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주위에는 유명한 정치인, 체육인, 연예인들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환승역에서 저승(천국행, 지옥행) 으로 향하는 열차를 타신 분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생의 마무리를 아름답게 한 후 천국 행을 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이 환승역으로 떠날 남은 시간이 얼마쯤인가를 예측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로 떠날 시간이 가까워 왔다는 것을 예감하며, 이 땅에서의 삶이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이제 그 기간이 다 돼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이렇게 사는 삶이 한치도 헛된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사명감을 가지며 날마다 육신의 소욕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어도 우리의 육신은 세상의 정욕으로, 죄악으로 가려고 합니다. 기도하며 내 속에 계신 성령이 육신을 지배하도록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세상의 것, 물질, 권력, 명예 등 아무리 대단해도 시간이 지나가면 다 사라지게 되는 헛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남을 배려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 끝에서의 삶. 남을 배려하는 사랑의 삶만이 나중에 천국에
아내 할멈은 기침약을 먹고 대낮에 잠에 떨어져 버렸고 나는 거실 소파에서 복음송을 조용히 감상하고 있었다. 나는 아내를 잠 깨우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고요의 방 분위기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런데 잠자던 아내가 놀란 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부엌싱크대로 달려가면서 또 외친다. “어쩌면 좋아 솥이 까맣게 다 타버렸네” 나도 달려가 보니 아들이 선물한 독일제 솥이 검게 타 버렸다. 기침에 좋다는 무슨 열매를 끊이려고 올려놓은 솥이었는데 아내의 곤한 잠 때문에 시간을 놓쳐 솥이 타 버린 것이다. 연기도 났다. 나도 코가 막혀 그 냄새를 잃었다. 나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여기 있다간 아내로부터 불똥을 맞을 테니 도망치자. 주섬주섬 대강 책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고 허겁지겁 아파트 문을 열고 달아났다. 달아나면서도 뭘 내가 잘못한 것이나 있나 생각해 봤다. 그 솥이 타 버린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굳이 범인으로 끌고 들어간다면 함께 있으면서 왜 타도록 모르고 있었느냐 일 것이다. 하여간 나는 아파트를 빠져나와 달아나고 있었다. 구리지구촌교회 목양실로 피난처를 정했다. 후유, 잘 도망쳐왔지. 계속 미련스럽게 집에 있었더라면 아내 할멈으로부터 무슨 책임추궁에 꾸지람을 받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사랑은 현대 신학적 논쟁에 있어서 양대주류로 해석된다. 그 하나는 사랑의 본래 어의가 자기희생으로 보는데 이것을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의 입장으로 보면 그는 “인간의 모든 양상이 상호 간의 이해타산으로 선택되어진 것이라는 사실 속에 발견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한 상호관계가 희생적인 사랑과 모든 양상의 상호 사랑 사이에 존재한다는 논증에 있어서 니부어는 “상호간의 사랑 개념이란 상호간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라고 비평했다. 다니엘 윌리암스(Daniel Williams)의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소망’(God’s Grace and Man’s Hope)에서 “현재 인간의 상태가 악독과 곤궁이 그리스도의 영역 내의 선과 혼합해 진치고 있다. 사실적으로 모든 사랑은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선과 혼합하는 것이다. 욕망은 가능한 무의식을 포함하는데 자기 자신의 선을 위한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선을 위한 자기의 욕망으로 나눈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에 의하여 찾아진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요구는 우리가 진정한 상호애의 생활을 하자는데 있다. 그러나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을 따르면 “모
