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작은 교회의 목회적 특징작은 교회는 목회자가 목회의 본질에 충실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변화에 집중할 수 있다. 자신의 경험을 의지하는 노련한 농부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거나 개선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농사 방식이 최고의 선이라 믿고, 소출을 늘리기 위해 농약의 살포 양을 늘리는 것뿐이다. 그 결과 땅은 죽어가고 종국에는 사람을 병들게 한다. 이는 한국교회 현실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목회의 본질을 망각한 채 목회 방식의 노예로 지내거나 성장과 부흥이라는 신기루를 좇아 갖가지 세미나를 기웃거리고 있을 뿐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목회의 본질을 붙잡고 한 사람의 변화에 집중할 때, 주님께서는 넘치는 은혜를 부어 주실 것이다. 이 일은 큰 교회뿐만 아니라 작은 교회가 할 수 있는데, 작은 교회가 더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다.작은 교회는 목회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 할 수 있다. 목회자의 역할은 영광의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가 제자리에 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헌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한 사람에 주목하고 그를 준비시킨 후 그를 통해 주님의 일을 이루신다.작은 교회는 깊은 유대감을 경험 할 수 있다
침례교회의 목회자 상은 가톨릭이나 일부 개신교회처럼 성직자 개념으로 여기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무교회주의자나 성별된 목회자를 부인하는 일부 회중교회의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목회자는 철저히 섬기는 봉사자이다. 그런데 어떻게 무엇을 섬기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목회자는 자신이 먼저 행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행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으로 행하게 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훈련자가 돼야 한다. 이러한 목회자 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성경말씀이 에베소서 4장이다. 에베소서 4장은 먼저 교회가 한 공동체로 뭉칠 수 있는 신앙적 기초에 대하여 언급하고(1~6), 그런 공동체가 되도록 모든 구성원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봉사해야 함을 강조하고(7~8), 구성원들이 그렇게 하도록 챙겨주는 일군들로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등으로 소개했다. 여기에 언급된 일군들을 요즈음 말로 하면 목회자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의 역할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여”이다. 목회자의 주요한 역할은 성도들(교인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온전케 된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하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가끔은, 자주 사용하는 말에도 혼란이 온다. 그 중 하나가 은퇴와 퇴직과 퇴임, 또는 은둔(隱遁)이다. 정의(定義) 하거니와 퇴직은 단순이 직장을 그만 두는 것, 은퇴는 직장을 물러나면서 하던 일에도 손을 놓는 것, 은둔은 아예 세상을 등지고 숨어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퇴직 했는데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면 은퇴요 찾는 사람의 발길마저 끊어지면 자연스럽게 은둔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교회나 직장을 잠시 떠나는 것까지 포함해서 넓은 의미로 “퇴임”이란 어휘를 사용하려고 한다.아름다운 퇴임을 위해 지켜야 할 몇 가지 목회 상식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1) 전임 목사는, 교회와 후임자가 일심으로 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회를 떠나는 것이 후임자의 목회와 신자들의 교회생활에 유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 교회가 원해서 남아있는 퇴임목사라 할지라도 후임자의 행정과 인사에 참견해서는 안 된다. 은퇴 목사는 교회에서는 자신의 시대가 지나간 것을 알아야 한다. 3) 근래 책을 펴내면서 출판사들의 사정을 보니, 편집과 영업을 맡은 중견 직원들이 회사를 나가서 따로 출판사를 설립하고 전 직장의 고객을 빼앗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에서는 이런 것을 생존경쟁의 한
