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간에 침례교회는 점차 자립심을 배양시켜 갔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침례교 정체성을 갖추게 됐다. 윈스톤 크로우리(J. Winston Crawley)는 1950대와 6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침례교회는 진정한 침례교회로 정돈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타교단에서 넘어온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침례교적인 신앙정신과 교리적인 교육을 통해서 성경 중심적이고 복음전도적인 침례교 신앙을 심어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 한국침례교회 발전기(1968년 이후)에 대한 실천신학적 평가 1968년 재결합한 한국침례교회는 “한국침례회연맹”(이후 1976년 한국침례교총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이라는 이름으로 뭉쳤다. 1970년 교회기금대여위원회가 발족해 교회개척과 확장에 필요한 재정적 필요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됐고, 후일 국내선교회로 발전했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침례교 신앙으로 무장된 많은 사역자가 배출되면서 교회개척 사역이 더욱 열기를 띄었고, 그것은 교단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됐다. 1970년대와 80년대로 이어진 한미연합전도대회는 교회들의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을 가져다줬다. 1970년 한국침례교회는 미국 루이지애나 주 총회와의 연합 사업으로
성서적 목회의 원리와 본질을 벗어나지 않고 교회의현실과 상황에 맞춘 내 몸에 맞는 목회, 우리 교회의 상황에 맞는 목회는 무엇인가? 오늘은 이런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대답으로 하나엘교회의 목회 매뉴얼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엘교회 목회 매뉴얼은 결코 대단하지도 특별하지도 독특하지도 않으며 누구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할 만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 매뉴얼을 소개하는 이유는 목회 매뉴얼이 없었을 때의 목회와 매뉴얼을 통한 목회의결과가 너무나 큰 차이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하나엘교회의 주의 장막비전은 주의 장막을 교회 모양으로 단순화시켜 시각화했다. 먼저 도표의 중간에 있는 큰 그림의 장막은 하나엘교회를 이미지화했고 하나엘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이미지화 된 단어는 순종이다(마 1:16). “주는 곧 그리스도”란 말씀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진다는 뜻이다. 순종의 기초로 세워진 장막에 5가지 기둥이 있다. 5가지의 장막은 마치 교회를 세우는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오각형의 주의 장막비전의 그림에 5가지 각은 주의 장막을 세우는 기둥
치열한 전장에서는 군 지휘자가 무명 군사에게 갑자기 소대장의 임무를 부여한다. 적군의 맹렬한 공격에 대비해 결원이 된 자리를 메우기 위하여 하급 병사에게 소위 계급장을 달아 주면서 “소대장에 명(命)함”하고 임무를 부여한다. 이를 두고 현지 임관이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현지 임관을 받은 자들이다. 최고 사령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 시간 그 곳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기에 임무 특명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처해 있는 시공(時空)에서 현지 임관을 받은 자들이다. 현지 임관 특명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어떤 위치에 계시는가? 그 분은 어떻게 현지 임관 특명을 내리시는가?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시다. 하늘은 그의 보좌요 땅은 그의 발등상이 아닌가(마5:34~35). 사람이 어디로 가더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신다. 땅 끝 바다 끝까지 가더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신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어딜 가든지 땅을 밟고 공기를 마시듯 우리 인간의 시공은 하나님의 시공과 맞대어 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과 언제나 조우(遭遇)하게 되어 있다. 이 조우에 긍정적인 자세를 취한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 여기 지금 제가 있습니다
