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며 살자/감사하며 살자/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인생/감사하기에도 모자란 인생인데 /사랑하며 살자 감사하며 살자/아낌없는 마음으로 룻기의 주인공은 단연 룻입니다. 그러나 빛나는 주연을 살려주는 조연이 있듯이 보아스는 룻기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물입니다. 보아스가 없는 룻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아스야말로 룻이 거듭나도록 도와준 일등공신이자 평생의 반려자됐습니다. 보아스란 이름은 ‘능한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룻기 2:1에는 보아스를 “유력한 자”라고 소개합니다. 보아스는 모두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와 룻의 운명적인 만남은 성경을 통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룻2:5~11). 여기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이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칭찬하고 진심으로 축복했습니다(룻3:10). 나오미도 룻에게 확신을 심어줬습니다. 보아스는 당장에 룻을 아내로 삼고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앞선 가까운 친족이 있기에 질서를 지키며 기다립니다(룻3:12~13). 하나님의 일은 열심도 중요하지만 질서 또한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은사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라고 강조했습니다(고전14:33, 40). 교회에서 유념해야 할 부분입니
교육기관과 자선단체는 성격상 기부금이 운영자금의 큰 몫을 차지한다. 우리 국민은 유치원 학생부터 대통령까지, 그리고 넝마주이부터 대기업 총수에 이르기까지 등록금과 각종 세금을 통해 국가가 부여하는 재정적 의무를 다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는 국가재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서 “모금”이란 이름으로 또 다시 국민에게 손 벌리지 않아야 마땅하다 하겠다. 최근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안가(安家)에서 기업 총수들을 독대한 자리에서 모 스포츠재단 설립을 위해 기부금을 종용한 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 문제에 대하여 비판여론이 비등하자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에 쓰려고 모금한 것이며 개인적으로는 한 푼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잘못이 없다고 해명했다. 상식을 가진 국민들은 여기서 숨이 막힌다. 첫째로, 대통령이 국가에 필요한 사업을 추진하려면 예산을 세워서 추진해야 하며, 부득의 모금을 해야 할 경우에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공개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지 좋은 일에 필요하다고 해서 사사로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둘째로, 권력자가 기업인을 독대해서 기부를 요청하는 것은 강요와 다름없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최고 권력자의 요청을 거부하거나 밉보인 명성,
유다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의 이야기입니다. 그에게는 아내 나오미, 또 두 아들 말론과 기론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왔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실한 베들레헴 사람들은 이 흉년 중에서도 베들레헴 땅을 떠나지 않았지만 엘레멜렉은 가족들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모압 땅이란? 우리가 기억하듯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자기 큰 딸과 근친상간을 통해 태어난 모압의 후손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 사악한 민족이었습니다. 본래 엘리멜렉 가족은 모압 지방에 정착하기 위해 내려가지는 않았습니다.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1)라고 했습니다. 우리 또한 머물기 위해 세상으로 내려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룻기서를 읽으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본서 어디에도 모압에 풍년이 들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유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이 그곳에 풍년이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베들레헴이 흉년이 들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을 떠난 후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모압으로 내려간 아비멜렉의 두 아들들은 모압의
성경에는 사람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예수님 이전의 구원의 문제, 인간의 불순종을 미리 아신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설치한 이유, 네피림의 정체, 창조 이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 사탄의 배반의 죄의 출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 및 사울왕의 구원의 여부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때때로 지명도 높은 신학자들의 견해를 빌려서 나름대로 해석을 하곤 하지만, 그 신학자들 역시 유한한 인간의 한 사람에 불과하므로 그들의 주장이 곧 바로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역사상 가장 머리가 비상한 위대한 신학자로 평가받는 ‘어거스틴(Augustinus)’ 조차도 성경에는 사람의 머리로 풀 수 없는 난제들이 많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난제들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겸손케 하시려고 성경에 신비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므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을 자의적으로 해석해놓고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단정 짓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것이다. 히브리서 6장에 이미 받은 구원도 취소될 가능성이 있다는 듯한 구절이 있어서, 신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하지만 이 두 설교 접근방법은 강조점에서 차이가 있다. 학자마다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강해설교는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 생각(what the text mainly says)과 본문의 움직임과 구조(what the text moves or is structured)를 설교에 반영하려 한다. 하지만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본문의 중심 생각과 본문의 구조와 움직임뿐만 아니라 본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의사소통 수단(text’s unique communication method)을 통하여 감성적인 효과(emotional impact)도 현대 설교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려 한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설교철학과 방법이 비교적 일관성 있게 체계화된 설교법이다. 그렇다면 본문이 이끄는 설교철학과 방법은 무엇인가? 1.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특징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기초(theological foundation)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명제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계시하시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계시에 안내받고 반응하여야 한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유래와 의미 청문회는 미국의회가 운영해 온 제도로서 한국에는 1988년에 도입되어서 그 해 11월에 제5공화국 비리와 일해(日海)재단, 광주민주화운동, 언론기관 통폐합문제 등이 다루어졌다. 이채로운 것은, 청문회가 영어로는 단순히 듣는 것(hearing)이라고 표기된다는 점이다. 청문회는 국가가 입법이나 행정상의 결정, 또는 대통령이 국무총리나 대법원장 등 국가의 주요 공직에 지명한 사람이 해당 공직을 수행할 만한 자질과 성실성을 갖추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국회에 조사를 의뢰하고, 국회는 당사자와 관계자 또는 전문가의 의견을 듣기 위해 조사에 필요한 증인, 참고인, 감정인으로부터 증언 및 진술을 청취하고 결과를 관련 기관에 통보하는 제도이다. 잘못 가는 청문회 근래에 연일 계속되는 청문회를 시청하다보니 청문위원들 중에는 증인의 행적에 대한 증거자료까지 수집해서 철저하게 준비해 나오는 위원이 있는가하면 해당 건(件)이나 인물에 대한 자료도 수집하지 못하고 뉴스만 듣고 나온 것처럼 보이는 태만한 위원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이화여자대학교의 부정입학 혐의를 청문한 위원들은 청문회 바로 전에 실시된 교육부의 감사 결과도 읽지 않고 나온 듯 일부 증인들이