일본인은 대게 예의 바르고 검소하며 질서를 지키고 남을 배려하며 정직하다. 그런데 일부 정치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일본인의 정서와는 달리 시대의 양심을 외면하고 역사를 고쳐 쓰려고 한다. 그들의 역사인식을 짚어 본다.첫째로, 아베 신조 총리는 가미가재에 희생된 자국 소년들이 남긴 애절한 편지와 기록물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하는 문제를 고려하겠다고 공언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으로부터 시작된 태평양 전쟁을 통해 자기나라와 미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피 끓는 청년들을 얼마나 많이 희생시켰는가. 가미가재는 이미 일본의 전세가 기울어 정공법으로는 미국과 연합국에 대항할 수 없음을 알고 애 띈 청소년들을 애국이란 명분으로 동원해서 연합군의 시설이나 선박에 자폭하도록 교사한 전쟁범죄 행위이다. 생각해보면 가미가재가 바로 오늘날 자살폭탄 테러의 원조가 아니가.아베 총리는 명분 없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자국 타국의 희생자들에 대한 반성은커녕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은 분명 보편적 양심에 역행하는 행위이다. 가미가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그들이 일으킨 전쟁의 참상을 다시 한 번 세계만방에 알리고, 그것을 영구 보전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아무리 막돼먹은 전쟁이라 하더라도 전쟁에는 나름대로 다 명분이 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할 때에도 옛 영토 ‘폴란드회랑의 회복’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암몬왕도 자기 나름대로의 명분과 논리를 내세워 히브리백성들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그러나 문제가 된 그 요단강 동편 영토는 암몬왕이 시비를 걸어오기 300여년 전부터 히브리백성들이 점유해왔던 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몬왕은 이미 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지파와 갓지파가 오래 전부터 살아왔던 그 땅을 반환하라고 억지를 부렸던 것이다. 하지만 입다는 성경의 가나안 정복사를 거론하면서 암몬왕의 억지주장을 분쇄한다. 먼저 사사기11:16에 기록과 같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땅에 우회 진입한 경로를 밝힌다. 에돔 족속의 반대로 인해서 멀고 먼 우회 진입로를 선택했지만, 히브리백성들은 결코 암몬이나 모압지역에 들어가지 않았음을 설명한다.차라리 그 땅은 진멸당한 아모리땅이라는 정확한 해석을 덧붙인다. 아모리 족속들이 가나안 진입을 방해하지만 않았더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전쟁이었다는 팁까지 덧붙여서 말이다.다시 말해서 원래 그 땅 주인은 아모리 족속이었지만, 그들이 전쟁에 패하여 진멸당하고, 완전히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므로
2. 작은 교회의 개념 예배의 출석률을 언급 할 때는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수를 기준으로 한다. 작은 교회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고, 쉽지 않은 많은 제한적인 내용이 있다. 현대문화는 ‘작은’이란 개념에 편견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태어난 문화적 배경과 지역과 교회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교회는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이기에 세상적인 용어인 ‘작은’이라는 용어가 합당하지 않을 경우가 있다(행 20:28). 예수님이 언급하신 복음의 생명력을 깨닫고 있는 사역자에게는 숫자가 많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요 12:24). 교회를 분류할 때에 보통 연구를 위하여 주일 낮 평균 예배자 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에는 침례를 받고 입교한 교인들을 중심으로 하나 한국교회의 분류인 전체교인을 중심으로 분류하고자 한다.한국교회의 대표적 연구기관인 교회성장연구소는 「한국교회 경쟁력보고서」에서 출석성도 수를 기준으로 소형교회(100미만의 교회), 중소형교회(100~300명 미만), 중중형교회(300~600명 미만), 중형교회(600~1000명 미만), 중대형교회(1000~2000명 미만), 대형교회(2000명 이상)으로
지난 2월 13일 개봉 이후 벌써 관객 수 30만을 돌파하고 있는 영화. 게다가 3월 1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릴 UN인권이사회에서도 상영될 영화. 그래서 우리 가족도 이 영화 관람에 참여해봤다. 아시는 대로 이 영화는 북한 지하교회에 현재 가해지고 있는 북한정권의 박해를 소재로 한 영화다. 예배는 물론이고, 찬송 한 곡조, 기도 한마디까지도 맘껏 할 수 없는 북한. 성경은 김일성 초상화 뒤에 숨겨 보관해야 하고, 예배는 지하 동굴 같은데 모여 드려야 하며, 기도 역시 이불 뒤집어쓰고 드려야 하는 등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혹한 고문을 당해야 하는 현실은 오늘날 너무나 큰 풍요와 자유를 구가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극명히 대조된다. 정말 그들의 아픔이 영화관의 대형스크린 크기만큼이나 크게 다가왔다.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난 첫 번째 느낌은 다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영화에서도 나왔듯이 주인공 철호가 트럭을 타고 평양으로 가던 중, 죽은 아내가 환상으로 나타나 어깨에 기대어 “꿈을 꾸었다”며 들려준 메시지도 그랬다. “꿈을 꾸었는데 성도들이 기도하니 북한 인민들이 살아나고, 기도를 중단하니 북한 인민들이 죽어가더라. 그러니 그