“죽어서 천당 갈 사람은 예수 믿어야 하고 지옥 갈 사람은 마음대로 죄짓고 못된 짓거리하다가 지옥 불구덩이 들어간다.” 어려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던 말에 “나는 절에 가서 28번 네 곳에 절하고 부처님 제자가 됐고 석가모니 부처의 은덕으로 극락세계에 들어간다. 걱정할 것 없다. 천당이나 극락, 그것이 그것이지 뭐 다를 게 있노”라고 했는데 정말 천당, 천국이 있는지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의심의 그림자가 있어왔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예수께서 천국복음을 전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고 가르치셨다. 전쟁 중에 한기춘 목사님의 사경회에서 천당지옥이 총심왕(天堂地獄總心王)이라면서 “천당가고 지옥가는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힘주어 설교하셨다. 천국은 먼저 사람의 마음에서 이뤄진다고 하셨다.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면 마음이 천국이 먼저 되고,
그리스도인은 예수로부터 세상으로 파송 받은 그리스도의 대사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28:19~20)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의 모든 삶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한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비슷하게 살 때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예수를 볼 수 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5~16) 그리스도인이 착한 행실을 통해 빛을 비출 때 주변의 사람들이 감동받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유창한 말로 성경이야기를 하
지금까지 요한복음서 서두에 나오는 로고스 찬미가를 토대로 요한의 기독론적 교훈 중에서 로고스 기독론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요한의 기독론적 칭호 중에서 ‘아들’이란 단어가 사용된 칭호들 곧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그 아들” 및 ‘독생자’/“유일한 아들”이 나오는 구절들을 토대로 요한이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요한이 사용한 독특한 기독론적 칭호인 ‘독생자’/“유일한 아들”(the only Son)/“유일하게 출생한 아들”(the only begotten Son)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성에 관하여 알아본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한글 성경에는 주로 ‘인자’로 표기) 칭호들은 공관복음서들에서도 익숙하게 사용됐다. 요한은 이 기독론적 칭호들을 사용하면서도 그가 강조하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존재성 곧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존재성을 제시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요한은 ‘누구의’ 아들이라는 기원의 수식어가 없이 ‘아들’을 관사와 함께 사용한 “그 아들”이란 칭호를 특징적으로 사용했다. 요한에게 있어서 “그 아들”은 ‘독
지옥가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 받아 의인이 되어 영원한 심판인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이라도 엄청나게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우리는 영적 고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이후로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됐고 또한 그분과 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친밀한 사랑가운데 살게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도와주시기 위해 늘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자녀가 비록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나이 많은 신하들이 그 아이에게 하나같이 꼼작 못하는 것은 왕의 자녀의 권세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귀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귀신도 쫓아냅니다.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바로와 모세가 대면했습니다. 바로는 세상 것을 다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엄청난 권세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모세는 80세에 세상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던 힘없는 노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싸웠습니다. 결론은 바로가 모세에게 살려달라고 항복을 했습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
하나엘교회가 목회매뉴얼을 만든 이유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극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3학년 때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논현동에 있는 강남중앙교회에서 8년 동안 부교역자 사역을 했다. 교구 사역에서 결실을 보며 사역하던 중 교회개척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서 순종을 하고 강남중앙교회의 개척 후원으로 2001년 11월 18일 용인시 상갈동 그린빌 프라자 상가 5층에서 교회개척 첫 예배를 드렸다. 강남중앙교회의 사랑과 헌신으로 장소는 주어졌지만 준비된 개척 멤버가 없었기에 아내와 둘이 시작해야만 했다. 대형교회의 부목사로 사역을 하다가 개척교회 담임목사 사역은 그야말로 상황이 많이 달랐다. 개척목회자의 업무는 정기적인 교회청소 및 관리까지 책임져야 한다. 50평의 교회당이었지만 교회당을 관리한다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3개월이 지나니깐 그동안 부교역자 때 준비한 설교의 총알이 다 없어졌다. 일주일에 5번의 새벽예배 설교와 수요예배, 금요철야 설교, 주일대예배 설교를 준비하고 전해야 했는데 그 당시 나의 심정은 한마디로 설교 준비에 치여 죽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개척교회 목사는 설교 사역만 할 수 있는 것이 아