신학적 삼위일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며 집을 나와 어디를 가려면 꼭 확인해야 하는 것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는 신발을 신듯 차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환경에 차 키를 들어야 한다. 둘째는 차와 함께 필요한 운전면허가 든 수첩을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길 밖에 없는 도로를 달리다 문제가 생기면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처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셋째로 필요한 것이 전화기다. 운전을 하고 달리다가도 불연 듯 앞주머니와 뒷주머니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대중교통이 발달했다는 한국에 와서는 차 없어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아무나 붙잡고도 말 통하는 한국 땅이니 전화기도 그렇게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착하여 생활하는 곳이 그렇지만은 않다. 시간에 맞추어 오고 가는 버스를 탈 수도 없어 밖을 나가려면 꼭 필요한 것이 차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동안 관리를 못해 취소된 면허도 다시 어렵게 취득했고, 차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것 아시고 귀한 손길을 통해 차도 얻게 되다 보니 밖에 나갈 때마다 미국에서의 생활을 회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에 키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앞주머니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 네 사람은 밤새도록 수고했으나 빈 배를 몰고 들어와 그물을 씻고 있을 때 갈릴리 산골 나사렛 동리에서 내려온 목수 예수의 말씀에 순종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두 배에 가득 채워 돌아온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한 후 그때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로 예수 따라 제자가 되어 3년 넘게 제자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그날부터 사명자의 훈련은 시작되었고 주님은 끝까지 참으시고 다듬어 복음의 사명을 감당케 하셨다. 이름부터 시몬에서 베드로라 고친 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의 그 위대한 신앙고백 후였으나 곧 이어 “사단아 물러가라”는 주님의 꾸중을 들었다. 예수 선생을 바라보고 물 위로 걸어간 그가 물에 빠졌듯이 주님이 잡히시던 밤, 스승을 부인한 겁쟁이로 심히 통곡하며 회개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히사 십자가에 달리실 때 사도 요한 외에는 주님의 예언대로 살려고 다 도망쳤다. 예수의 부활을 본 후에도 다른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호수에 물고기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2012년 3월입니다. 제주도에서 사역하시는 어느 한 목사님으로부터 부흥회를 해달라는 전화를 받게 됐습니다. 그래서 언제쯤 해드리길 원하는지 물어보니 6월 달로 원해서 그렇게 약속을 정했습니다. 그 후 6월이 되어 청주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해서 약속된 교회로 가보니 그 교회는 4월부터 7월까지 육지에서 목회하시는 네 분의 목사님들을 택하여 매월 부흥회를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은 4개월 동안 부흥회를 통해 성도들에게 많은 은혜를 받게 하려고 육지에 계신 수많은 목사님들 중에서 네 분의 목사님들을 택한 것입니다. 목적은 부흥회며, 그러기 위해선 목사님들을 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어느 한쪽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고 택하셨다고 합니다. 택하신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하시려는 과정과 절차일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관에 있어서도 “믿음과 행함”
우리는 매주일 예수님의 명칭을 여러 가지로 부르며 듣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 헬라인들은 ‘그리스도’ 영어권에서는 ‘세이비어(Savior)’ 그리고 우리는 ‘구세주’라 부릅니다. 우리가 ‘구세주’라고 부르는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어떻게 약속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기 위해 우리는 누가의 기록에서 칭찬한 젊은 설교자 아볼로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능통한 자라”(행 18:24)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 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기니라”(28)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받아들이게 하는 능력의 근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성령님’ 그리고 그분께서 감동하여 기록된 말씀 ‘성경’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증거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리 예언되어진 약속의 ‘메시야’를 증거 하는 사명을 불안해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전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예언되어진 말씀의 일부분만 알고 전하다보니 예수께서
분명히 예배 중에 설교본문을 읽었지만 설교자가 설교 중 본문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예배 중에 함께 읽은 설교본문 말씀과 전혀 다른 이야기로 설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종종 목격된다. 청중들과의 소통이라는 명분으로 성경 텍스트를 멀리하는 설교의 형태가 한국 강단 가운데 있다. 본문에 기반을 두지 않더라도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기만 하면 된다는 실용주의적 접근이 한국교회에 퍼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침례교 강단은 어떠한가? 침례교회는 성경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라야 할 가장 높은 권위로 인정한다. 한국 최초의 침례교 선교사 펜윅은 성경을 강조하는 선교 원칙이 있었고 설교에서도 이러한 원칙을 적용했다. 침례교회는 성경에 근거한 신앙을 지키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역침례교회(local baptist church)의 강단에서 얼마나 성경본문에 충실한 말씀 선포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만약 현장의 침례교회 설교가 성경본문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략 세 가지 주된 요인을 들 수 있다. 첫째, 성경이 오늘날 신자들도 여전히 따라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설교 중 설교자의 신앙과 신학이 표현된다.