서론한국교회의 향후 10년은 한국교회의 침체 기간이 30년이 경과하는 시기이다. 한 세대 동안 갈등과 현실 유지에 매달려 오고 있는 상황이 된다. 한국교회의 80%에 가까운 교회는 작은 교회들이다. 침체가 장기화 될 경우에 닥칠 위험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작은 교회가 무너지고, 교인들은 노령화가 되면서 자립이 어려워지고 다음세대를 준비할 여력이 상실 되게 된다. 앞으로 10년은 한국교회가 위기와 기회가 복잡하게 공존하는 미래에 직면 할 수 있고, 몰락과 부흥의 갈림 길이 될 수 있다. 2010년 통계청의 인구센서스 자료를 기반으로 저출산, 고령화의 파급, 한국교회의 위기 요소들을 고려 할 때에 2050년에는 한국교회 교인 숫자가 500~600만 명으로 감소 할 수 있고, 그 중에 60~70%는 55세 이상 은퇴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21세기는 대형교회들도 많을 것이지만, 작은 교회가 부각되어야 할 시기가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작고 강한 교회’운동이 일어나고 있고 이미 전개되고 있다. 작고 강한 교회의 시대이다. 한국교회의 80%에 가까운 교회는 작은 교회들이다. 작은 교회가 강하게 되는 일은 하나님의 사역이 활기차고, 교회의 침체를 막고, 다
목회자의 성경적 모델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부모인 목회자에 대해 살펴보겠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않다고 하며,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아버지임을 진술했다(고전 4:15). 1. 목회자는 새신자를 복음으로 낳아야 한다.사도 바울이 자신을 아버지라고 피력한 근거는 복음으로써 그들을 낳았기 때문이었다(고전 4:15). 복음으로 낳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증거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거듭나는 영생의 길로 인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도록 안내해줬다는 말이다. 물론 모든 신자들이 다 목회자를 통해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목회자 입장에서 목회의 출발을 복음전도사역으로 삼아야 함을 일깨워 주는 말씀이다. 목회는 기존의 영혼들을 돌보는 사역 이전에 잃었던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 영혼을 구원으로 안내하기 위한 목회자의 심정적 고통은 해산의 수고에 비유된다. 바울은 자기 형제된 백성의 구원을 위해 큰 근심과 마음의 고통이 있었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의 엠마오 현현 사건과 제자들에게 현현한 사건을 통해 부활의 예수를 알아보는 길과 함께 부활의 존재성 곧 부활의 존재는 신체를 벗어난 영 혹은 영혼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의 살과 뼈를 포함하여 나사렛 예수 전인의 부활이라는 몸의 부활 개념을 제시했다. 누가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담긴 구원사적 의미를 부활하신 예수의 말씀을 통해 제시한다. 누가는 부활 현현 사건의 절정에서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구원자인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약속(예언)의 성취이며 나아가 그 구원을 만민에게 전파하기 위한 출발점과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부각시킨다.누가는 먼저 공생애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의 중심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내)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 24:44). 여기서 예수의 말씀의 핵심적 의미는 ‘성취하다’(plhro,w)라는 동사와 필연성을 나타내는 조동사(dei/)를 통해 표현된다. 누가는 ‘성취하다’라는 동사를 하나
나라는 여럿이나 땅은 하나며 통치자는 여럿이나 백성은 하나다. 세상은 한 사람으로 시작된 인류가 하나의 땅 위에서 하나의 이상을 추구하며 사는 곳이다. 제한된 땅을 여러 민족이 나누어 가지기 때문에 욕심 많은 사람들은 흔히 땅의 경계를 침범한다. 비옥한 제 땅보다 척박한 남의 땅이 더 좋아 보이고, 자기 마을 개울에서 잡은 붕어보다 이웃 마을 연못에서 잡힌 송사리가 더 실해 보인다. 모두가 욕심 때문이다.이 욕심 때문에 인류는 제국주의라는 약육강식의 암흑시대를 통과해야 했다. 안타까운 것은, 제국주의 시대에는, 힘센 자만 살아남을 자격이 있다는 다윈의 적자생존(適者生存)사상과 세상은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소위 자연선택 사상과 니체 같은 정신 나간 철학자의 초인(超人) 사상이 인류의 정신세계를 제압해버렸다는 사실이다.이와 같은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나라들은 큰 배와 무기를 만들어 가까이는 이웃 나라, 멀리는 대양을 건너 다른 대륙까지 침공해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붙잡아 착취하고 살육하고 집에서 기르는 소나 말처럼 시장에 내다 팔기까지 했다. 그들은 자신들은 초인이라고 판단하고, 약자(약소국가)는 자연선택을 받지 못한 피조물로 비인간화 해버렸
