. 22세에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후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는 ‘홀리클럽(Holy club)’을 이끌었는데, 이 모임은 웨슬리의 지도로 경건한 삶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한 목적을
지금까지의 기독교 구원론을 살펴보면 전통적인 관점이나 새 관점 모두 ‘기독론’ 중심으로만 구원론을 이해해 ‘신론’과 ‘성령론’의 관점에서 구원론은 등한시돼 왔다. 성경은 성부 하나님의 작정(뜻)과 성자 하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한 중보자 되심과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이 구원사역에 있어 균형 있게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성자 하나님의 사역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기독론만 강조하고 발전시켜 왔다. 물론 ‘기독론’은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중세 가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죄 없는 하나님의 어머니’까지 높여 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최근에 ‘신론’ 중심(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 구원론을 보완하려는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다. 특히 침례신학대학교 장동수의 최근 논문 ‘신약성서와 하나님’은 신약학회에서 발표한 이후에 신약학회에 많은 도전을 주고 있다. 그는 신약 신학 및 기독교 신학의 일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강조되지 못한 원인을 밝히고 신약 신학을 연구하고 교수함에 있어서 최대 최고 주인공이신 하나님에 대한 강조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중심신학으로 구약과 신약신학을 통합하는 성경신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신약성경이 기독론 중심으
현대인은 매사를 지루하게 생각한다. 해마다 새로운 모델의 스마트폰이 출시되고 첨단기술을 탑재한 승용차와 가전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생각해보면 새로운 서비스와 편리함을 제공하기보다는 사용자들의 권태를 달래기 위함인 것 같다. 우리의 일상생활, 뉴스도 지루하고 정치도 지루하고 사드도 지루하고 김정은도 트럼프도 모두 지루하다. 지나간 천여 년 동안 기독교 문명이 찬란하게 꽃피었던 서유럽에서는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서 현상 유지조차 어려워져 두 세 교회를 하나로 통합 하고, 그래도 안 되어서 아예 문을 닫고 매각해버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 교회가 헐리고 그 자리에 모스크가 세워진 동영상을 시청하는 우리의 심정은 착잡하다 못해 비참하기까지 하다. 신자들이 왜 교회를 떠날까? 믿음이 없어서일까?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교회가 천여 년 동안 답습해 온 성서일과(聖書日課)에 의존한 감동 없는 예배와 복음이 빠진 설교가 신자들을 권태롭게 만든 것이 더 큰 원인일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 가운데서도 북미주와 특히 한국 교회에서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는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그러나 최근에 보고된 한 교회사학자의 연구 결과를 보면 한국교회에서도 근래에는 복음과
미국은 지역적 특징, 특산품, 주민들의 종교적 성향에 따라 주 경계를 초월해서 ‘벨트’라는 이름으로 지역을 구분한다. 이런 벨트에는, 눈이 많이 내리고 기온이 낮은 북동부 지역과 오대호 부근을 ‘스노 벨트,’ 기온이 온화하고 언제나 태양광이 풍부한 북위 37도 이남의 캘리포니아 주부터 뉴멕시코 주까지를 ‘선 벨트,’ 곡물 생산이 많은 지역을 ‘그레인 벨트,’ ‘콘 벨트,’ 또는 ‘바나나 벨트,’라고 부르며, 뇌졸중 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미국 남동부의 앨러바마, 켄터키, 아칸소, 조지아 주 지역은 ‘스트로크(Stroke) 벨트라고 하며,’ 보수적 성향의 기독교 세력이 강한 동남부 지역은 ‘바이블 벨트’라고 한다. 미국의 45대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러스트 벨트’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러스트’는 금속이 부식될 때 생기는 ‘녹’을 말한다. 어떤 지역이 ‘녹 벨트’가 되었을까? 러스트 벨트는 오하이오, 위스콘신, 아이오와, 미시간, 인디애나, 펜실베이니아 주와 뉴욕 등 미국 중서부 일부와 북동부의 공업지대를 말한다. 이 지역은 일찍이 찰강 산업이 발달해서 피츠버그 시는 1800년부터 철강과 알루미늄을 생산하고, 1875년에는 철강 왕 앤드류 카네기가 제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