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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탁동시(啐啄同時)

김기복 목사
인천교회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를 마치고 귀가 하는데 어머니가 집에서 키우던 닭을 잡고 집을 나서던 중 내가 물었다. “엄마! 닭은 왜 가지고 어디가?”
“음 시장에 가서 팔려고 “ “ 왜 팔아?”
“응 돈 쓸 일이 있어서…”  돌아오신 어머니 품에 닭은 없었다.


이튿날 학교 특활시간에 문예부에서 글짓기 시간에 닭과 얽힌 내 이야기를 원고지에 담아 써 내려갔다.
마침 문예부 지도를 하신 담임 선생님이 내가 제출했던 원고지를 주시면서 앞에 나와 읽으라고 하셨다. 200자 원고지의 대여섯 분량을 읽어 내려갔다.
선생님은 참 잘 썼다고 칭찬하시며 다음 글짓기 대회에 틀림없이 입상할 거라고 칭찬 하셨다. 그 후로 나는 원고지 칸을 채우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내고 했다.
모든 가르침의 과정에서 어떤 과제를 학습하기 위해서는 학습자는 주어진 자극에 대해서 적절한 반응이 도출되어야 모든 학습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부활절에 성도들이 나눠준 계란은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뭇 인생들에서 안에서의 ‘줄’, 밖에서의 ‘탁’이 되어 동시에 일어났을 때, 새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할 수 있다.
부활절에 달걀을 삶아서 나눠주는 풍습을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원하는 마음에서 나눠준다고 생각했다.
달걀은 유정 난과 무정 난으로 나눈다. 유정 난은 암수가 함께 낳은 알이고, 암컷 혼자 낳은 알은 무정난이라 부른다.


병아리가 알을 까고 나올 때 과정을 ‘줄탁동시(啐啄同時)’라고 말한다. 세게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세상에 나올 때 어미 닭이 같은 시간에 밖에서 쪼아서 깨야 한다.
동시에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깨야 한다. 그래서 ‘줄탁동시(啐啄同時)’가 되어야 한다.
계란이 알을 까고 세상에 나오는 과정을 부화<孵化 : 동물배가 난막이나 난각을 깨드리고 외계로 나오는 일. 난생(卵生)-난태생 동물에 대하여 말하며 난각을 기계적으로 깨뜨리는 것, 화학적으로 녹이는 것, 그 양쪽에 의하는 것이 있다.


튼튼한 난각을 가진 단공류(單孔類) 조류파충류곤충류는 배의 문(吻) 위나 배 위 또는 배를 싸는 막 위(곤충류)에 난치(卵齒)라는 단단한 돌기가 생겨 이것으로 알의 안쪽에서 기계적으로 난각을 깨뜨린다.
난치는 부화 후에 곧 퇴화한다. 또 닭의 배에서는 목부에, 왕귀뚜라미류의 배에서는 배부와 머리부에 특별한 근육이 발달하여 알 안에서 난각을 압박한다. 이 근육도 부화 후에 퇴화한다. 어류나 양서류에서는 배 세포부터 부화효소(孵化酵素)를 분비하여 난각을 녹인다.


부화효소선은 송사리에서는 구강 내부의 표면에, 연어나 잉어 등의 많은 물고기는 체표에 분포되어 있다.
양서류에서는 도룡뇽류는 배중선에, 많은 개구리류는 전액선에 분포되어 있다. 그 밖에 멍게류와 성게류 등도 부화효소를 분비한다.
부화시의 배 발육상태는 종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르며, 성게류와 같이 포배단계(胞胚段階)에서 부화하는 것에서부터 등꿩처럼 부화 후 금방 뛰어다니며 먹이를 쪼아먹는 것까지 있다.>라고 한다.
암탉과 수탉이 품어서 나온 것을 자연부화라고 한다. 부화기 기계에 넣고 3주동안 일정한 온도로 보온하면 기계부화라 볼 수 있다.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는 ‘과숙체락(瓜熟蔕落)’이라는 용어가 있다. ‘과숙체락(瓜熟蔕落)’의 뜻은 ‘오이가 익으면 저절로 꼭지가 떨어진다’로 풀이 된다.
불교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사제지간을 말할 때 쓰는 용어로 ‘줄탁동시’, ‘과숙체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달걀의 껍질을 깨보면 껍질과 흰 자위, 노른자 위 그리고 하얀 막이 있다. 그 막 안에는 산소가 있어서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는 시간까지의 필요한 산소가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준비된 산소가 모자랄 정도로 껍질을 깨는 시간이 늦어져서는 안 된다. 병아리나 어미 닭이 시계를 보고 쪼아대서 껍질을 깨는 것이 아닐 찐대 어떻게 시간을 맞춰서 껍질을 깬다니 신기할 뿐이다.
이러한 생명의 신비를 보면서 깨달음이 다가온다. 병아리 한 마리로 살아가기 위해 껍질을 깨는 수고가 있듯이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에 응답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어미 닭이 껍질을 두드려 새 생명으로 불러 주셔도 응답의 과정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병아리 한 마리도 일정한 온도와 시간, 부르심에 응답하심이 모두 모아져야 한 생명이 탄생 되는 과정이 너무 큰 깨달음이 아닌가?
때와 기한이 있다. 3주를 품고 똑같은 과정으로 줄탁의 과정까지는 다 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한만 차고 잘못된 알은 곪아서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
쇳덩어리를 녹여서 연장을 만들기 위해서 풀무질에 시뻘건 쇠를 두드림이 필요하다. 때를 놓쳐 버리면 새 연장도 그냥 고철 덩어리로 남겨질 뿐이다. 두들기기만 해도 안되고 담금질만 해도 안된다.


또한 기다릴 때는 기다려야 한다. 고치로 나뭇가지에 붙어있던 나방도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날아가기 위해서는 기다림도 필요하다.
마지막 날개 죽지를 고치 속에서 빼내려고 몸부림치며 퍼덕일 때 곤충학자가 고치를 찢어 도와주었더니 아차! 나비는 꼬랑지를 땅에 끌며 날지 못하더라는 거다.
내게 얹힌 문제와 고난은 내가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한다. 지금 당장은 안타깝고 괴로워한다고 싸구려 도움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것은 마치 독수리가 새끼를 물고 높이 날아 창공에 내린 점은 어린 독수리의 날개에 힘을 얻게 함과 같은 이치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막고 그는 나로 더불어 막으리라” 라는 말씀이 나온다.
예수님이 문 밖에서 두드림을 ‘줄(啐)’이라 하면 내가 그 두드림의 반응으로 문을 열게 됨을 ‘탁(啄)’이라고 인용할 수 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에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안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고 한 일이 몇 번이냐” 또한 마태복음 26장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닭과의 예화를 자주 사용하셨다.


예수를 알고 그를 받아들여, 모시고 새 생명을 얻게 함은 껍질을 두들겨 주실 때 껍질 안에서 밖으로 쪼아서 껍질을 깨는 “거룩한 파괴”가 있어야 한다.
이 원리는 불교에서의 깨달음이나 성경에서의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동일한 원리라고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를 더불어 먹으리라.”