목회자는 어떤 존재인가? 목회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사역해야 하는지에 대한 입장정리가 필요하다. 목회자의 모델은 그런 자화상에 대한 모형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델을 생각하면서 목회자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정리해본다.목회자는 종의 모델을 가져야 한다. 종이란 우선 주인의 소유물로서 주인의 뜻을 따라 움직이고 주인의 의향을 성취하기 위해 일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불러 쓰시는 모든 사람을 종이라고 했다. 아브람도(시105:42), 모세도(신34:5), 여호수아도(삿2:8), 다윗도(겔34:24), 선지자들도(단9:10), 이스라엘 백성이(렘30:10) 하나님의 종이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불러 쓰시면 이방인이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종이다(렘 25:9). 예수님은 스스로를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말씀하셨고(막10:45), 제자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으로 알고 있었다(행3:13), 사도 요한도(계1:1), 사도 바울도 거듭 거듭 스스로를 종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 나라의 종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의 몸인 교회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하는 종이다.
입다라는 사람은 드보라나, 바락이나, 기드온과 같이 영적으로 무장하여 통쾌한 승리와 온전한 구원을 이뤘던 일반적인 사사들과는 사뭇 다른 점이 많은 사사이다. 사사기11:1을 통해서 그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길르앗지파 중에 길르앗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있었는데, 이 남자가 기생과 바람을 피워서 낳은 아들이 입다라는 설명이다. 율법에 의하면 사생자는 거룩하게 구별된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 수가 없다. 본인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친과 모친의 죄로 인해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라 하겠다. 부친의 상속에서도 제외되었다. 사사기11:2은 “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하시는 말씀으로 그가 당한 불이익을 밝히고 있다. 온갖 멸시와 구박 속에서 자라난 입다는 결국 자기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돕’ 땅에 가서 살았다. 돕 땅은 가나안땅이 아니라 길르앗 북쪽 변방에 있는 현재의 시리아, 즉 수리아의 땅
목회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목회가 달라지기 때문에 목회자의 모델을 잘 세우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해야 한다. 나는 신학교 재학시절 어느날 기숙사에서 큐티 하는 중 구약 느헤미야를 읽다가 에스라를 “학사겸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구절을 발견하고 감동을 받아 쪽지에 “나는 학사겸 제사장 이명희다.”라고 써서 책상 앞에 붙여놓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갔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어떤 목회자가 되어야 할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범죄해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징치하심으로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 백성과 동행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일깨우고 회복시키고자 했던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파수꾼”으로 부르시는 장면을 두 번 씩이나 기록해주었다(겔 3장, 33장). 이것은 파수꾼 사명이 거듭 거듭 확인돼야 할 중요한 사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특히 에스겔 3장 17절을 보면서 목회자의 파수꾼 모델을 거듭 확인해야 한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치시려고 파수꾼을 세우신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불순종 가운데 빠져 사로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치기 위하여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누가는 엠마오 부활현현 사건을 통해(눅 24:13-35) 자기 시대의 기독교인들을 향해 그들이 믿고 있는 부활의 예수를 인격적으로 알아보고 체험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그는 이어서 부활의 예수께서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서 현현한 사건을 통해(24:36-43) 예수의 부활을 육신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헬라인들의 대중적 신앙에 근거한 영혼불멸적인 이해를 비판하고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존재 전체 곧 그의 육신과 영혼 전부를 포함하여 전인의 부활인 것을 변증적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특히 고린도전서 15장과 고린도후서 5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부활관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누가는 이러한 헬라주의적 부활관을 비판하면서 예수의 부활을 몸(신체와 영혼 전체)의 부활이라는 의미로 예수의 말씀을 통해 제시한다: “내 손과 내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8-39). 여기서도 예수의 말씀은 두 가지로 몸의 부활을 제시한다. 첫째는 예수의 살아난 존재를 보고 그의 부활의 의미를 깨달으라는 말씀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