펜윅의 사역 결실로 세워진 대한기독교회는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마태복음 18장 15~17절의 가르침을 따라 교회 치리를 매우 엄격하게 시행했다. 문제가 있는 교인에게는 출교, 정권, 권책 등 세 가지 벌칙을 내렸다. 불신자와 결혼을 하거나 주의 만찬에서 남은 떡을 어린 자녀에게 먹인 일 등등이 징계의 경우가 되기도 했다. 또 침례 대상자에게 “규례문답”을 숙지시켜 시험에 합격해야 하도록 지도했다. 그 내용은 모두 25개 조로 되어 있는데 신앙적 실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훈에 일탈한 행위를 범한 자는 책벌하는 데 매우 엄격했으며, 교인들은 책벌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펜윅의 중심 사상은 세대적 전천년주의, 초교파주의, 축자영감설, 현실적 유일주의, 신앙선교, 오지선교, 자립선교, 토착화선교 등인데, 그의 사역과 그에 의해 세워진 동아기독교를 실천신학적으로 평가한다면 지나칠 만큼 복음전도적이었다는 점을 우선 꼽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목양적 기구가 아니라 전도적 기구이며, 사역자도 목회자가 아니라 전도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졌다. 그리고 재정적인 면에서도 매우 독립적이었으며 비타협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
두 차례의 아웃리치를 은혜와 사랑 가운데 마친 후, 우리 주일학교 아이들은 아직도 마음이 들뜬 채로 지내고 있습니다. 아웃리치 덕분에 매우 편한 지난 주일을 맞다가 오늘은 다시 쉴 틈 없는 주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우리 술 중독 할아버지께서 술을 많이 드신 후 교회당에 오셔서, 우리 더함교회에 1년 만에 생긴 새신자 할머니께 갖은 욕설과 시비를 붙은 끝에 모처럼 애쓰고 힘써 모시고 온 새신자 할머니가 그대로 나가 버리셨습니다. 그럼에도 우선 오후 찬양예배까지 모시고 기다리려 했는데, 점심 식사 후엔 우리 최고령 할머니들과 술중독 할아버지와 싸움이 붙어서 교회가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화가 난 우리 집사님이 우리 술 중독 할아버지의 팔을 잡고 끌고 나가려는데, 아예 교회당 바닥에 들어 누우셨습니다. 우리 집사님들이 가셔서 잡아끌어도 꼼짝도 안하고 욕 만하고 누워 계십니다. 주일 오후예배 찬양팀과 함께 준비하다가, 우리 술 중독 할아버지의 아내인 현 집사님. 체면을 생명보다 중시하시는 우리 할머니 집사님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이 순간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제가 출동하여 대자로 누워버린 할부지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빨리 집에 갑시다. 모셔다 드릴
며느리 가정과 동거하든 분리해서 살든 간에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 일반적인 경험이다. 옛말대로 특별히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가 아주 친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개 불편하다고 할까. 차라리 조심스럽다고 하는 게 가장 예쁜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도 아내와 함께 독일 라이프치히 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있는 아들 권순태 목사 집에 두 달을 머문 적이 있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환상적인 커플로서 뭇 교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이민 교회를 섬기는 것을 보고 나는 그저 고마웠다. 그런데 문제는 며느리의 존재였다. 며느리는 친할 듯 하면서 뒤로 물러서고 말할 듯 하면서 침묵하기를 꼬박 두 달 동안 그러했었다. 나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 정도를 넘어서 나는 며느리를 경계했다. 어떻든 며느리에게 결례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두 달 체류 중 며느리에게 불편하거나 신경 쓰이지 않게 하려고 우리 노부부는 최대한 노력했다. 끼니 때는 사인 주기 전에 식탁에 앉았다. 밥 먹고는 언제나 잘 먹었다고 말했다. 두 달 동안 이런 시아버지의 “Thank you”에 “You’re welcome”이란 말을 며느리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었다. 거의 나는 점심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이 말씀에 은혜받아 그날 저녁예배에 오랄 로버츠(Oral Roberts) 신학생은 4인 가족을 돌볼 돈 55달러를 하나님께 전부 헌금했다. 미국 산골 가난뱅이 목사의 아들로 17세에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가출하여 방황하다가 폐결핵으로 몇 개월 사이 20kg으로 줄어들자 귀가하여 병중에 성경을 읽는 가운데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서 2절) 읽고 기도하여 고침받았다. 1960년 대전 침례신학교 예과에 입학해 오랄 목사의 전기를 읽고 큰 은혜를 받았고, 미국 털사(Tulsa)에 그를 만나러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그의 놀라운 업적에 놀랐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고 온전한 십일조를 바쳐 하나님의 창고를 채우면 복을 쌓을 곳이 없게 부으시고, 또 어려울 때 하나님께 전부를 바치면 부요하신 하나님은 그의 전부를 돌려주십니다!”(말3:10) 이 설교를 듣고 “과부의 생활비 전부”(막12:24)같은 전 재산 18달러 78