요즘처럼 집에 콕 갇혀있어야 하는 때에는 우리와 연결된 많은 것들이 단절된다. 교회, 직장, 학교를 포함한 일상의 공간들과 단절됐다. 한없이 길어서 고슴도치의 형상이 된 아들의 머리나, 아들 머리 자라듯이 계속 늘어가는 옆구리살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온라인으로 만나는 사이버 공간들은 편하긴 하지만 사람 간의 친밀감의 욕구들을 다 채워주지 못한다. 윗도리는 셔츠 입고, 아랫도리는 잠옷 입고 참석하는 회의는 반만 진지하다. 친구들과 만나서 수다 떨고 밥 먹고 차 마시던 공간도 여유도 사라졌다. 집에 머무르라는 명령이 슬슬 풀려가고 있지만 역시 아직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할 것이 고,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뭔가 찝찝하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아주 가깝게 남겨진 유일한 존재가 가족이다. 쳐다보고 만지고 부대낄 수 있는 단 하나의 관계다.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각자의 집에 갇힌 생활이 시작되면서 다시 한번 떠오른 이슈는 가정폭력이다. 학교에 가지 않으면 굶어야 하는 아이들이 생겨난다. 어떻게 이 풍요의 나라에서 아이들이 밥을 못 먹을 수 있냐고 질문하겠지만, 하루 종일 나가서 일해야 겨우 먹고살고, 그나마 이 경제적 재난에서 한 달이라도 수입
오래 전에 나의 친척 중에 몹시 시련을 겪으며 결혼한 부부가 있었다. 연애 시절에 아가씨의 부모가 심한 반대를 하였기 때문이다. 이유는 총각의 어머 니가 술집을 했고, 세 아들의 장남으로 결핵까지 앓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들의 관계를 끊으려는 과정에서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학대와 고통을 줬다.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도록 아가씨를 방에 가둬놓기도 하고, 강제로 삭발을 시킨 적도 있으며, 밧줄로 묶고는 매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의 관계를 끊을 수 없었다. 총각이 국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자 아가씨는 총각의 근무처가 있는 곳으로 야반도주하여 찾아가선 결국 결혼을 했다. 이들의 결혼 생활은 남편이 고위 공무원으로 은퇴한 지금에도 과거 연애를 할 때처럼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 부부의 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어 희생시켰다(요3:16). 죄인들이 사는 세상, 거짓과 불법, 무질서와 폭력, 낙심과 절망이 있는 세상에 구원과 생명과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1991년도에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에서 학생부 전도사 사역을 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한국에 가서 사역하라는 강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얼마나 강하게 역사하시던지 도무지 사역이 마음에 안 잡힐 정도로 한국에만 집착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7월 한 달 동안 휴가(언제 다시 갈 수 없으니 분명한 결정을 하고 돌아오기 위하여)를 내어 한국에 답사를 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와서 보니 두 가지 때문에 마음이 많이 흔들렸습니다. 첫째는, 한국에는 교회가 너무 많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둘째는, 10년을 미국에서 살다 보니 어느덧 자신이 미국화가 되어있어 한국에서 적응하며 살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았습니다. 한 예를 들어, 한국의 여름은 습도가 너무 높아서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했으며, 인구 밀도 너무 심해서 굉장히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서 알고 지내던 어느 한 분이 처가댁에 방문하기 위해 한국에 오셨는데 그분과 함께 통
가? 두향이 선생의 안두에 가져 놓았던 매화는 오늘도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마치 두행처럼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퇴계와 두향의 사랑보다 더욱 애달픈 사랑이 있으니 네가 너라는 사실 때문에 너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사랑하는 너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 미투 사건을 접하면서 청순한 사랑을 노래해 봅니다. 이황(李滉) 퇴계(退溪) 선생께서 매화를 노래한 시는 백수가 넘습니다. 매화를 유별나게 사랑 하는 이유는 관기(官妓) 두향(杜香) 때문입니다.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48세 때였습니다. 두 향의 나이는 매화향이 솔솔 풍기는 방년 18세, 두 향은 퇴계 선생에게 첫눈에 반했습 니다. 그러나 선생의 근엄한 자태는 항상 풀 먹인 안동포처럼 고고했습니다.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은 퇴계 선생은, 텅 빈 가슴에 한 떨기 설중매(雪中梅) 두 향을 만남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인가? 두향은 시, 서예, 가야금 뿐만 아니라 그림도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별나게 매화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외로움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퇴계 선생은 그윽하고 맑은 향기에 깜짝 놀라 잠에서
