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거의 매일 10년을 산에 다니면서 기도했었다는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그 당시에 평신도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기도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지금 그때를 회상만 할 뿐 기도와 전혀 무관한 사람이 되어 있다. 심지어는 현재 새벽 예배조차도 안 드리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영적 생명은 꾸준히 계속 자라가야 하는데 어느 한 정점에 도달하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내리막길을 향해서 내려가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많이 보게 된다. 헌신과 봉사, 주를 향한 열정과 열심히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도 식어 버리고, 영적 사람이 육의 사람이 되어 세속적인 사람으로 전락하여 버린 사람들이 나의 주변에 너무 많은 것 같다, “신앙은 삶이다” “기도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하나님의 영역이다”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종”이라는 단어며,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구절은 데살로니가후서 5장 10절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찬송가 가사 중에서 제일 마음에 와닿는 가사는 540장 3절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찌 아니 기쁠까 주의 얼굴을 항상 뵈오니 더욱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나눴다. 그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만을 구한다고 되느냐고 질문한다. 우리는 시편 63편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지난번에 다윗의 시편인 시편 27:4을 토대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그 전체적인 윤곽을 살펴봤다. 시편 63편은 다윗에 유대 광야에 있을 때, 즉 그가 압살롬에 쫓겨 광야로 도망하던 때에 지은 시이다. 다윗은 그 당시에 압살롬에게 쫓겨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많은 그의 가족들을 예루살렘에 남겨둔 채 사막으로 도망와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압살롬이 많은 군대를 이끌고 그에게 들이닥친다면 그는 살아날 길이 없는 상황이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그의 가족들에 대한 안위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압살롬은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많은 그의 후궁들을 성적으로 겁탈했다. 그 나라의 안정과 미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만약 당신이 다윗이 처했던 상황에 처했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무엇을 간절히 구했겠는가? 이런 상황에 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와달라고 목이 터지라고 외친
가난했던 신학생 시절, 다른 목사님처럼 나도 생활비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남편이었다. 아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려왔을 때 뛸 듯이 기뻤으나 돈이 없다는 핑계로 임신 및 출산에 관한 책들을 읽고 집에서 아기를 낳을 생각을 했다. 출산하는 날, 이러한 행동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를 금방 깨달았다. 아내도 죽을 것 같았고, 태어날 아이도 죽을 것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택시를 타고 산부인과로 달렸다. 피 흘리며 기진맥진한 아내를 껴안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나의 무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아내와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내가 잘못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간호사가 내 품에 아기를 안겨주며 말했다. “축하해요. 예쁜 딸입니다. 산모도 건강하고, 아기도 건강합니다.” 아기의 눈동자를 마주칠 때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들을 맞이할 때도 이런 기쁨이 있었으리라. 아기를 안고 무릎 꿇어 생명을 지으신 위대한 창조주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딸은 나의 무식함을 용서하며 티 없이 맑은 천사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이런 딸이 성장해 멋
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Ninety-three”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프랑스는 큰 혼란에 빠졌고 모든 백성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 때에 어느 부대 하나가 이동하면서 군인들이 숲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가다가 기아에 지친 아주머니가 세 아이를 데리고 길가에 쓰러져있는 것을 봤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서 아이들이 쓰러져 있는 그런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긴 나머지 상사 한 사람이 빵 한 덩이를 던져 줬다. 어머니는 지체없이 이 빵을 세 조각으로 나눠서 세 아이에게 주었다. 아이들은 정신없이 받아먹으며 그렇게 기뻐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던 젊은 병사가 물었다. “저 여자는 배고프지 않은 모양이죠?” 상사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게 아니야. 어머니이기 때문이야”라고 했다. 이것이 어머니이다. 자기는 굶으면서도 자식에게는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어머니이다. C.S. 루이스 교수는 아주 명쾌하게 우리의 사람된 모습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에로스에 의해서 태어나고 스토르게에 의해서 양육되고 필로스에 의하여 성숙하고 아가페의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했다. 우리는 다같이 ‘사랑’이라고 같은 말을 쓰고 있다.