미국에 있는 동안 생활하던 곳이 미국의 중부지역에 있는 미주리주의 세인트루이스 근처였다. 미시시피강을 사이에 일리노이주와 미주리주가 만나는 곳이다. 짧은 미국에서의 생활이지만, 생각하면 엄청난 어려운 일들을 많은 겪은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그네의 삶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배우게 된 시간이었다. 모두가 나그네와 같은 이민 사회에서 같은 한국 사람들로 인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상처를 주고 받고 살아가는 있는 모습을 경험한 것이다. 그런데 그 지역의 강퍅한 이유를 한 가지 발견하게 됐다. 영적인 문제로 영적 전쟁터와 같은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방해하는 영적 싸움이었다. 그것은 가까이 있는 일리노이주에 있는 링컨 박물관을 관람했을 때, 더욱 실감하게 됐다. 수많은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통곡이 있었다는 곳, 바로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가며 가족과 헤어지고 고통 당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한국 교회가 많이 부르며, 한이 많은 한국 사람이 작사한 노래라고 알았던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라는 노래가 세인트루이스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됐다. 일리노이주 시카고 도시에 있는 침례교회에서 찬양 사역자였던 토마스(Thomas A. Dorsey
미국 어느 시장에서 한인 교포 두 명이 싸우고 있었다. 그 현장에 흑인 경찰이 오더니 “당신들 교회에 가서나 싸우지 왜 여기서 싸우냐?”고 질책하면서 함부로 말하더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술집에서 싸움질 잘 하던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직분자가 된 후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고, 국내에서 말썽을 피우던 자가 해외에 나가서도 그런 짓거리를 자주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미국 사회에서도 한인 교회 안에서 분쟁이 심했으니 흑인 경찰 입에서 이런 말까지 나왔으리라고 추측되어진다. 누가복음 17장 10절부터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니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해주시길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의 심령 안에도, 가정에도, 무엇보다도 교회 공동체 안에 이미 있어야 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시기, 증오, 알력, 반목, 분쟁이 가득한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교회들은 전혀 바람직한 교회가 될 수 없으며 아예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줄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결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것은 결혼은 유지하는 것이다. 어릴 때는 신데렐라가 한번 춤추고 사랑에 빠진 왕자와 결혼하는 데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그저 재미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그 신데렐라가 결혼해서 왕자와의 배경 차이, 문화 차이, 성격차이, 왕비로서의 새로운 역할에 대한 부담 등등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 것인지, 과연 행복할 것인지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결혼을 골인하면서 다 끝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아는 것이다. 로맨틱한 사랑의 황홀한 경험에 이어서 화장실을 청소해야 하고, 아기 기저귀를 갈아야 하고, 매달 날아오는 청구서에 돈을 지불해야 하는 삶의 뒷모습에 맞닥뜨린다. 구원의 기쁨과 은혜에 충만해 사역에 헌신하고 시작할 때는 신난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가서 커피를 내리는 일도, 교회 쓰레기통을 치우는 일도 그저 감사하고 은혜롭다. 하지만 그 사역을 계속한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열정으로 시작한 일이 마치 김빠진 콜라 맛처럼 느껴지면서 아무 감정 없이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 거룩하고 멋진 순간 뒤에는 훨씬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