지금은 기도할 때다. 미스바로 모이자. 미스바라는 지명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던 야곱과 삼촌 라반이 약속하며 세워진 땅으로 성경에 처음 등장한다(창 31:49).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던 빼앗겼던 법궤가 돌아올 때, 기도의 사람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도의 자리로 부르기 위해 “미스바로 모이라”고 선포한다(삼상 7:5). 대한민국이 성령의 바람으로 가득하던 70년대에 기도할 때마다 부르짖던 말이 있었다. “동방의 이스라엘, 동방의 예루살렘”, “세계 선교의 등불”이라는 구호와 함께 한국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빼앗겨 버린 법궤처럼, 사명을 잊어버리고 기도의 자리를 잊어버렸다. 이제 다시 기도의 자리, 사명의 십자가를 찾아야 한다. 백동의 편지라고 침례신문에 실려진 백동의 글이 편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한다. 백동 편지로 보내지는 이 글을 누가 보게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마음을 움직여 감동을 주신다면 함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사무엘의 심정으로 동참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10월 3일에 하루 세끼가 안 되면 한 끼라도 금식하며 기도하자. 각자 있는 곳, 있는 자
1953년 1월 5일 그땐 한국전쟁 중이었는데 파리의 바빌론 소극장에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작품이 공연됐다. 무대에는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이 서있는 황량한 무대였고 특별한 줄거리나 극적인 사건도 없는 작품이라서 인기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 놈의 고도(Godot)가 한국에서는“고도를 기다리며”의 연출가 임영우 83세 선생께서 한평생을 바쳤으며 한국 초연 50돌을 맞아 공연하기도 했었다. 무엇을 기다릴지는 자유라고 했다. 무엇인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 사람들은 그래도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기다리는 자이다”라는 교훈이다.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차이점이란 기다리는 인간과 기다림이 없는 동물이었다. 저자가 어떤 질문에 답한 것을 보면 고도(Godot)의 정체를 알만하다. 사람들이 고도의 정체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소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 같은 소동은 베케트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미국인 연출자 알랭 슈나이더의 질문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에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한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고도는 고도라는 이름뿐 텅 빈 내용이었다. 사람들의 기다림의 대상은
어릴 적에 동생과 싸우면 어머니는 소리 질러 꾸짖고 말린 후 저녁에 일터에서 귀가하신 아버지께 이야기하셨다. 우리들은 아버지께 사실 경위를 아뢰고 백양나무 회초리를 꺾어오게 해서 동생이 다섯 번 맞으면 나는 열 번 종아리를 맞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동생이 까불고 소리치며 달려들더라도 형으로서 동생을 사랑하고 참고 용납하라는 아버지의 “사랑의 법”이라는 것을 철이 든 뒤에 깨달았고 나도 자식을 키우면서 체험하게 됐다. 수많은 얘기가 우리 형제들이 자라면서 있었지만 아들 다섯, 딸 다섯 10남매를 낳아 가난한 농촌 개울가에 힘들게 논을 만들어 자식들을 양육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오른다. 우리들이 어려서 만만한 게 엄마로 투정 부리고 애먹일 때 “야 이놈의 손들아! 너희들이 자라 장가가고 시집가서 자식새끼 키워보면 그때야 내 심정 알 거다!" 하시던 말씀이 귓가를 울려와 있다. 한국전쟁이 예고도 없이 일어난 것이나 일본이 미국과 전쟁 때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을 침공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전쟁은 법 없이 감행됐다. 성경을 배울 때 구약은 율법이요, 신약은 사랑이라 배웠다. 율법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율법이 분노한다고 배웠
침례교를 창시한 사람은 존 스마이스였으나, 세계 침례교회의 모교회인 영국 일반침례교회를 설립한 사람은 토마스 헬위스였다. 그는 최초 침례교회가 메노파교회에 합병되는 것을 반대하고,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영국으로 돌아가 1612년에 일반침례교회를 세웠다. 만일 헬위스 그룹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도, 1630년대에 등장한 영국 개혁주의 침례교도들이 특수침례교회를 시작했을 것이지만, 적어도 일반침례교회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헬위스는 교단의 정체성을 이루는 침례교 교리와 사상을 정립하고 후세에게 물려주는 역할도 했다.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 c.1575~c.1614)는 에드먼드와 마가렛(Edmund and Margaret Helwys)의 장남으로 1575년경 영국의 노팅험셔(Nottinghamshire)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13세기부터 17세기 초반까지 노팅험셔 근교에 살면서 성공한 농부의 가문을 일구었다. 아버지 에드먼드는 부유한 지주로서 브록스토 홀(Broxtowe Hall)이라 불리는 넓은 장원을 건설했다. 에드먼드는 1590년에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헬위스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큰 재산을 운영하기 어려워 삼촌들의