다윗이 통일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이 ‘예루살렘 정복’이다. 한 번도 정복한 적이 없는 여부스 사람들의 땅, 아브라함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약속 성취를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다윗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은 이후 최초로 예루살렘을 정복한다. 천 년 만에 언약이 성취된 것이다. 사실 세월이 지나면서 마치 하나님이 언약을 잊으셨거나 취소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언약 성취의 언저리만 맴돌던 이스라엘이 드디어 천 년의 언약이 서려 있는 이 ‘언약의 땅’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하나님의 은혜다. 그래서일까? 다윗이 예루살렘 정복 이후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하나님의 법궤였고,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에 모신다. 그리고 너무 감사해서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춤추는 예배자가 되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며 ‘제국의 아침’을 맞이한다. 하나님은 그 다윗에게 언약을 통해 마음껏 복을 부어주신다. 영원히 지속될 복, 이름하여 ‘다윗 언약’이다. 본문은 사무엘하의 하이라이트, 다윗 왕의 진정한 대관식과 같은 말씀이다. 로빈슨(Haddon Robinson)은 사무엘하 7장을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장”이라 했고,
우리 교회 이름은 예사랑교회(한명국 목사)이다. 구성원은 조선족으로 평일에는 모두 직장에서 일을 한다. 그 중 사무원도 있으나 대부분은 육체노동 종사자들이다. 새벽기도가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 단체 카카오톡을 운영하며 긴밀하게 기도하고 있다. 모두가 아멘으로 화답해준다. 생각만 해도 생각하기 싫은 코로나19의 시작 때, “어둔 밤 시작되리니”라는 찬송을 부르며 옛 선지자들의 고통을 생각했다.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가고 3개월이 가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으며 정상적인 예배를 드리기 어려워지자 한 성도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 예배를 드릴 수 없어 내 마음이 심히 우울하네요.” 그러자 그 성도 입에서는 이런 말을 기대했었다. “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어서 우리가 정상적 예배를 드려야지요.” “코로나가 풀려야지요.”라는 대답에,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때가 때이니 만큼 모든 것이 움츠려 있을 때, 먼저 그들에게 일어설 수 있는 뜨거운 열정이 생겨야 하는데, 쉬운 것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훌륭하고 좋은 간증을 듣고 한 주간 동안 퀴즈 문제로 내어 시상금을 주기로 했다. 10만원, 5만원, 3만원, 1만원으로 시상을 매주하니,
약한 자와 악한 자 누구를 들어 쓰실까? 마음이 악한 자는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면 사도 바울처럼 갑자기 강하게 역사하셔서 저를 꺾어서라도 하나님이 쓰신다. 그런데 몸이 약한 자는 하나님도 어찌하시지 못한다. 이미 탈진해 기진맥진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또 다른 계시나 소명을 주시지 않으셨다. 그저 천사를 통해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주셨다. 그리고 자게 하셨다. 즉 먹고 자고 먹고 자고를 반복하게 하셨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왕상 19:7) 나는 이 말씀에서 무한한 은혜와 감동을 느낀다. 하나님은 쉬지 못하는 당신의 종들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실 것이다.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남은 목회, 해야 할 사역, 영광 돌려야 할 사역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데 지쳐 쓰러진다면 누가 가장 마음 아파하시겠는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처럼 목회는 마라톤이다. 절대 단거리 선수처럼 달리다 보면 머지않아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고 만다. 한국교회 개신교 역사 14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코로나 시국에서 목회자의 탈진은 어쩌면 너무나 분명히 예견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순교할 상황도 아니고 그
반석군인교회는 중부전선 최전방 철원에 소재한 육군 보병 대대교회입니다. 2017년 교회진흥원(요단출판사)을 사임했는데, 마침 군선교 정년퇴직을 하시는 황인정 목사님의 후임으로 군선교사가 됐고 군복음화 후원회 이상로 목사님과 포도나무교회 여주봉 목사님께서 이끌어주셔서 ‘새물결선교회 청년선교’의 파송을 받았습니다. 우리 부대의 애칭은 초산진격대대로 6.25전쟁 당시 선두로 북진해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고 물을 수통에 담은 무공의 역사를 자랑합니다. 코로나 상황 이전에는 용사 평균 125명, 간부 및 가족 15명, 어린이 6명이 주일 예배에 출석했습니다. 