군인들이 경례를 할 때는 반드시 구호를 외치게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군대에서 가장 많은 구호가 “충성”입니다. “충성”하고 큰 소리로 외치면 왠지 어디선가 새로운 힘이 불끈불끈 솟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함 없이 “충성”을 말하고 싶습니다.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또 되어서도 안됩니다(고전4:1~2). 만일 주의 일을 하고 싶다면 먼저 충성하는 태도를 갖춰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강해야 합니다. 성격이 강하라는 말이 아니라 강건하고 굳센 믿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수1:6~9). 그런데 우리 주변에 믿음이 유약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음을 봅니다. 어떤 이유로든 약해져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사탄이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또 한 가지 덕목은 “고난”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고 고난의 가시밭길 같은 게 훨씬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난이 피해가지는 않으므로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딤후2:3). 사탄은 갈수록 여러 가지 간계로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굽니다. 갖
전화의 역사(歷史) 인류문명에 최초로 획기적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 불과 전기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 다음 단계의 혁신적 발명품은 아마 전화일 것이다. 멀리 있는 사람과 유 무선으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없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놀라움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전화가 처음 보급된 것은 1896년 10월 덕수궁에 100회선의 교환대를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정확하게 지금부터 120년 전이다. 그 때 전화기가 설치된 곳은 궁중에 석대, 정부 각 부처에 일곱 대씩, 평양과 인천에 두 대씩 등등이었다고 한다. 전화는 1920년대부터 사용량이 급격하게 증가해서 1921년의 통화량이 7,000건이었는데 1926년에는 1억 2,300건이 나 되었다. <이고위감>(以古爲鑑) 참조. 전화에 얽힌 일화가 많지만 그중 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 순종과 관련된 것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고종황제는 1919년에 승하하여 명성황후와 함께 홍릉에 안장됐다. 순종은 선친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매일 아침 능지기에게 전화를 걸면 능지기는 전화를 가지고 능으로 나가서 수화기를 고종의 무덤 앞에 대었다. 수화기에서는 순종의 애끓는 곡성이
웰만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벗은 나 자신이며,세상에서 가장 나쁜 벗도 나 자신이다.나를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힘도 나 자신 속에 있으며 나를 해치는 무서운 칼날도 나 자신 속에 있다. 이 두 개의 나 자신 중의 어느 나를 좇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최인호의 “인생” 중에서. 오늘은 입다에 대해 세 번째로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암몬과 싸우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입다는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사사기 11:30~31) 입다가 싸울 때에 하나님께서 암몬 자손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셔서 전쟁에 이기고 집으로 금의환향을 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올 때 무남독녀 외동딸이 작은 북을 손에 들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을 했습니다(34절). 입다가 그것을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장탄식을 하며 괴로워하며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35절). 서원을 조심성이 없게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입다는 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한 야곱은 외사촌 동생들인 레아와 라헬을 만났는데 언니보다 다 곱고 아리따웠던 동생 라헬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기쁨으로 섬겼는데 그녀를 위해 자그만치 7년이라는 세월을 헌신합니다. 그러나 사랑했기에 며칠처럼 여겼습니다. 창세기 29:16~20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즐거우면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는 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피곤한지도 모르고 즐겁게 시간을 보냅니다. 언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릅니다. 그러나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마지 못해서 하면 시간이 더디게 가고 지루하고 힘들기가 이를데 없습니다. 실제의 시간은 동일한데 마음가짐에 따라 이렇게 다릅니다. 2016년 한 해가 정말 쏜살같이 다 지나갔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제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서 1년이 너무도 짧게 여겨집니다. 나이 탓이라기보다는 그만큼 부지런히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저같이 부족한 죄인을 사용해주신 주님의 은혜가 그저 고맙고 감사하기 만 할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야곱이 칠 년을 몇 일 같이 여겼다는 말이 무척 실감이 납니다. 그리고 즐겁게 살아온 것이 감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