위의 설교개요는 귀납적 방식 혹은 이야기식 설교를 위한 하나의 설교 계획안이다. 귀납적으로 설교를 전개할 때는 설교 전반부에서, 특히 “실패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에서 풍부한 에피소드(예증)가 제시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본문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으로 겪었던 민족적이며 개인적인 고난과 실패가 성서 속의 사건에 머물지 않고 청중 각자에게 실존적으로 다가오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점은, 이후 전개되는 설교에 청중으로 설교에 집중케 하며 설교자가 이끌어가는 설교 무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3) 시편 23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여호와 하나님께 그리고 사람 앞에 범죄한 가증한 행위를 버리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태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맘몬의 우상을 버리지 않은 채로 사람에게 범죄한 죄들을 회개하지 않은 채 가증스럽게도 하나님 앞에 나와 은혜를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없이, 자신들의 욕심도 버리지 않은 채, 아무리 기도에 열중을 해도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기에 앞서 마음과 행위를 정돈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죄 중에 살고 있는 인간이면서 본인이 의인인척하며 다른 사람들을 구정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면 본인도 구정물로 더럽혀져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일을 하려고 감정적인 고집을 부리고 있는 어리석은 자를 위해 화평케 하도록 권면하며 기도해 주신 안수집사님, 더욱이 진심어린 권면으로 눈물까지 보이신 목사님, 이러한 감동과 감격이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 마음과 행위를 정돈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장로들에게 우상숭배의 역사를 상기시키십니다. 이스라엘이 반역한 역사는 애굽에 있을 때부터 시작이 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친히 찾아가셔서 그들을 택하시고 자기 몸을 더럽히
이른 아침 피어있는 나팔꽃 사이로 진홍빛 분꽃이 피어났어요 저녁에 피는 꽃이 왜 아침에 피었지 궁금했어요 오늘도 이른 아침 분꽃을 보다, 문득 박노해 시인의 새벽별이 생각났어요 맞았어요. 분꽃은 이른 아침 피어난 게 아니라 밤새도록 우리 곁에 있었던 거예요 우리와 함께 아침을 기다렸던 거예요 분(粉)꽃은 씨앗의 껍질을 벗기면 하얀 가루가 들어 있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이 분가루를 얼굴에 바르며 곱게 단장하곤 하셨다. 오후 4시경에 핀다 하여 포어클록(four-o'clock)이라 불리는 분꽃은 시계가 없던 시절 우리네 어머니들에게 저녁밥 지을 시간을 알려주던 고마운시 계꽃이기도 했다. 해 질 무렵이면 피기 시작해 아침이면 시드는 분꽃이 이른 아침인데 활짝 피었다. 참으로 낯선 광경이다. “저녁에 피는 꽃이 왜 아침에 피었지?” 그러다 문득, 생각나 깨닫게 되는 박노해 시인의 <새벽별>, 그랬다. 이 생생한 진홍빛 분꽃은 아침에 피어난 꽃이 아니라, 밤을 견뎌낸 이들을 가장 나중까지 지켜주는 희망의 꽃이었다. 임경미 사모 / 비전교회
퇴짜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상납(上納)한 포목(布木)의 품질이 낮아서 “퇴(退)”자(字)가 찍혀 도로 물려 나온 물건을 말하는데, 그것의 의미는 퇴(退)박 맞았다는 것이니, 이는 또 무엇을 주었건만 받는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물리침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로 본 퇴짜를 목사며 교수인 나는 내가 가르치는 현장에서 몇 번 당했던 체험이 있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밝힌다. 퇴짜 당한 심정이 어떨까? 언필칭 낙담스럽다고 하겠지! 그러나 나는 나의 강의가 거부당한다고 해서 놀라지 않았다. 그 첫째 이유는 당연히 거부당할 수 밖에 없는 성격의 진리 강의였기 때문이었고, 그 둘째는 좀 핑계스러울지 모르나 수강자들의 질(質)의 문제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첫째 퇴짜 체험은 어느 해 신학교에서 신학과와 기독교 교육학과의 학생들에게 조직신학을 강의하는데 신학과 학생은 매시간 “아멘, 할렐루야”로 응하는데 반해서 기독교 교육과 학생은 강의를 거부하더라는 것이다. 교과서 위주로 꼼꼼히 가르치는 것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다 같은 교재로 다 같은 선생 밑의 수강자들의 찬반 갈라짐은 수강자들의 질의 문제일 따름이다. 솔직히 신학과 학생은 더 성숙하고 영적인데 비해 기독교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