아울러 수요 군종병 교육과 토요 성경공부에도 평균 8명 정도가 참석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부대출입이 막히면서 온라인으로 전환되자 평균 30명 정도가 참여하고, 전역으로 인해 점점 줄어 15명 정도가 비대면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정이 어렵지만 스마트폰을 활용한 온라인 소통과 교육(기초성경공부 등 영상시청)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지난해 12월 대면예배가 열렸을 때 용사 11명, 간부 2명으로 급감했습니다. 교회부흥과 예배회복을 위해 군종찬양팀을 정비하고 성탄 및 송구영신 예배, 새해 기도제목 나누기, 올해 말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오늘날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덩샤오핑은 1962년 경제 우선주의를 표방하며, 흑묘백묘론(黑描白苗論)을 주장했습니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게 제일이라며, 불합리한 평등보다 합리적인 불평등을 우선시하는 선부론과 함께 획기적인 경제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집단농장의 사영화를 통해 주인의식을 고취해, 중장기적 영농방법이나 종묘의 개량없이도, 그해의 생산성을 4배 이상 획기적으로 높였습니다. 뎡샤오핑의 경제 우선주의는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으로 3000만 명이 굶어 죽는 대재앙이 터지자, 농업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기획됐습니다. 뎡샤오핑은 가난으로 인민을 굶어 죽게 만드는 사회주의 노선은 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민이 잘살 수 있는 농업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이윤 동기를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주장을 펴, 훗날 문화대혁명 때 주자파(走資派)로 몰리는 빌미가 되어, 수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정치력으로 4인방을 비롯한 정치 우선주의자들의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에 성
저는 늘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 따라 항상 기도하는 소녀, 받은바 재능으로 항상 하나님을 기뻐 섬기는 소녀 등으로 불리며 부모님과 집사님들의 칭찬 속에 성장했습니다. 이런 저를 하나님이 기뻐하셨는지 방언과 신유의 은사와 영적인 리더십까지 주셔서 저의 교회 활동은 언제나 활발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만약 제가 목회를 하면 당연히, 그것도 아주 잘 할 줄 알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를 외치며 교회를 개척한 지 만 1년이 지나자 교인수가 100명이 넘었습니다. 제가 받은 은사들을 교인들과 경험하며 열심을 다해 기도와 심방으로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고자 분주히 오가던 나날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 열심을 인정하시고 더 많은 축복을 부어주시리라는 확신과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어느 날 문득 저는 제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됐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행복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행복하기는커녕 우울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더 큰 충격은 저와 남편과의 목회 방향이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오직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거룩함으로 이끌고자 했던 남편의 사역 방향과 무엇보다도 은사 중심을 앞세우던 저는 갈등할 수밖에
나는 목회학을 공부하지 않은 어머니에게 먼저 목회를 배웠다. 어머니는 세 가지를 주문했다. “첫째, 설교할 때는 가끔 웃겨라. 둘째, 심방 가서는 잘 먹어라. 셋째, 상담할 때는 잘 들어줘라.” 이어서 말씀하셨다. “건강해라. 건강은 목회의 생명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어머니는 최고의 목회학 교수였다. 27년 전, 몸이 아파서 남태평양 피지섬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왔다. 그때 아내와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목회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목회는 설교, 심방, 상담, 교육….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는 목사의 삶이다. 목사의 삶에 예수가 보여야 한다. 그래야 설교할 때도 예수가 보이고, 상담할 때도 예수가 보이고, 함께 밥 먹을 때도 예수가 보인다. 예수가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이요 목회다. 신학교 다닐 때 목회학 교수님이 질문했다. “자네의 인생 목표가 무엇인가?” 소명감에 대한 열정은 펄펄 끓고 있었지만, 목표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아서 잠시 생각하다가 구체적이지 못하고 추상적인 목표를 세 가지 말씀을 드렸다.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목회자가 탈진하는 이유에 관해 존 샌포드는 목회자의 일이 끝이 없다는 것, 출퇴근이 없는 직업이며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 불가하며 하던 일을 무한 반복해야 하는 직이라는 것을 예로 들었다. 다섯째로 목회자는 교인들이 기대하는 일들을 끊임없이 다뤄야 한다. 월요일만 되면 핸드폰을 아예 꺼두는 목회자들이 있다. 그날만큼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 중에는 그런 목회자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월요일에 목회자가 필요한 날이 있는데 너무 목사님이 자신만 생각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니까 목회자는 거의 119대원과도 같은 것이다. 여섯째로 목회자는 매년 동일한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어딜 가나 골치 아픈 사람, 까다로운 사람, 교만한 사람 등이 있게 마련이다. 목회자는 이들을 피하거나 골라 가르칠 수 없다. 다 받아줘야 한다. 그래서 토요일 저녁만 되면 불면증에 시달리는 목회자도 있다. 다음 날 그 사람을 다시 봐야 하기 때문이다. 표정관리가 잘 될까 고민이 많아진다. 일곱째로 목회자는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일하기 때문에 특히 에너지 소모가 많다. 요즘 유행하는 단어 중 “감정노동”이라는 말이 있다. 목회자야말로 감정노동에 시달리
신실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2020년 7월에 전입해 지금까지 약 1년 8개월 동안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군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15보병사단은 대한민국 중부전선의 전방을 담당하며 제가 사역하고 있는 여단은 최전방 지역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용진교회와 임마누엘동도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제게 맡겨진 장병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찾아가 따뜻한 격려와 기도를 하며 성실히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군 선교활동 중 “전방부대 군종활동”을 담아내고자 합니다. 교회사역 매주 제가 담임하고 있는 2개교회와 소초교회에서 기독 장병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단본부뿐만 아니라 산정산에 있는 부대와 최전방에 있는 부대까지 찾아가는 예배를 통해 군 장병들과 함께 예배의 감격과 기쁨을 나누고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곳곳에 예배를 사모하는 청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거리가 멀어 교회로 나오지 못하는 장병들을 위해 제가 직접 소초를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이마저도
2016년 1월 20일, 그 해 겨울 중 시리고도 추웠던 그 날, 뇌종양으로 투병하던 남편 박정재 목사를 주님께 먼저 돌려보내야만 했다. 그의 나이 마흔이 되던 해였다. 눈물도 나지 않던 장례식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경험해야 했던 어려움은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집에 먹거리가 마땅치 않아 어린 자녀들과 함께 식당으로 나섰던 그 날의 감정과 그 날의 밤거리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운전대를 잡았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고 누군가에게 컨펌을 받아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늘 남편의 의견을 묻고 그의 결정에 맞췄던 나는 밥 먹을 식당 하나 결정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남편 없는 삶을 시작하는 나에게 닥쳤던 첫 번째 어려움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어린 자녀들과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에 대한 염려보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 부터 남편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그렇게 시린 겨울을 보내고 있을 때, 교회 성도님들과 알지 못하는 분들을 통해 하나님은 나와 우리 자녀들을 위로하시고 먹이시고 입혀 주셨다. 어찌나 그 사랑이 크던지 ‘하나님! 도대체 저에게 왜 이렇게 까지 해 주세요?’라고 할 정도로 넘치도록 큰 사랑을 부어 주셨다. 특별히 ‘요
물론 지금도 토레이의 번역된 저서들은 한국교회 내에서 중생과 성령침례 사이를 구분하는 개혁파 성령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는 무디와 동역하면서, 그리고 무디신학교의 교장으로서 수많은 교계지도자들과 선교사들에게 명확한 체험으로써의 성령침례를 강조했다. 19세기 개혁파 성령운동의 여러 경향 중에서 그의 성령침례론의 핵심은 “봉사의 능력”이었다. 토레이는 성령으로 인해 거듭나는 일과 성령으로 침례 받는 일은 전혀 다르다고 봤다. 우리 마음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을 지니는 것과 성령께 완전히 붙들려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에 있어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생명이 부여되어 구원받게 되는 것이지만, 성령침례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토레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위해 복음전도 등 어떤 봉사를 하고자 할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마련이라고 하면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침례를 받으면 다 권능을 얻게 되는데, 그 권능은 곧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얻은 일을 감당하기 위한 권능이라고 했다. 토레이의 성령침례론은 기사와 이적 중심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